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콜로세움 참가자?”
나를 불러 세운 사람은 오늘 플뢰르의 상대였던 하늘색 머리의 가면을 쓴 사내였다.
'사내가 맞나?'
목소리는 조금 어린 것 같은데 잘하면 플뢰르와 비슷한 나이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게 볼일이라도?"
사내는 나를 불러 세워 놓고 한참 말이 없었다.
나는 발을 탁탁 두드리면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기다리고 기다려도 그의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할 말 없으면 가도 될까?”
"......"
가면을 쓴 사내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더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휙 지나쳐 갔다.
“뭐야?”
그렇지 않아도 가면 때문에 수상해 보이는데 이상한 반응까지 보이다니.
미심쩍은 눈으로 멀어지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바구니 안에서 잠들어 있던 키키가 갑자기 폴짝 뛰어올랐다.
“키키? 왜 그래?"
키키는 무언가에 놀란 듯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더니 이내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슬프다는 듯 고개를 묻어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눈까지 꼭 감는다.
“키키?"
다시 불러 보아도 키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악몽이라도 꿨나.”
나는 키키가 놀라지 않도록 다시 담요를 잘 덮어 주었다.
'정말 이상한 남자였지.'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왜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걸까.
의문도 잠시 나는 더 늦어지기 전에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 * *
"분명 어제도 싫다고 말했는데.”
플뢰르는 찾아온 나를 보며 지겹지도 않냐는 듯 짜증을 내었다.
나는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가방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
“먹을래?”
"내 말이 안 들리는 거야?"
플뢰르가 버럭 짜증을 내는 듯싶더니 조용히 초콜릿을 가져갔다.
바로 입안으로 넣으니 입가가 씰룩씰룩한 것이 맛있나 보다.
"하나 더 줄까?"
플뢰르가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어서 그 위에 초콜릿을 우수수쏟아 주었다.
고급스러운 포장지에 쌓인 작은 초콜릿 산을 보며 그녀가 기가 막 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가 안 되네. 애초에 날 사고 싶다면 그냥 구매해도 되지 않나? 노예에게 의지가 어디 있다고 이러는 거야?"
“초콜릿이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러니까.”
플뢰르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사이 바구니에서 튀어나온 키키가 감옥 안의 초콜릿에 관심이 가는지 냄새를 맡았다.
“안 돼, 키키. 키키 밥 아니야.”
“그 여우는 또 뭐고.”
“귀엽지? 내 친구야.”
“여우가 어떻게 친구냐.”
플뢰르의 비웃음에 왜 못하냐며 고개를 갸웃했다.
키키도 나를 따라서 고개를 갸웃하자 플뢰르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중얼거렸다.
“닮았네.”
“뭐라고?”
"아니야.”
“아니라니? 또 먹고 싶은 게 있어?”
내 물음에 플뢰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 음식으로 날 길들이기라도 하려는 거야?"
“이왕 만나는 거, 맛있는 것도 먹으면 좋지 않나?"
플뢰르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널 억지로 데려오고 싶지 않아서 그래.”
"어차피 난 노예여서 돈에 움직여. 전투 노예라고 다를 것 없어.”
나는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키키를 무릎에 올려놓고 부드럽게 털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하지만 널 억지로 내 옆에 둘생각은 없어. 네가 내 사람이 되었으면 하거든.”
플뢰르는 키키를 쓰다듬는 내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침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에 내가 가고 싶다고 하면 너는 내가 얼마가 되어도 살 생각인 거야?”
“응."
"어째서?"
“네가 맘에 드니까.”
단순한 이유에 그녀가 머리가 아프다며 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럼 질리면 버리게?”
"내가 그렇게 쓰레기로 보이니?"
내 말에 플뢰르가 초콜릿을 보더니 곧바로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오늘 콜로세움 룰에 대해서 들었어. 원래는 패자를 무조건 죽음까지 몰고 가는 살인 경기나 다름없다면서.”
갑작스러운 내 말에 플뢰르의 두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네 경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피가 튀기는 살벌한 경기였던 것 같아.”
조용한 내 목소리가 플뢰르가 갇힌 철창에 울렸다.
플뢰르는 내 의도를 읽고 싶은지.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단순히 피가 튀면 기분 나빠서가 아니지?”
“무슨 소리야.”
“칼등으로 싸우는 이유 말이야."
플뢰르는 말이 없었다.
나는 키키를 쓰다듬던 손을 들어 철창 안에 있는 플뢰르의 손에 얹었다.
"너는 기사 출신이라고 들었어.
그래서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싫은 거지? 기사는 자신의 주군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드는 거니까 "
플뢰르가 눈을 날카롭게 뜨며 내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게 나쁜가? 고상한 기사의 쓸데없는 아집이라고 비웃기라도 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몰락 귀족주제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비아냥거리고 싶은 거야?"
실제로 그런 말을 들어 왔는지 그녀의 말은 조금 전 여유로운 말투와 다르게 거셌다.
“플뢰르.”
"......."
“난 이유 없는 싸움을 시키지도 않을 거고,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라고 하지도 않을 거야."
단호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내 말에 꽉 쥐고 있는 그녀의 주먹이 달달 떨리는 것이 보였다.
“결투나 살인을 아예 안 시킨다.
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약속할 수 있어.”
“…뭐를?”
꽉 쥐고 있는 주먹처럼 플뢰르의 목소리도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떨리는 주먹 위에 내 손을 얹고서는 말했다.
