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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73화 (72/185)

제73화.

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내 옆에 앉은 키키의 배를 긁어 주면서 심통난 마음을 진정시켰다.

“다프네, 표정이 뾰로통하네.”

객실로 돌아온 레녹스의 말에 리카르다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데 다프네가 찾는 게 사람이더라고, 사서 데려오지 못했으니, 눈앞에서 뺏긴 기분일 거야.”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혹시 용돈으로는 부족했던 거야? 보태줄까?”

레녹스의 말에 나는 심통 난 표정으로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니. 돈은 문제가 안 되는데.

그쪽이 가기 싫다고 그래서.”

리카르다의 설명에 레녹스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의아해했다.

“누구인데??"

“플뢰르라는 여자애였어. 콜로세움 선수던데 형은 누군지 알아?”

"아. 콜로세움의 차기 에이스라는 소문을 들어 봤어.”

레녹스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내 옆에 앉았다.

“다프네는 플뢰르가 가기 싫다고 하면 억지로 데려올 생각이 없는 거지?”

“억지로 옆에 두어서 뭐 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레녹스가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은 내가 키키를 쓰다듬는 것처럼 따스했다.

“기특하네. 억지로 데려오려고 하지 않고."

"내 사람으로서 옆에 두고 싶어.

그러니까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아.”

“응. 기특해, 기특해.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려고?”

레녹스의 다정한 말에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내일 또 가서 설득할 거야.”

“설득할 수 있겠어?"

레녹스의 물음에 나는 절레절레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걸.

플뢰르의 말이나 눈빛은 분명 콜로세움을 경멸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허락할 줄 알았다.

'돈으로 해방해 주겠다는 건데 싫다고 할 줄은 몰랐지.'

플뢰르는 고민하는 듯해 보였지만 이내 단호하게 거절했다.

"너무 단호하게 싫다고 해서 다시 찾아가기도 조금 그렇지?”

리카르다도 플뢰르의 거절을 떠올렸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오기에 가득 찬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도 데리고 올 거야.”

그러자 레녹스가 다정한 얼굴로 생각해 놓은 방법이 있냐고 물었다.

“싫어하는 곳에서 빼내 주겠다고 했는데도 거절했어.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음,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걸 파악해서 설득한다면 방법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원작에서 마리아는 부패한 콜로 세움을 무너트려 버린다.

분명 플뢰르는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고, 콜로세움을 무너트려 자신을 구해 준 마리아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콜로세움을 무너트려야만 데려갈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불법적인 노예 매매 거래로 인해서 콜로세움이 발칵 뒤 집혔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정확히 언제부터 일어난 거였더라.

나는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고는 리카르다에게 말했다.

"내일은 나 혼자 가 볼게."

“위험한데.”

그건 좋지 않은 생각이라며 리카르다가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둘 다 바쁘잖아. 걱정 마. 내 옆에는 키키가 있어 줄 거니까.”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아들었는지 키키가 내 무릎 위로 올라오더니 기분 좋은 소리를 내뱉었다.

살랑거리는 꼬리가 뺨을 간지럽혀 꺄르르 웃으며 키키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우리를 보며 레녹스가 물었다.

“안 된다고 해도 혼자 갈 거지?"

레녹스의 물음에 당연한 것을 묻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한 줄 알았는데 완전 말썽꾸러기야. 말 하나도 안 듣고."

리카르다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나는 힘차게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미 엄마에게 허락도 받았고, 오빠들도 괜찮다 했잖아."

“이럴 때만 오빠라는 말 쓰고 말이야.”

리카르다가 한숨을 쉬며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사실은 나중에 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지금 줘야겠다."

“이게 뭐야?”

“우리가 주는 선물이야.”

리카르다의 품속에서 나온 것은 작은 상자였는데 그 상자를 여니 안에는 보라색의 조그마한 귀걸이한 쌍이 들어 있었다.

"마법이랑 연금술을 합쳐서 아티팩트를 만들어 봤어.”

"다프네가 마력이 없어도 얼마든지 우리랑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긴 거지.”

“어머니와도 쉽게 연락 가능할 테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야.”

나는 감탄을 하면서 귀걸이를 만졌다.

“우리가 곧 마탑과 연금탑으로 떠나지만 언제든지 연락하고 싶을 때 하면 돼.”

레녹스의 말에 나는 고마움을 담아서 배시시 웃었다.

“둘 다 고마워.”

나는 소중한 선물을 꼬옥 쥐었다.

“언제든지 위험한 일 있으면 연락해. 내일도 마찬가지고."

“응. 알겠어!”

이 선물 덕에 조금 더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 이제 내게 남은 것은 플뢰르를 설득해서 데리고 오는 것뿐이다.

* * *

혼자 야무지게 콜로세움의 티켓도 사고, 자리에 앉는 것까지 성공했다.

'여전히 시끌시끌.'

이런 잔인한 경기가 뭐가 재미있는지 사람들은 낄낄거리며 누가이길 거라느니 떠들기 바빴다.

'남이 괴로워하는 게 저렇게 좋을까?'

어제 들은 바에 의하면 이곳은 콜로세움의 전투 노예들이 주로 경기를 이루니 잔인할 수밖에 없다 했다.

그걸 대놓고 즐기면서 돈을 거는 저 모습이 좋아 보일 리가.

'애초에 나같이 어린애도 돈만 있으면 입장시켜 주는 곳이라니.

처음부터 그른 곳이라는 거겠지.'

바구니 속에 숨어 있는 키키가 담요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키키의 턱을 살살 긁어 주며 의미 없이 잔인한 경기들을 뒤 로한 채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플뢰르는 왜 그곳에 계속 있으려는 걸까.'

