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마차의 열린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뺨이 아려 왔다.
어찌나 차가운지 몸을 부르르 떠는데 곧 커다란 손이 다가오더니 창문을 닫아 버렸다.
“다프네, 감기 걸려."
레녹스가 창문을 닫은 손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새로운 도시는 오래간만인걸."
밖을 구경하고 싶다는 목소리에 레녹스가 작게 웃었다.
“곧 도착하니까 조금만 참자.”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에 뾰로통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도 벌써 열세 살이나 먹었어.
어린애 아니라고."
“내게는 아직도 귀여운 꼬마 아가씨인데 어쩌지.”
걱정에 돌아오는 것이 투정뿐이 어도 레녹스는 빙긋 웃었다.
확실히 스물세 살이나 먹은 레녹스에게는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일 것이다.
그래도 리카르다라면 같이 창밖을 구경해 줬을 텐데.
나는 괜히 잠든 리카르다의 뺨을 콕콕 찔렀다.
이럴 때에 옆에서 편을 들어주지 않고 잠을 잔 벌이다.
그렇게 한참을 콕콕 찌르고 있다.
보니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나 보구나.”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자 리카르다가 눈을 번쩍 떴다.
“아, 생각보다 빨리 왔네.”
리카르다가 잠든 적이 없다는 듯 멀쩡한 소리를 내면서 웃으며 일어났다.
“마차를 타면 나랑 놀아 준다던 리카르다는 어디 갔는지."
덤덤한 내 말에 리카르다가 당황하더니 콧등에 있는 안경을 추켜 올리며 어색히 웃었다.
“어제 너무 늦게 잤나 봐. 우리 다프네는 오빠 이해해 줄 거지?”
“생각 좀 해 보고?”
장난스럽게 웃는 것에 나 또한 가볍게 웃었다.
먼저 내린 레녹스가 내미는 손을 잡고 내리니 낯선 공기가 뺨에 닿았다.
“지난 도시에서는 풀 냄새가 많이 났었는데. 여기는 짠 냄새가 많이 나네.”
"바다가 있는 도시여서 그래. 저 크시즈는 항구가 있는 도시거든."
레녹스의 설명에 리카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망토 자락을 더 꼼꼼하게 여며 줬다.
단단히 껴입다 못해 몸이 부해 보일 정도로 입은 덕에 바람이 속으로 스며들어 오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답답해.”
답답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망토 모자 안에서 머리가 풍하고 튀어나왔다.
“키키. 답답했어?"
키키의 작은 울음소리에 리카르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다가 미안하다며 키키의 머리를 키키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자라기는 했으나 여전히 내 눈에는 아기 여우처럼 보였다.
곧 갸르릉하며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는 것에 함께 웃는데 우리의 마차 뒤로 여러 대의 짐마차가 도착하는 것이 보였다.
“엄마는 어디 있어?"
“해상으로 저 짐들을 모두 보낸후에 호텔로 오신다고 하네.”
나도 엄마를 따라서 함께 가고 싶었지만, 방해될 것이 안 봐도 뻔했다.
‘호텔이라..'
관광지로서 유명하다고 해도 이런 작은 도시에 이만큼 커다란 호텔이 있다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큰 건물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리카르다가 내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아무래도 오스왈드로 넘어가는 주요 항로다 보니 관광객이 많아서 무리하며 큰 호텔을 지었다고 하더라."
“확실히. 제국에 있는 것만큼 화려하네.”
레녹스마저 감탄하며 말하자 리카르다는 그것뿐만이 아니라며 설명을 덧붙였다.
"또 이 도시에는 콜로세움이 있거든.”
“콜로세움?”
내가 묻는 것과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서 와아아~ 하고 커다란 함성이 들려왔다.
“자세한 설명은 들어가서 해 줄게. 감기 걸리면 큰일 난다고, 이제야 다리도 다 나았는데.”
리카르다가 호들갑을 떨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레녹스까지 마주 잡자 어쩔 수 없이 궁금증을 접고서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설명을 해 주겠다던 리카르다는 엄마를 도와줘야 한다며 외출을 했다.
레녹스도 투숙 문제로 호텔 직원들과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나섰고, 객실에는 나 혼자만이 남았다.
"혼자 있으니 어색하네.”