"너는 그 어떤 결투도 살인도 모두 다 나를 위해서 하게 될 거야.
오롯이 나를 위해서.”
플뢰르의 붉은 눈에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너는 기사로서 주군인 나를 지키기 위해서 검을 드는 거야. 그러니까 죄책감도 가질 필요 없어.”
"나, 나는….”
플뢰르가 올라오는 눈물을 참으며 말을 더듬었다.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나는 네가 훌륭한 기사라고 생각해. 실력도, 마음가짐도 모두.”
"난 누군가를 지킬 자격이 없어.
왕국도, 가족도 지키지 못했으니까."
플뢰르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자격을 내가 줄게. 그러니 내 호위가 되어 줄래?"
"........”
플뢰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긍정의 말도 부정의 말도 쉽게 못 뱉을 것이란 것 잘 알고 있다.
그녀도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그런데 에이스에 집착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도무지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아 결국 대화로 설득해 보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조금 마음에 걸리는데.'
홀로 고민을 하다 플뢰르의 울음섞인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조,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이러한 반응 정도는 예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게.”
내가 쉽게 물러나리라 생각 못했는지 플뢰르는 뻣뻣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일주일 뒤에 콜로세움의 주인이 돌아온다고 들었어. 그전까지면 충분할까?”
플뢰르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찾아오면 분명 긍정적인 답이 돌아올 것 같았다.
그럼 나는 콜로세움의 주인이 돌아올 때 합당한 금액을 치르고 플뢰르를 내 호위로 들이면 된다.
요 며칠 잔인한 콜로세움 경기를 관람하느라 밤잠을 제대로 못 잤지만, 수확이 있으니 되었다.
“그래. 그럼 다음에 봐.”
나는 키키를 바구니 속에 다시 넣어 주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콜로세움을 나섰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어제 보았던 그 가면을 쓴 사내와 딱 마주쳤다.
나는 어제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무시하며 지나치려 했다.
그때 갑자기 바구니 속에 얌전히 있던 키키가 튀어 올랐다.
“키키!”
깜짝 놀라서 키키를 붙잡으려고 했는데 키키가 빠르게 사내의 품에 뛰어들었다.
“…여우?”
사내의 목소리에 키키는 기분이 좋다는 듯 꼬리를 세차게 흔들고는 계속 울기 시작했다.
“키키. 모르는 사람에게 그러면 안 돼.”
아마 깜짝 놀랐을 테니 사내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서는 키키를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키키가 사내에게서 떨어지기 싫다는 듯 품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키키!”
평소에는 사람들에게 낯을 가리 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키키를 데려오려 했다.
내가 난감해하는 모습에 사내도 키키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낑낑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 곧바로 힘을 풀었다.
"......."
우리는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듯 잠시 그 상태로 굳었다.
정적을 깬 것은 수상한 사내였다.
“아무래도 여우가 쉽게 떨어질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키키.”
사내의 말에 다시 키키를 불러보았지만 키키는 힐끗 나를 돌아보더니 다시 사내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너 정말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서운한 마음에 울상을 짓는데 사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데려다주지. 집 앞까지 가면 떨어질지도 모르니.”
수상한 사람이지만 키키가 내게 돌아오려 하지 않으니 사내가 꺼낸 제안 외에 방법이 없었다.
“관광객이라 호텔에서 머무르고 있어요. 정말 미안합…."
“그럼 호텔로 가면 되겠군.”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내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라도 키키를 잃어버릴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내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사내의 큰 보폭을 따라잡느라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사내가 뒤를 힐끗 보더니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나는 재빠르게 사내의 옆으로 다가갔고 그렇게 그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무례한 상황인지라 어떤 말도 쉽게 못 꺼내고 있는데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무례한 일이잖아요. 정말 미안해요.”
“괜찮아.”
그 후로 다시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호텔 근처에 다다랐고, 나는 다시.
키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키키. 이제 집 가야지.”
집이라는 말에 키키가 아쉬운 듯 사내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또 키키가 튀어 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꼭 끌어안았다.
“이번 일은 꼭 보상할게요."
내 말에 사내가 탐탁지 않은 목소리를 내었다.
"어떻게?"
"으음….”
무엇이 좋을지 고민하는데 지나가는 상단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직원이 놀란 눈으로 사내를 보더니 다급히 다가오려 했다.
확실히 수상해 보이지.
이해는 갔으나 나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내는 나와 직원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혹시 상단의 직원인가?"
“비슷해요.”
그 물음에 사내가 망설임 하나 없이 제안을 꺼냈다.
“그래? 그럼 보상으로 상단주에게 날 호위로 추천해 줄 수 있나?”
“…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는 그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왜지?”
“가면을 쓰고 있는 수상한 사람을 어떻게 믿고 추천해요."
"아. 가면….”
갑작스러운 지적에 사내가 머뭇거리며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가면을 벗지 못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망설이는 것에 나는 다른 제안을 했다.
“다른 것으로 보상할게요. 다른걸 얘기해 보세요.”
내 말에 사내가 머뭇거리던 손을 멈췄다.
"…그럼 얼굴을 보이면 괜찮은가?"
그러고는 천천히 가면을 벗어 내렸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긴 하늘색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리기 시작했다.
기껏 가면을 벗었더니 이제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바람이사그라지면서 머리카락도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고,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