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하지만…. 갑자기 왜요?"
“이곳은 너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엄마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클레멘스에서 거대한 상단을 운영하는 엄마가 이 결심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그 모든 것이 오로지 나 때문이라는 사실에 나는 미안함에 눈물어린 말을 꺼냈다.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건 도망치는 것밖에 없네요.”
그 사실이 너무 비참했다.
"도망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마렴. 다 엄마의 욕심으로 나가고자 하는 거니까.”
어떻게 이게 엄마의 욕심일까.
내 우울한 표정에 엄마는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베네디토 같이 큰 상단이 한곳에만 머문다면 너무 아쉽지 않겠니?"
"......."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각각 탑에 들어가기 전에 대륙을 돌아다니자 꾸나. 여행도 하고, 견문도 넓히고, 상단도 확장시키고."
엄마의 밝은 목소리에 나는 뿌연머릿속을 뒤져서 말을 꺼냈다.
“.…엄마. 그날 밤에 했던 이야기마저 해 주세요.”
"......"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엄마는 바로 알아듣고 차분하게 지난밤의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공작성의 지하에서 많은 시체와 피가 발견되었단다. 피로 황실을 향해 저주를 내린 흔적도 함께.”
엄마의 설명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게 프레이르의 짓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어. 심지어 공작가 하인들마저 처음에는 증언이 서로 달랐으니까.”
수상할 정도로 재빠르게 마무리 된 재판도 이상했다는 설명에 뿌연 머리가 맑아져 오기 시작했다.
"만약에 범인이 헤로니스 공작이었어도 엄마와 같은 처벌을 받았을까요?”
“...아니. 아닐 거다.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을 거야. 오히려 숨기려고 했겠지.”
“그런데 왜 공작 부인인 엄마를 위해서는 그렇게 해 주지 않았을까요. 확실하지도 않았는데.”
내 입가에 비웃음이 걸쳐졌다.
"아, 자기가 씌운 누명이라서 그랬을까요?”
“그 이상은 자세히 조사할 수가 없어서 미안하구나. 모든 경로로 찾아보아도 마치 누군가가 막은 것처럼 조사가 막혀 버려서….”
누군가가 막은 것 같다고?
그것은 엄마를 악녀로 만들기 위한 원작의 강제성인 걸까?
“공작가의 사람들이, 친엄마와 나를 지옥으로 밀어 넣은 모두가 미워요. 그들이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 도르륵 흘러내렸다.
“정말로 공작이 친엄마에게 누명을 씌운 걸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저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죠? 복수를 해야 하는 걸까요?”
"복수가 아니야. 그들이 받아야 할 정당한 죄의 대가를 받게 하는 것이 어떻게 복수가 될 수 있니?”
엄마의 담담한 목소리에 나는 눈물 고인 눈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죽음은 내가 살아 있는 한 끝까지 나를 쫓아올 것이다.
그것이 정해져 있는 것이니까.
프레이르가 악녀라는 것처럼.
‘하지만 프레이르가 악녀가 아니라면? 그래서 내가 무사히 살아남아서 그녀의 누명을 벗긴다면?'
잘못 알려진 모든 것을 바로 잡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렇게 해도 원작의 강제성이, 나를 감싼 운명이 나를 죽이려고 할까?
분명히 막기 위해 어떻게든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죽음이 더는 무섭지 않았다.
이미 라그나르가 나 대신 죽었으니까. 이것보다 무서운 것은 더는 없을 테니까.
원작에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라그나르마저 내 옆에 없는데 조금이라도 망설일 이유가 없다.
'결국, 돌고 돌아서 원래의 다짐으로 돌아왔네.'
정말로 내 손으로 라그나르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미안해. 라라.”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손바닥에 고개를 묻었다.
라그나르가 죽은 것은 오로지 나의 책임이었다.
어떠한 말을 해도 라그나르에게 용서를 빌 수 없겠지.
이 죄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내게는 또 다른 악몽이 되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악몽을 토대로 다시 일어날 것이다. 더 이상 소중한 이들을 잃지 않기 위해.
내 죄는 엄마의 누명을 벗기고, 복수까지 마쳐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달게 받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약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돼. 강해져야 해.'
누군가가 알면 분명히 못되고, 악독하다고 손가락질을 할지 모르지만 괜찮다.
