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고맙지만 역시 난 이곳에 남아야 할 것 같아.”
기껏 마카롱도 사 들고 왔는데 돌아온 대답은 또다시 확실한 거절이었다.
놀랍지는 않았다.
'어제 나스에게 듣고 어느 정도 예상했지.'
나는 서글픈 웃음을 삼키고는 마카롱이 든 상자를 내밀었다.
“일단 이거 먹어. 너 먹으라고 사 온 거니까.”
"마카롱?”
플뢰르가 황당한 눈으로 마카롱상자를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너는 진짜 이상한 애야.”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적어도 이유는 듣고 싶거든."
내 말에 플뢰르가 흠칫 시선을 피했다.
“말하기 싫은가 보네. 됐어. 나도 억지로 캐물을 생각은 없어.”
플뢰르는 마카롱 상자를 들고서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평범한 설득은 실패네..'
가만히 서서 플뢰르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더는 그만 찾아와! 쉬는 시간도 모자라 죽겠는데 너 같은 꼬마가 자꾸 찾아와서 얼마나 귀찮은지 몰라!”
플뢰르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외쳤다.
“매번 이렇게 쓸데없는 걸 사 오고! 누가 좋다고 먹을 줄 알아?”
그녀가 마카롱 상자를 집어던졌다.
구석에 박힌 마카롱 상자는 부딪힌 충격에 구겨져 버렸다.
안에 있는 마카롱도 파스스 깨졌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싫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데려갈 수 있을까.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찾아올게. 그래도 여전히 이곳에 남고 싶다면 그때는 내가 포기할게.”
지금까지와 다른 깔끔한 답에 플뢰르가 놀란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플뢰르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게 부서진 듯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구석으로 날아간 마카롱처럼 말이다.
슬픔과 충격이 가득한 플뢰르의 표정에도 나는 애써 빙긋 웃었다.
“내일이 마지막 만남이 아니면 좋겠다.”
나는 아쉬움을 담아 손을 흔들고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달갑지 않은 방법이기는 하나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레녹스랑 리카르다가 도와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끈질기게 뒤따라오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으며 콜로세움을 벗어났다.
부디 저자가 내 말을 잘 들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 * *
"콜록, 플뢰르, 오늘은 그 여자애안 오는 거야?”
누군가의 질문에 플뢰르가 감은 눈을 떴다.
기침이 섞인 물음에 플뢰르는 망설이다가 답을 해 주었다.
“안 올 거야.”
“따라가라니까.”
“싫어.”
단호한 대답에 갈색 머리의 사내, 크세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플뢰르는 품에 작은 상자를 꼭 끌어안은 채 우울한 기색을 내보이고 있었다.
크세스는 그런 플뢰르의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혹시 나 때문이야?"
"크세스 때문이기는, 그냥 누군가에게 팔려 가기 싫은 거야."
"나 때문이구나. 콜록, 콜록."
기침이 거세지자 플뢰르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상자를 내려놓고 크세스에게로 다가갔다.
크세스는 고통스러운 기침을 내뱉으면서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웃었다.
“어차피 난 오래 살지도 못해.
그러니까 난 신경 쓰지 말고 떠나. 그 아이 나쁜 애 같지는 않았어.”
“웃기는 소리하지 마.”
플뢰르는 크세스의 말에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듣기도 싫다는 듯 빠르게 젓는 고개에 크세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네가 처음 온 날이 기억난다.
검을 휘두를 줄 안다는 이유로 전투 노예로 팔려 온 귀족 아가씨인 널 많은 이들이 비웃었지.”
"언제 적 이야기야.”
“하지만 나는 보자마자 네가 훌륭한 기사라는 걸 알 수 있었어.
그리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도 아직 늦지 않았어.”
크세스가 플뢰르의 손을 잡고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어린 네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크세스가 날 단련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야.”
플뢰르가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크세스는 아프잖아. 아픈 몸으로 결투에 나가는 것보단 내가 나가는 게 나아.”
슬픈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실한 의지에 크세스는 무어라 말을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말할 자격이나 있을까.
크세스는 콜로세움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튼튼했던 몸에 점차 병이 자라기 시작했다.
결국 경기마저 나가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으니 자신은 진작에 죽었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플뢰르는 크세스가 경기에 나서지 않는 대신 자기가 매일 경기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자신의 작은 호의로 생겨난 관계였으나, 지금은 그로 인해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콜로세움의 주인은 돈이 된다면 뭐든 가리지 않는 변덕스러운 사내다 보니 언제 말을 바꿀지 모른다.