내가 홀로 덩그라니 서 있자 키키가 꼬리를 살랑 흔들며 다가왔다.
“우리 키키밖에 없어.”
나는 키키를 망토 자락으로 감싸서 안아 들고는 테라스의 창문을 열어서 밖으로 나섰다.
멀지 않은 곳에 콜로세움이라고 불리는 동그랗고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클레멘스 제국을 떠나 이곳저곳 여행을 하게 된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라그나르가 죽고 내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자 일은 일사천리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클레멘스 제국에 있는 베네디토상단은 살바토르가 상단주 대리를 맡게 되었다.
엄마는 강행했다.
엄마의 행보에 많은 이들이 황당해하며 무리한 일이라 말렸지만, 상단 관계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짐을 싸고, 목적지를 정해서 제국을 떠났다.
우리는 제국을 떠나 여러 왕국을 돌아다녔다.
많은 왕국을 돌아다니면서 특산물을 취급하는 사업이 하나 추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나쁘지 않은 장사라고도 얼핏 들은 것 같았다.
레녹스와 리카르다는 각각 연금탑과 마탑으로 들어가겠다며 함께 떠나게 되었는데 5년이 지나도 옆에서 찰싹 붙어 떠나지를 않더라.
그리고 나는 그동안 꾸준히 각국의 신전들을 방문하며 치료를 받았다.
무리하지 않는다면 다리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판정을 받고 나서야 치료가 끝이 났었다.
'성녀의 도움이 있었다면 더 빨리 나았을 텐데. 그래도 다 나았으니까 괜찮은 거겠지?'
나는 둥근 테라스 기둥에 기댄 채 차가운 공기를 맘껏 쐬었다.
키키가 얼굴을 빼꼼 내밀어 나와 함께 찬 바람을 쐬었다.
“조금만 쓰고 들어가자?"
키이잉-
그러자는 듯 바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키키의 머리에 내 뺨을 비볐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
라그나르는 내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차가운 겨울은 돌고 돌아 계속해서 내게로 찾아왔다.
나는 비축하고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다가 가방 속에 있는 편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시몬….”
이 바보 같은 친구는 내가 매몰찬 편지를 남기고 떠났는데도 이렇게 꾸준히 편지를 보내고는 했다.
클레멘스에 있는 본점을 통해 전해 달라며 매번 보내오는 편지에 나는 기쁘면서도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포기할 때도 되었잖아.”
애꿎은 편지 봉투를 구기듯 잡다가 에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답장이 없는데도 5년이나 상단으로 꾸준히 편지를 보내는 시몬이나, 답장도 하지 않으면서 계속 보관하는 나나 똑같이 멍청한 사람이다.
“그냥 잊어 주지."
한참 지나고 나서야 클레멘스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그때가 되면 이미 어른이 되어서 어릴 적 기억 따위는 모두 잊어버릴 테니 조금만 참으면 되겠지.
속상한 마음에 다시 편지를 품속에 주섬주섬 넣고서 후우하고 깊은 숨을 내뱉었다.
단 한 번도 펴 보지 못한 편지는 이렇게 다시 가방 속으로 사라졌다.
하얀 입김이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보며, 나는 오랜만에 주어진 혼자만의 시간을 활용해 보기로 했다.
'많이 비틀렸더라도 원작의 내용을 조금씩 정리해 둘 필요가 있어.'
원작의 2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면 아직도 시간이 남아 있지만, 어째서인지 이 도시의 이름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분명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을 거야.'
나는 눈을 감고 원작의 내용을 천천히 떠올려 보았다.
‘마리아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오스왈드로 가출을 하게 돼.'
오스왈드에 자주 등장하는 던전을 탐험하고 싶다는 것이 가출의 이유였지.
해맑은 마리아는 동생 카스토르와 함께 떠나게 되는데 신분을 속이고서 오스왈드 아카데미에 무사히 편입까지 하게 된다.
'아카데미에 들어간 것도 던전을합법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지. 참 무모해.'
그 후 던전을 탐험하던 중, 라그나르를 만나게 되고, 둘은 그곳에서 친구가 된다고 했다.
'지금은 라그나르가 없으니 그런 일은 없겠지만.'
원래대로라면 오스왈드로 함께 돌아가서 베네디토 상단을 위해 엄마의 복수를 돕고….
