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79화 (78/185)

제79화.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콜로세움 쪽에서 잠시 보자고 해서 방문한 건데….”

나스는 나를 내려다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왜 여기 있는 건데?"

“…이러저러해서.”

두루뭉술한 대답에도 나스는 굳이 되묻지 않았다.

우리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직원은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었지.

'투명 마법인 것 같았는데. 마도구일까, 마법사일까?'

떠오르는 궁금증도 해결할 겸 말을 돌렸다.

"마법사였어?”

"마법도 조금 쓰고, 검도 조금 다룰 줄 알아.”

“조금이 아닌 것 같던데.”

내 말에 그가 부정하지 않고 살짝 웃었다.

생각보다 더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나 보다.

“칭찬 고마워.”

희미한 미소에는 뿌듯함이 담겨 있었는데 나는 마주치던 눈빛을 휙 피해 버렸다.

키키가 품에서 꼬물거리다 퐁 하고 고개를 꺼냈다.

“여우도 있네.”

키키가 나스를 보자 반가운 듯 축 처진 꼬리를 살랑살랑 움직였다.

“또 신세를 져 버렸네. 고마워."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이자 나스가 천천히 내 몸에서 손을 떼더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사르륵 넘기는 손길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뒷머리에 닿자마자 멈칫하고 멈추었다.

"어디 부딪혔나? 부은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손이 살짝 닿은 부분이 욱신거린다 싶더니 혹이라도 낫는지 부어올랐나 보다.

"괜찮아. 이제 놓아줄래?”

나스는 막지 않고 순순히 나를 놔주었다.

“사실 오늘 일부러 납치를 당했어. 그때 맞은 거야."

“일부러라고?”

“잠입 수사같이 말이야.”

변명이 아닌 사실을 말해 주는데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너무 조용한 것이 이상해 고개를 돌려 보니 나스가 희미한 미소조차 집어치우고는 싸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머리 쪽을 보면서 정색을 하고 있어 그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누가 때렸는지 아나?"

“…누가 때렸는지 알면 어쩌게?"

내 물음에 나스는 빙긋하고 웃었다.

분명히 입가는 웃고 있는데 눈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얼어 버릴 정도로 차가운 눈빛에 나는 한 걸음 물러서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나를 쫓던 직원은 보이지 않지만 계속 이곳에 있다가는 곧 들킬 것이 뻔했다.

“난 이제 경기장 입구로 가서 오빠들을 만날 거야. 도와줘서 고마웠어.”

“…데려다줄까?”

언제 그렇게 웃었냐는 듯 퍽 다정하게 묻는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혼자 찾아 나갈 수 있어.”

“위험할 텐데. 근처에 직원들이 많아. 도와줄게.”

"네가 피해를 볼 수도 있잖아."

내가 단호히 말하자 나스가 내 소맷자락을 잡았다.

“돕게 해 줘.”

"…왜?”

나스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네가 혼자서 뽈뽈 돌아다니는 게 계속 신경 쓰여”

"내가 햄스터니.”

무뚝뚝한 표정 사이로 나온 재밌는 표현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부탁 좀 할게. 경기장 근처까지만 같이 가 줄래?"

나야 나스의 도움을 받으면 좋을테니 더는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나스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내 옆으로 다가왔다.

꽉 쥔 소맷자락을 놓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냥 내버려 두고 함께 걷기 시작했다.

“…있지내가 왜 신경이 쓰여?"

“궁금한가?"

안 궁금할리가 없지 않은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꾸 호의를 베푸는데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없었다.

내 물음에 나스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말했다.

"궁금하면 아까 전 내 질문에 답해 줘. 누가 널 때렸지?"

날 때린 사람이 뭐가 중요하다고 이렇게 끈질기게 물어보는 걸까.

이런 의문이 들기는 하였지만 말해 주지 못할 것도 아니기에 입을 열었다.

“나도 몰라. 아마 지금쯤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걸."

“납치를 주도한 사람은?"

"여기 사장. 노예 경매에 올리는 게 목적이라고 하던데.”

"그렇군.”

궁금증이 해결된 듯 답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나스의 입가에는 비틀린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들어 보이는데 혹시 내가 이런 상황에 놓인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그래서 왜 내가 신경이 쓰이는데?"

“나도 잘 모르겠어."

“뭐?”

나스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냥 네가 곤란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것뿐이야.”

