제68화.
분명히 숲속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눈을 뜬 곳은 내 방이었다.
침대에서 느껴지는 무게에 고개를 돌아보니 엄마가 눈을 감은 채 기대어 잠든 모습이 보였다.
"…’
‘내가 왜 여기에서...' 멍한 정신이 맑은 공기를 쐬면서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젯밤의 일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뛰쳐나가서 라그나르에게 폭언을 내뱉고, 알려서는 안되는 진실을 말해 버렸다.
내가 그를 감옥에 가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라, 라라.”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겁에 질려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해 버렸다.
그래서는 안 됐었는데.
적어도 그 아이에게는 그렇게 이 기적이고 모질게 대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창백한 낯으로 당장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가 바르작거리자 엄마도 깨어났는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프네? 일어났니?”
"어, 엄마. 라, 라라에게 가 봐야 해요. 라라가, 라라가 나 때문에!"
어제의 상황을 정리해서 이야기 해야 할 텐데.
조급한 마음과 당황한 목소리가 섞여들어 버벅거리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잠시만, 잠시만 다프네."
“라라가 나 때문에 그곳에 갇혀 있을 테니까 어서 꺼내 주러 가야 한단 말이에요!”
엄마가 당장 뛰쳐나가려는 나를 붙잡았다.
나는 발버둥을 치면서 당장 가야 한다고 소리를 치다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데려다줄게. 그러니까 진정하고 우선 옷부터 제대로 입자.”
"......."
나는 얌전히 엄마의 도움을 받아서 옷을 갈아입었다.
'내가 이런 따뜻한 옷을 입을 자격이 있을까?’
라그나르는 그 추운 곳에서 벌벌떨고 있을 텐데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멍한 눈빛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샌가 숲속에 들어와 있었다.
도착한 공터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게 무슨….”
그 커다란 감옥이 갑자기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흔적도 하나 없이 사라졌다.
주변을 둘러보면 분명히 같은 장소가 맞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감옥이 있었던 자리에는 많은 양의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설마….'
나는 더는 상상하고 싶지 않아 머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엄마. 이상해요. 분명히 어제 여기에, 감옥에 라라가 있었어요.”
“이른 아침에 와 봤을 때에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어."
리카르다의 우울한 목소리에 나는 그럴 리가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
"혼자 빠져나오지 못할 테니까 어서 도와줘야 해요!"
“정말이야. 새벽에 겨우 너를 찾고서 이곳에 왔을 때 라그나르는 사라진 상태였어. 감옥과 함께.”
함께 온 레녹스마저 진지한 목소리로 이 거짓말 같은 상황이 현실이라고 말해 줬다.
“내가 심한 말을 해서 그래요.
분명히 라라가 더 무서울 텐데.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아무리 두려워도 놓아서는 안 되었는데.
바보같이 혼자서 결론을 내리지 말고 함께 해결할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니 아무것도 아닌 나로 인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미안해, 미안해.”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터트렸다.
이야기를 크게 틀어 살아남겠다는 내 욕심에 잘못 없는 라그나르가 희생되었다.
나도 내 엄마를 죽인 둘과 다를 것이 하나 없지 않은가.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라라, 미안해. 내가 그래서는 안됐었는데! 내가 겁쟁이라서 그랬나 봐. 내가 제일 나쁜 사람이라 그랬어!”
처음부터 나를 강제로 얽매는 이 운명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었더라면, 그저 주어진 죽음을 받아들였더라면.
다시 찾아온 죽음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면 소중한 네가 죽지는 않았을 텐데, 이 모든 생각과 함께 내가 라그나르에게 했던 못된 말들이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나는 그 아이에게 독을 주고, 직접 삼키게까지 한 것이다.
이 죄를 감히 누구에게 용서받아야 할까?
우리 가족?
아니면 또 다른 가족을 잃어버린 나 때문에 죽어 버린 라그나르?
이 세계를 만들어 낸 신?
아무리 죄를 빌고 빌어도 너는 내 곁에 돌아오지 않을 텐데, 잘못했다고 빌어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흐어엉.”
커다랗게 터진 울음에 가족들이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황급히 나를 감싸는 것도, 나를 안아 드는 것도 느껴졌지만 이 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내가, 내가 라라를 죽였어요. 내가 그 아이를 그렇게 밀어낸 거야.”
"아니야, 아니야. 다프네.”
나를 위로하는 목소리가 들려와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위로를 받아들이면 내가 잘못한 것에서 도망치는 것 밖에 되지 않으니까.
날씨가 추운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그렇게 한참을 울다 보니 나도 모르게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새벽에 간신히 다프네를 찾아내었더니, 이번에는 라그나르가 사라져 버렸다.
라그나르가 사라진 것을 안 다프네는 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울다가 쓰러져 버렸고,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건에 베네 디토가는 정신이 없었다.
클로에는 또다시 쓰러진 다프네를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걸까..'
마치 모든 불행이 한 번에 몰려온 느낌에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아파 왔다.