그러니 그 전에 플뢰르를 이곳에서 내보내는 것이 맞을 텐데.
“그러니까 죽는다는 소리 하지 마. 이제 이 세상에 내 편은 크세스밖에 없잖아.”
“그래. 내 세상에도 내 편은 너 밖에 없지.”
크세스의 말에 플뢰르가 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았다.
숙인 고개 아래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을 보자니 입이 참 썼다.
그리고 그때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둘 다 잘 있나?"
콜로세움의 주인, 에밀이 자신의 건치를 내보이며 활짝 웃었다.
“오래간만이지, 크세스? 플뢰르도 얼굴빛 좋네.”
"......."
플뢰르가 마치 못 볼 사람을 봤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 매정한 반응에도 에밀은 뭐가 좋은지 낄낄 웃으며 자신의 본론을 꺼내었다.
“크세스가 경기를 쉰 지 꽤 됐지? 슬슬 참가할 때가 되지 않았나?”
".....!"
에밀의 말에 크세스가 거친 기침을 토해 냈고, 플뢰르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에밀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내가 나가면 크세스는 출전하지 않기로 했잖아!”
“그거야 네가 완전히 에이스일때 이야기고, 지난번에 이상한 가면 쓴 놈이랑 무승부였다며?"
“그건….”
플뢰르의 목소리가 자신감을 잃고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에밀은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며 얄밉게 말했다.
“계속 그러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없잖아?”
“다음에는 이겨!”
“말은 잘하네. 사람도 제대로 죽이지 못하는 애송이가. 너 때문에 경기가 재미없다는 항의가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 알아?"
크세스가 거친 기침을 토해 내며 말했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뭔가? 본론을 말해."
“그래. 내 본론 말이지."
에밀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면서 두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 있을 경기에 두 사람 다 출전해 줘야겠어.”
“어떤 경기는 내가 크세스의 몫까지 나갈 테니까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둬!”
"아니. 너만 나갈 수는 없지.”
에밀이 낄낄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왜냐면 크세스가 참가해야 할 경기가 너와 겨룰 경기거든.”
에밀의 즐거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두 사람에게는 비극적인 종말을 알리는 종소리 같았다.
"뭐?"
플뢰르는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느낌에 황급히 철창을 잡고서는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랑 크세스가 하는 경기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들끓는 항의를 잠재우기 위한 서비스지. 참고로 누구 하나 죽지 않는 이상 경기는 안 끝난다?"
에밀은 그 말을 남기고는 다른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미련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크세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플뢰르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그 경기에서는 내가 지면 돼.”
“지면 죽는다잖아!”
"나는 오래 살았어."
떨림 하나 없는 그 목소리에 플뢰르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물을 흘렸다.
"그게 뭐야. 그게 뭐냐고!"
눈물이 가득한 플뢰르의 얼굴에 크세스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죄책감 느끼지 마라. 어차피 나는 아픈 사람이고, 너는 아직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아이잖아.”
그 배려심 넘치는 말에 플뢰르는 꼭꼭 눈물을 삼켰다.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크세스도 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만약에 어제 그 여자애에게 솔직하게 말했었더라면 달라졌을까…?
플뢰르는 엉망이 된 마카롱 상자를 끌어안은 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사정을 말했더라면 무언가 방도가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왜 포기하려고 했을까.'
사실 어제 했던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오랜만에 또래 여자아이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즐거웠다.
이곳에서 버티기 힘든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고 이해해 줘서 기뻤었다.
항상 손에 들고 오는 달달한 간식에 단단하게 굳은 마음도 흐물흐물 녹아내려, 함께 있는 그 순간이 짧지만 정말로 행복했다.
'나는 겁쟁이야. 크세스도 지키지 못하고, 나도 지키지 못했어.'
그 아이에게 사실대로 밝히면 거절당할 것 같아 두려웠다.
나갈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눈앞에서 부서지는 게 두려워 마음을 숨겼다.
그리고 그 아이의 정성마저 매몰차게 내던졌다.
구겨진 마카롱 상자는 마치 자신이 걷어찬 기회처럼 되돌릴 수 없어 보였다.
'한 번만 더 기회가 있다면….
제발 내게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흘러내린 눈물에 지독한 후회가 담겨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 아이가 평소에 오는 시간은 한참 지난 지 오래였다.
희망이 바스라져 이대로 모든 것이 끝이라 생각한 그 순간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발소리는 천천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더니 자신의 앞에서 멈추었다.
“왜 울고 있니?”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목소리에 플뢰르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밀려오는 감동에 어떤 말도 쉽게 내뱉을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제게 희망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