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닮았다.'
사내는 만약에 라그나르가 죽지 않았다면 이렇게 자라지 않았을까 싶은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리운 사람이 떠오르는 사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알고 있다.
이 사람은 라그나르가 아니다.
이목구비가 조금 닮았을 뿐, 눈에 띄는 특징들이 이렇게 다른데 같은 사람이지는 않겠지.
'무엇보다 라라는 죽었을 테니까.'
사라진 용의 감옥과 그 근처에 흩뿌려진 피가 라그나르가 죽었다.
는 것을 확신시켜 주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어둠을 담아 놓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아닌 환하고 밝은 하늘색 머리카락을 보다가 시선을 올려 눈을 마주쳤다.
'푸른색.’
머리보다 조금 진한 푸른색 눈을 마주치는 순간 다시 확신했다.
라그나르 특유의 동공도 아니었고, 아름다운 보랏빛도 아니었다.
'나도 참. 뭘 기대하는 걸까.'
닮은 사람이 왔다고 라그나르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닐 텐데.
"이름, 이름이 뭐예요?"
그런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사내의 이름을 묻고 있었다.
"나스."
“…나스.”
속으로 이름을 몇 번 곱씹어 보았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나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이는?"
“열일곱."
"그렇구나.”
라그나르가 아닌 것을 알고 있는데 왜….
나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조용해지자 나스가 입을 열었다.
“난 자유 용병이고, 실력도 나쁘지 않아.”
“경기를 봐서 알아요. …상단의 호위가 되려는 이유가 뭔데요?"
"소속이 없는 용병은 오스왈드입국이 어렵거든."
'맞아. 내전 때문에 그렇지….’
나스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러지? 혹시 어디 아픈가?”
내가 계속해서 말이 없어지자 나 스가 고개를 숙여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괜찮아요.”
무슨 말을 꺼내야 이 대화를 깔끔하게 끝낼 수 있을까.
어떤 말을 하든 감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할 것 같아 대화를 이어 갈 자신이 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고작 닮은 사람의 등장에 힘들게 묻어 두었던 마음이 이렇게 쉽게 흔들리다니.
“하….”
나는 조용히 나스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역시 어려운 건가.”
사내의 안타까운 목소리에 다시 대화를 이어 가려는 찰나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다프네?”
엄마의 목소리였다.
나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
“이 사람은 누구니?"
엄마가 가까이 다가와 나스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겠지.
"조금 전에 알게 된 사람이에요.
자유 용병인데 저를 데려다줬어요.”
내가 다급하게 하는 말에 엄마는 놀라지도 않고 웃으며 말했다.
"저런. 고마운 일을 해 주셨군요.”
"아닙니다.”
나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한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나스는 인사를 하고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나갔다.
더는 부탁하지도 않고 미련 없이 떠나는 모습에 괜스레 섭섭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섭섭? 미쳤구나, 다프네.'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라그나르를 닮았더구나.”
엄마의 입에서 오래간만에 듣는 이름이 나왔다.
나는 젓던 고개를 멈추고서 멍한 눈빛으로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네. …혹시 라그나르는 아니겠죠?”
“그렇지.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올 수는 없을 테니까."
엄마의 말에 다시 확인당한 기분이었다.
당연한 말인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걸까?
실망이 차오르는 것을 곱게 접어 마음에 넣어 두고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활짝 웃었다.
“오늘은 같이 저녁 먹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럼. 얼추 일이 끝나서 말이야.
그보다 위험하니까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조금 주의해야겠는걸.”
엄마는 나스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혹시나 위험에 처하면 엄마에게 말해 줘야 한다?”
엄마는 귀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연락하면 일이고 뭐고 당장 뛰어올 것이 보여서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 * *
엄마의 조언도 있었고, 플뢰르가 고민할 시간도 필요할 테니 며칠 동안은 콜로세움 근처가 아닌 저 크시즈 광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혼자 돌아다니니까 눈에 띄기는 하네.”
나는 저크시즈의 광장에 있는 작은 카페에 앉아서 딸기 주스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시 자체에 어린아이가 많지 않아서 그런가?
'나스도 내가 신기해서 말을 걸었던 걸까?'
그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그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뺨을 가볍게 내리치고는 딸기 주스를 단번에 들이켰다.
'최대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돌아다녀야지.'
익숙하지도 않은 거리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바구니 안에 들어가 있던 키키가 고개를 빼꼼내밀었다.
“우리 키키도 간식 먹을 시간이 네.”
나는 챙겨 온 간식을 키키에게 먹여 주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제 정말 너무한 거 알지?”
키잉-
"다음에는 그러면 안 돼?”
키키-
키키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즐거운 울음을 내며 내 뺨에 코를 비볐다.
“키키. 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바구니 채로 키키를 끌어안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카페 밖에 서 있는 나스와 눈이 마주쳤다.
"......."