보육원에 숨어들어서 증거 자료를 훔쳐 오고, 팔려 나갈 뻔한 보육원 아이들을 구출해 주게 되며 훌륭한 명성도 쌓아 가게 된다.
‘그 후에 라그나르는 공식적으로 베네디토 상단주가 되고, 공작은 딸이 사랑하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허락한다, 였지?'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가겠다며 많은 사람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며 완결이 났던 것 같다.
아카데미를 배경으로 던전을 탐험하면서 우정과 사랑을 쌓는 것 빼고는 별 내용이 없는 소설이었다.
'기왕이면 조금 더 자세히 써 주지 그랬어.’
괜히 소설의 원작자 탓을 하며 나는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렸다.
"분명 내게 도움 될 만한 정보가 더 있을 텐데….”
무언가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 그 순간 갑자기 커다란 함성이 다시 들려왔다.
"콜로세움….”
누군가가 우승이라도 했는지 엄청나게 울리는 소리에 머릿속에서 팟 하고 무언가가 떠올랐다.
“마리아의 옆에는 항상 뛰어난 기사가 있다고 했지. 여행 중에 만난 기사라고….”
콜로세움을 무너뜨리고 구출해 준 보답으로 마리아만의 기사가 되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있었다.
“어쩐지. 도시의 이름이 낯설지 않더라니.”
원작을 되짚어 본 보람이 느껴졌다.
아쉽게도 내가 이곳에 들어온 지도 꽤 지나서 그런지 그 기사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자라는 점과 마리아와 비슷한 또래라는 것밖에 기억이 안 나."
적은 단서지만 이 정도 단서라도 기억해 낸 게 다행이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야.”
그런 훌륭한 기사를 마리아의 옆에 둘 생각은 없다.
“안 그래도 슬슬 혼자 다니기 부담스러웠는데 잘됐다.
내 밝은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는 키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마리아의 것을 빼앗는 기분이지만 어차피 원작은 틀어졌으니까.' 정해진 원작대로 꼭 마리아가 가져야 한다는 법도 없잖아?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넘어가기에는 가치 있는 정보인지라 너무 아깝기도 하고.
나는 다시 한번 우리의 목적지가 오스왈드인 이유를 떠올렸다.
"난 대륙 최고의 교육 기관인 오스왈드의 아카데미를 훌륭하게 졸업할 거야.”
아카데미에서 배울 수 있는 넓고 깊은 지식과 던전에 들어가도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다양한 인연들을 만들어 갈 것이다.
'더는 좌절하고 쓰러지고 싶지 않아. 그러기 위해 스스로를 지킬힘을 길러야 해.'
강한 힘에 굴복하지 않도록, 원작에 지지 않도록 강해질 것이다.
“그 기사라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되겠지? 역시 내 옆으로 데려와야겠어.”
나는 새로운 인연을 위한 다짐의미소를 지었다.
* * *
그날 저녁 평화로운 식사 시간에 오래간만에 소원을 입에 담아 보았다.
“엄마. 저 세 번째 소원을 사용하고 싶어졌어요.”
“소원은 오랜만이구나. 그래 어떤 소원이니?”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콜로세움에 드나드는 걸 허락해 주세요.”
“콜로세움?”
엄마의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곳에서 찾고 싶은 게 생겼거든요.”
“뭔지는 몰라도 필요한 게 있다.
면 내가 찾아다 주마."
곧이어 들려오는 단호한 말에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이 상단의 후계 자잖아요. 이제 원하는 것을 스스로 찾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콜로세움은 위험한 곳이란다.”
“상인이 위험한 곳이 무섭다는 이유로 빛나고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되잖아요?"
가슴에 손을 올리고서 믿으라는 듯 신뢰감을 가득 담아 웃었다.
“최대한 위험한 일은 피할게요."
"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엄마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는 것을 찾는 것도 좋지만 조심하렴. 콜로세움 전투가 합법이긴 하지만 위험한 장소라 들었으니.”
매일 전투가 일어나는 곳이라 위험한 장소라는 걸까?
나는 엄마의 경고에 의문을 품고서 다음 날 리카르다와 함께 콜로 세움 경기장에 방문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된 그 순간 나는 모두가 이곳에 방문하는 것을 말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