분명 원작에 서술되지 않는 큰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한데 그게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경기를 보다 보면 알 수 있을까 싶어 오기는 했지만. 아니면 내가 기억해 내지 못하는 걸까.'

나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고서는 사람들의 함성을 들으며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일 큰 함성이 이어진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플뢰르가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둥근 경기장에는 플뢰르뿐만 아니라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도 서 있었다.

'저 사람도 전투 노예인가?'

어제 둘러보았을 때 저렇게 밝은 하늘색 머리는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처음 보는데 누구지?"

“용병인가 본데! 플뢰르에게 도전하나 봐!”

처음 보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 관객석이 시끌시끌해졌다.

"과연 새로운 도전자는 플뢰르를 꺾고서 차기 에이스 자리에 등극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부터 경기 시작합니다!”

사회자의 신이 난 목소리 뒤로 경기가 바로 시작되었다.

플뢰르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검을 뽑아 들고는 상대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가면을 쓴 사내 또한 검을 뽑아들고 플뢰르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는 듯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재미없다! 공격해!"

“찔러 버려! 해치워야지, 뭐 해!"

“우우우!”

둘이서 한참을 경계만 하자 곧 관객들의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그 야유에 플뢰르가 안색을 싸악굳히더니 결심한 듯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낮고 빠르게 움직이는 검은 마치 유영하는 듯 여유로웠으나 가면을 쓴 남자는 그걸 너무나도 쉽게 막아 냈다.

"오오오!”

플뢰르는 자신의 공격을 막은 사내를 보며 당황하지 않고 곧이어들어오는 공격을 피했다.

곧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경기 장에 가득했다.

그리고 검이 맞부딪힐수록 플뢰르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어제의 경기와 다르게 플뢰르의 표정에 조급함이 비쳤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표정이 천천히 변해 가는 모습은 관객들에게 좋은 먹이가 되어 주었다.

사람들은 경기의 승패보다는 피에만 미친 자들처럼 격렬해지기 시작했고, 검이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만 경기장에 가득했다.

“앗!”

누군가가 안타까운 비명을 외쳤다.

플뢰르와 가면을 쓴 사내의 검이 동시에 허공을 향해 날아간 것이다.

검은 멀리 날아가 관객석 바로 앞에 꽂혔고, 잠시 후 엄청난 정적이 찾아왔다.

잘못하면 관객석으로 날아갈 수도 있었기에 사람들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듯했다.

"무, 무승부입니다! 오늘의 경기는 안타깝지만 무승부!"

그 정적이 끝나기 전에 사회자가 재빠르게 경기를 끝내 버렸다.

곧 피를 보지 못한 사람들의 야유가 쏟아졌지만, 플뢰르도 가면을 쓴 사내도 모두 퇴장을 해 버렸다.

순간 가면 쓴 남자와 눈이 마주쳤던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어느새 한적해진 경기장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제처럼 플뢰르를 만나러 갔다.

나를 보며 눈을 빛내는 직원에게 금화 하나를 건네주고 플뢰르를 만나러 왔을 때 그녀의 표정은 어제보다 더 어두웠다.

"뭐야. 또 왔나?"

플뢰르의 낮은 목소리와 비교되게 나는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경기가 무승부여서 우울한 거야?”

“누가 우울하다고!”

플뢰르는 욱하고 소리를 치다가 고개를 돌렸다.

“플뢰르는 에이스의 자리를 지켜 내야 해서 그렇지 뭐. 에이스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직원이 무어라 설명을 하려 하는데 플뢰르가 휙 고개를 돌려 그 직원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무서워서 뭐라 말도 못 하겠네.”

직원은 그 눈빛에 한껏 겁을 먹기라도 했는지 멀찍이 뒷걸음쳤다.

플뢰르는 멀어진 직원을 보고서는 욕을 중얼거리더니 곧 내게 물었다.

“무슨 생각인 거야. 분명히 어제 안 가겠다고 말한 것 같은데.”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왔어.”

내 말에 플뢰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직원 쪽으로 턱짓하며 말했다.

“고작 나 같은 전투 노예와 대화하기 위해 금화를 아낌없이 쓴다고?”

“돈은 많아서.”

플뢰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말할 게 있으면 어서 하라고 한숨을 쉬었다.

“경기를 보다 보니 궁금해졌어.

플뢰르는 양날검을 안 쓰는 거야?”

“.…그건 또 언제 봤대?"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검을 맞대기 전까지 검등으로만 공격하는 것 보고 놀랐어. 일부러 검날은 안 쓰는 거야?”

내 물음에 플뢰르가 입을 꾹 다물었다.

“피가 튀면 귀찮아져서 그래."

“나랑 같이 가면 피를 덜 볼 수 있을 텐데.”

그러한 내 말에 플뢰르는 고개를 휙 돌렸다.

대화하기 싫다는 확실한 태도에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있지. 난 성격도 못됐고,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얻고 싶은 사람이라 널 쉽게 포기 못 할 것 같거든.”

“뭐, 뭐?”

내 발언에 플뢰르가 놀란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다음에 또 찾아오겠다는 말이야.”

뒤로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뒤따라붙은 것 같지만 나는 흘려듣고는 밖으로 나섰다.

'힌트가 생기기는 했는데…. 잘 모르겠네. 에이스 자리를 지켜야 할 이유가 뭘까?'

풀리지 않는 의문에 답답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제와 다르게 조금 여유로운 미소가 지어졌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것을 보고서는 어둠이 내려앉기 전에 호텔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이봐.”

어쩐지 처음 듣는 목소리임에도 낯설지 않았다.

보통은 무시하고 지나갔을 텐데 왜 이렇게 뒤를 돌아보고 싶었던 걸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휙 고개를 돌렸고, 의외의 인물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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