눈이 마주치자마자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도시가 좁네.'
나는 깜짝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힐끔 고개를 돌렸다.
나스는 사람을 구경이라도 하는지 넓은 광장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답례를 못 해서 그런 거야.”
분명히 계속 생각나는 이유는 어제의 일 때문이다.
절대로 저 얼굴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음료를 하나 사 들고 밖으로 나가 그에게 건넸다.
“이거 어제 말한 보상이에요.”
나스는 무표정으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괜찮다고 했던 것 같은데.”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내 반말에 나스가 오른쪽 눈썹을 까딱하고 올렸다.
“빚 갚았으니까 말 편하게 하려고."
“그래.”
나스는 이내 피식 미소를 짓더니 음료를 받았다.
그러고는 한입 마셔 보더니 흠칫 놀랐다.
“…달아. 좋아하는 음료인가?”
아뿔싸. 나도 모르게 초콜릿 라떼를 사 버렸다.
“맛없으면 다른 음료로 사다 줄게.”
"아냐. 괜찮아. 맛있네."
그 말과 함께 나스가 다시 음료를 들이켰다.
단 걸 좋아하는 걸까?
“그보다 오늘은 여우가 얌전하군.”
"어제가 이상했던 거야."
“하나 조언을 해 주자면.”
나스는 광장에서 몸을 돌린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는 보호자와 같이 다니는 게 좋겠어.”
그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여기는 어린아이와 작은 애완동물이 마음 놓고 돌아다닐 만한 도시가 아니야.”
"위험하다고…?”
"그래. 그대 같은 여린 아이는 더더욱.”
“그대가 아니야.”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내 이름은 다프네야."
어제 일에 대해 사과했고, 나름의 합당한 보상도 했다.
상대방도 괜찮다고 했으니 모르는 척 돌아가는 것이 맞을 텐데.
내 입은 마음과 다르게 제멋대로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래, 다프네.”
건조한 목소리에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조언 고마워. 그럼 이만."
나는 키키가 있는 바구니를 꼭 끌어안은 채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라그나르라면 날 저렇게 부르지 않을 거야. 저렇게 메마르지 않았잖아. 라그나르가 아니라고!'
속으로 끊임없이 되새기면서 얼마나 걸었을까.
호텔로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희미한 주홍빛이 시야에 잡혔다.
“키키를 닮았네.”
길가에 있는 인형 가게에 전시된 작은 인형.
주홍빛 여우 인형이 눈에 띄어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키키 이 인형 어때? 이런. 잠들어 있었구나."
어쩐지 어제와 다르게 조용하다 싶더라니.
'잠든 지도 몰랐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인형 가게 유리에 머리를 콩 하고 부딪혔다.
'정신 차려, 다프네. 그냥 닮은 사람이야. 라라가 아니라고.'
그럼에도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유리창에 머리를 계속 콩콩하고 박았다.
그렇게 머리를 박는데 이마에 차가운 유리가 아닌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나스?”
"데려다주지."
“뭐? 됐어. 호의는 어제로 충분하니까.”
"내가 자꾸 신경이 쓰여서 그래."
그 말과 함께 나스가 내 옆에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서 움직이라는 듯한 시선에 나는 울컥 올라오는 마음을 다잡으며 힘겹게 물었다.
"왜, 왜 신경이 쓰이는데?”
묻고 나니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정말 나스가 라그나르가 아닌 걸까?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는 없잖아.'
자꾸 헛된 기대가 차올랐다.
제발 나스가 라그나르이고, 사실은 살아 있었기를 바라며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예상외의 말이었다.
"네 소문을 들었으니까.”
“…소문?”
헛된 희망이 부서지면서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콜로세움 내에 플뢰르를 데려가고 싶어 하는 어린 여자애가 자꾸 드나든다는 소문이 직원들 사이에 퍼져 있어.”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서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이상한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아저씨는 아까 카페에 있던 사람 같은데.'
내가 눈치챘다는 것을 알았는지 나스가 내 손을 잡고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 움직이자 수상한 남자가 재빠르게 사라졌다.
신경이 쓰인다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구나.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느라 주변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나스는 걸어가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플뢰르는 아마 계속 거절할 거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거짓 하나 없는 진지한 목소리에 결국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아냐고 묻잖아.”
“플뢰르는 콜로세움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고 떠드는 걸 들었어.”
“그게 뭔데?”
내 물음에 나스는 거기까지는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호텔 앞에 도착했다.
나스는 지난번과 같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나는 떠나려는 그를 불러 세우고는 말했다.
“나스, 데려다줘서 고마워."
"고마우면 앞으로 혼자 다니지 마. 신경 쓰이니까."
“그래.”
나와 나스는 잠시 눈을 마주치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나스의 조언 덕분에 굳어 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멍청하게 구는 건 여기까지야, 다프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쉽게만 생각했던 모양이다.
'새로운 계획이 필요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