‘어디서부터 잘못이 되었는지..'
클로에는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의 책임이라 느끼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도 라그나르를 그곳에 두는 게 아니었어.'
라그나르가 자신을 그곳에 데려다달라고 하였어도 그 말을 들어줘서는 안 되었다.
'다프네를 제대로 살펴만 보았어도 괜찮았겠지.'
그 추운 밤 어두운 길을 또다시 헤맬 일도 없었을 것이고, 다프네가 후회할 일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악셀리우스와 결판을 냈었어야 했어. 아니, 애초에 외출을 자제시켰더라면.'
모든 것이 후회로 남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이제야 조금씩 행복해지고 있는 아이였는데 그 행복도 모두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죽음은 계속해서 다프네를 먹잇감 삼아 주변에서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다프네가 가여워 대신 그 죽음을 쫓아내 주고 싶었다.
“미안함보다는 사랑을 주고 싶은데 어째서 뜻대로 되지 않는 걸까.”
클로에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이 상황에서 가만히 눈물을 흘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이제부터는 네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구나.”
어쩌면 진작에 이러한 선택을 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클로에는 더는 자신의 딸이 괴로워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클로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프네가 일어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선명히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굳은 다짐이 담겼다.
* * *
“다프네는 어때?”
악셀리우스의 말에 바삐 움직이의 말에던 클로에의 손이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보며 악셀리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아파?”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 걱정되어 상단을 방문했다.
하지만 클로에는 일에만 매진할 뿐 아무 말이 없으니 악셀리우스는 걱정을 점점 키울 수밖에 없었다.
악셀리우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프네의 모습을 떠올렸다.
'잔뜩 겁에 질린 모양이었지.'
죽고 싶지 않다고 중얼거리는 말까지 한 것을 보면 무언가 심각한 일이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과거에 학대를 받았다고 했지.
비슷한 일을 겪기라도 한 걸까.'
그러한 생각이 들자 악셀리우스는 자신이 한심해서 미칠 것 같았다.
다프네가 악녀의 딸이란 걸 알게 되자 은연중에 다프네가 받은 학대를 있을 법한 일이라고 순간이나마 생각해 버렸다.
'괴로운 마음을 한 번이라도 알아주었더라면 그 아이가 그렇게 두려움에 떨지도 않았겠지.'
친엄마의 기일이 다시 한번 다프네에게 끔찍한 하루가 되었을 것이다.
'어른이니까 그 마음을 보듬어줬어야 했어. 불안해하지 않도록 더욱 감싸 줬어야 했는데.’
악셀리우스는 배려가 부족한 자신에게 한심함을 느끼며 자신의 머리를 한 대 내려쳤다.
큰 소리에 클로에가 잠시 눈짓을 준 듯싶었으나 이내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병문안도 안 되는 거야?”
“안 돼.”
“네가 다프네 옆에 없어도 괜찮아? 찾을지도 모르잖아.”
“다프네가 깨기 전에 끝마쳐야 할 일이 많아. 당분간도 계속 바쁠 테고.”
클로에는 어떠한 서류에 도장을 찍고 나서야 책상 위에서 일어났다.
“겨울이 왔는데 그렇게 바쁘다고? 도대체 무슨 일인데?"
궁금증이 가득한 악셀리우스의 표정에 클로에는 별것 아니라는 듯 담담히 말을 꺼냈다.
“우리는 클레멘스 제국을 떠날 거야.”
* * *
다시 눈을 떴을 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라라는….”
일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라그나르를 찾지 못했다.
미안하다는 레녹스와 리카르다의 말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둘은 잘못한 것이 하나 없으면서도 내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렇게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자니 누군가가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피곤한 안색인 엄마가 나를 보자마자 빙긋 웃었다.
힘겹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나는 참아 왔던 눈물을 다시 왈칵하고 터트렸다.
엄마는 그런 나를 조용히 안아주었다.
토닥이는 손길은 따뜻했지만, 이것이 내 죄를 사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죄송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 모든 게 엉망이 되었어요. 이렇게 멍청한 후계자를 두실 필요는 없어요. 저를 내치셔도 좋아요.”
계약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말에 토닥이는 손길이 멈췄다.
엄마는 나를 천천히 떼어 놓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계약 따위와 상관없이 이미 너는 내 딸이란다. 그러니 그런 말하지 말렴. 이 모든 건 부족한 내 잘못이니까. 다프네 너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
엄마는 마치 주문처럼 미안하다는 말과 잘못한 것이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따스한 사랑은 기뻤으나 시린 마음을 완벽하게 채워 줄 수 없었다.
엄마의 말에 다시 한번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라그나르는 죽었다.
바로 나 때문에 죽었다.
내 빛은 이렇게 죽고 말았다.
나는 영원히 이 겨울을 잊지 못할 것이다.
“다프네.”
한참이고 나를 위로하던 엄마의 입이 열렸다.
“우리 클레멘스를 떠나서 세계를 여행해 보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