'악녀의 딸인데 이 정도 심술은 부려도 괜찮잖아?'
싸한 눈빛과 함께 라그나르와 함께 쌓아 올린 다정한 감정은 가슴속 깊숙이에 묻고, 또 묻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웃으며 말했다.
"엄마, 우리 오스왈드로 가요.”
***
시몬은 자신이 받은 편지를 몇 번이고 읽으면서 이 내용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편지를 든 손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달달 떨려 왔다.
“라그나르가 죽었다니…. 다프네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친우의 사망 소식은 아무리 황태자라도 아직 어린 시몬이 받아들이기는 무거운 현실이었다.
믿기지 않는 내용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프네는 라그나르가 자신 때문에 죽었으니 시몬을 볼 낯이 없다는 말과 함께 곧 클레멘스를 떠날 것이라는 말을 적어 보냈다.
“답장은 받지 않겠다? 다프네 도대체 너는…!”
시몬은 차마 편지를 구기지도 못하고 천천히 손에서 내려놓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대공은 알고 있나?”
시몬은 편지를 들고 온 악셀리우스를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창백한 악셀리우스의 얼굴을 보며 시몬은 이것이 질 나쁜 장난이 아닌 사실이란 것을 겨우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시몬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 당장 베네디토 상단으로 나를 안내하도록 해! 아니야, 다 프네의 집으로 가자!”
자신의 갑작스러운 행보에 주변의 눈길은 따갑겠지만 친우 두 명을 모두 잃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악셀리우스는 시몬이 외투를 챙겨 들어 나서는 것을 바라보다 그저 고개를 숙였다.
이상한 반응에 시몬이 버럭 화를 냈다.
“당장 안내하지 않고 뭐 해!”
"베네디토가는 어제 제국을 떠났습니다.”
“..… 뭐라고?"
“저도 오늘 저택에 도착한 편지.
를 받아 보고 달려가 봤지만….”
악셀리우스가 고개를 젓는 것을 보며 시몬이 외투를 바닥에 내던졌다.
“역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거야! 그게 도대체 뭐지?”
시몬의 말에 악셀리우스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처음 라그나르의 눈을 보고 혹시 그 아이가 희귀병에 걸린 것이 아닐까 하고 홀로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니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것이 억울하지만 이해를 하자면 할 수도 있었다.
미치도록 슬퍼서 당장 저승에서 멱살을 잡고 끌어 올리고 싶지만, 빌어먹게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그나르의 장례식조차 치르지 않고서 이렇게 떠나 버린다니?
뭔가 이상했다.
“말하라고 했어!”
“말할 수 없습니다.”
“역시 무언가가 있기는 했구나.”
시몬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다프네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왜 갑자기 이렇게 떠나야 했던 걸까.
다투기라도 한 듯 어색해진 악셀리우스와 다프네의 모습.
연극을 볼 때도, 공작을 만났을 때도 이상한 반응을 보였었다.
시몬은 그날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그러자 무언가 머리를 팟 하고 지나치더니 깨달음을 준 것처럼 혹시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다프네가 상단주의 친딸이 아닌가?”
“금안. 귀족 중에 금안을 가진 자는… 헤로니스 공작뿐이군.”
“보육원에 언제 불이 났었지?"
“작년 겨울입니다.”
악셀리우스의 말에 시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아마 여덟 살… 설마 다프네가 악녀 프레이르의 딸이라는 건가?”
"......."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악셀리우스의 표정만 보아도 그 대답은 유추할 수 있었다.
시몬은 표정을 와그작 구겼다.
“그 사실을 알고서 대공이 그들을 내쫓은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악셀리우스는 자신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상태였다며 말을 이어 갔다.
"아마도 다프네 홀로 내린 결정일 겁니다. 전하께 방해가 되지 않도록 떠나겠다는 말을 먼저 꺼냈었습니다.”
“그걸 말리지 않았어?”
시몬은 악셀리우스의 멍청한 대답에 버럭 화를 냈다.
"고작 그딴 이유로 소중한 우정이 깨질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도 화나지만 그걸 가만히 듣고만 있었나, 대공은?”
시몬은 답답한 마음을 터트렸다.
“내게 혹시 방해가 될까 봐 고민했다는 말은 집어치워! 방해될지 안 될지 선택하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었어야 했어! 대공도, 다프네도 아닌 내 몫!”
시몬은 씩씩 화를 내뱉다가 밀려오는 허탈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한 번에 소중한 이들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은 마치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괴롭고 또 외로웠다.
“라그나르가 죽었으니까 내가 다 프네를 지켜 줘야 했는데.”
시몬은 다프네만 보면 두근거리는 마음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수가 있었다.
단순한 친구를 향한 마음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괜찮다고 감싸 준 그 따스한 아이를 자신도 모르게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야 자신의 마음을 자각했는데 이미 멀리 떠나 버렸다고 한다.
그날 자신이 눈치가 조금만이라도 빨랐더라면 다프네는 이렇게 도망가지 않았을 것이다.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거겠지.'
시몬은 허탈한 마음을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로니스 공작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나.”
“약혼식 관련해서 방문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대는 먼저 돌아가 보는 게 좋을 거야. 함께 있으면 좋은 꼴 보기 힘들 테니까.”
시몬은 마치 무슨 사고라도 일으키겠다는 말을 담담한 어조로 꺼내었다.
“하지만….”
"돌아가. 나는 내 방식대로 내 친구를 지킬 거니까.”
시몬은 악셀리우스를 쫓아낸 뒤 화려한 응접실로 향했다.
대공이 갑작스럽게 찾아와 약속시간에 늦었음에도 모두가 여유롭게 인사를 하며 자신을 반겨 주고 있었다.
콘란드 헤로니스와 그의 부인 유니스 헤로니스, 그리고 곧 자신의 약혼녀가 될 마리아 헤로니스와 그녀의 동생 카스토르 헤로니스.
황제와 황후까지 모두 모인 그 장소에 앉아 시몬은 빙긋 웃었다.
곧 화기애애한 대화와 식사가 이 어지며, 어느새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는 약혼식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마리아가 어리기도 하니.
약혼식은 열 번째 생일이 지나고서 올리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헤로니스 공작의 말에 황제는 타당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에 있을 황태자 탄신일 때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면 되겠군.”
어른들의 대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갈 때 시몬이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송구하오나, 아바마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황제의 허락에 시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꺼내는 말이 어떠한 파장을 일으킬 줄 알지만 던지는 것에는 후회 따위 없었다.
“저는 마리아 헤로니스 양과 약혼을 진행할 마음이 없습니다.”
“!!!"
갑작스러운 발표에 모두가 당황에 물든 눈빛을 시몬에게 던졌다.
불쾌한 소리에 콘란드의 얼굴이 굳었고, 황후가 당황하여 시몬을 다그쳤다.
“그게 무슨 말이냐! 헤로니스 영애는 황실에 꼭 필요한 아이란다.”
그런 황후의 말과 다르게 황제는 눈빛을 빛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연유가 있느냐?”
시몬은 당당한 표정으로 힘차게 답했다.
“황실에 황금색이 필요하다면 제일 아름다운 빛을 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뜻은.….”
황제의 말이 흐려지자 콘란드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다른 금색 눈동자를 가진 여식이 있다는 듯이 말을 하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네.”
시몬이 기다렸다는 듯 답하고는 마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리아 헤로니스 양의 탁한 금빛이 아닌 그 어떤 색보다 찬란한 금색 빛의 눈을 가진 아이를 알고 있네.”
곧 유니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모욕을 당한 듯한 낯빛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깔끔하게 이 상황에 대해 정리를 했다.
"그러니 헤로니스 영애는 내 약혼녀가, 황태자비가, 또 미래의 황후가 될 수 없을 거야.”
“기가 막히는군요! 이런 모욕을 당한 이상 저희 헤로니스에서도 약혼을 진행할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시몬의 발언에 콘란드는 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식솔을 챙기고서 자리에서 벗어났다.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된 자리를 보며 시몬은 다시 웃었다.
비록 부모님을 설득하는 과정이 남아 있었지만 그건 대공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시몬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다프네를 지키고자 다짐했다.
자신은 다프네가 돌아올 자리가 되어 줄 것이다.
일찍 죽어 버린 가여운 친구가 혹시 걱정하지 않기를 바라며 마음속으로 그를 위로했다.
'라그나르, 너무 걱정하지 마. 네 몫까지 내가 다프네를 지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