"아….”

그 말에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서 있는데 그의 재촉에 다시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색한 분위기 사이로 키키의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스는 나를 힐긋 바라보더니 말을 돌렸다.

"혼자서 탈출하고 있었던 건가?"

“아니. 플뢰르랑 크세스랑 함께 탈출하고 있었는데….”

나는 괴로움을 호소하며 쓰러진 두 사람을 떠올렸다.

둘 다 몸을 던져서 나를 막았는데 괜찮을 걸까.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설득에 성공했나 보군.”

나는 나스의 말에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시 잡혔는 걸. 무사히 데려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하는 짓들을 보아하니 가만히 둘것 같지는 않던데.

'오빠들을 빨리 만나야 할 텐데…. 그사이에 큰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혹시 죽는다면 나 때문에 죽는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표정이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나스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우뚝 자리에서 멈춰 섰다.

“생각해 봤는데 이대로 그냥 빠져나가면 재미없겠지?"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그가 씨익 웃었다.

"내가 사장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거든.”

지금까지 본 모습과 다르게 조금 악동 같은 표정이었다.

분명히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인 사람인데, 왜 저 눈빛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을까.

"사장실에서 감옥 문을 조절할 수 있던 것 같던데."

그 말을 듣자 나 또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콜로세움의 전투 노예들에게는 발에 족쇄가 묶여 있는 것 같았어. 그걸 해방하면 어떻게 될까?"

분명 에밀이 품에서 꺼낸 동그란 버튼이 조종할 수 있는 마도구일 것이다.

만약 그것이 마도구라면 내가 가진 물약으로 망가트릴 수 있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경기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춘 채 다시 뒤로 돌아섰다.

‘나스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을 준다 하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야겠어.'

이왕 이렇게 된 것 아주 크고 소란스러운 사건을 만들어서 정신을 쏙 빼 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를 납치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를 후회하게 해 줘야지.

그러니 역시 이대로 나갈 수는 없다.

“그런데 그쪽에 인기척이 많이 느껴지는군. 잠시 실례 좀 하지."

“좋아.”

내 허락이 떨어지자 나스가 나를 갑자기 휙 안아 들었다.

흔히 말하는 공주님 안기 자세가 되어서 놀라 눈을 크게 뜨자 그가 눈을 살짝 휘며 웃었다.

"마법을 쓰려면 최대한 많이 붙어 있는 게 좋아서."

그렇게 말하는데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고 나는 떨어지지 않게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나스는 곧 발을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우리가 걸어왔던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 와중에 뜀박질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제부터 쉿.”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는지 나스가 귓가에 작게 소곤거렸고, 나는 키키와 내 입을 동시에 막았다.

곧 몰려 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젠장. 그 꼬맹이 어디로 도망간거야!”

"출구는 모두 막아 놨으니 아직 빠져나가지 못했을 겁니다!"

“당장 잡아 오지 않고, 뭐 하는 거야! 걔가 무사히 빠져나가는 순간 큰일 난다는 것 몰라?”

에밀이 부하 직원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나를 찾느라 모두가 한 곳에 모인 듯싶었다.

그들은 굳은 얼굴로 주변을 뛰어다니기 시작했지만, 마법을 쓴 우리를 보지 못하고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덕분에 우리는 그들이 다른 곳에 정신 팔린 사이 무사히 사장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늘이 도운 것인지 사장실 문도 살짝 열려 있어 소리 없이 완벽히 난입하는 게 가능했다.

나스가 나를 내려 주더니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서 걸쇠로 걸어 잠갔다.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자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뱉을 수 있었다.

사장실은 생각보다 복잡했는데 책상 위에 마력을 머금어 반짝이는 여러 버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스가 희한하게 생긴 버튼들을 보며 감탄했다.

"다 마도구야.”

그의 중얼거림을 들으면서 가방을 뒤적여 마력 무효화 물약을 찾아내었다.

"이걸 다 망가트리면 어떻게 될까?”

"콜로세움이 난리가 나겠지. 마도구로 이곳을 통제하고 있으니까.”

“그래?"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안에 누구야! 당장 나오지 못해!"

한참 답이 없자 이상함을 느낀 에밀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에 나는 망설임 없이 책상 위에 놓인 버튼들에 물약을 아낌없이 끼얹었다.

버튼은 미약한 빛을 깜빡깜빡 비추더니 이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잠시 후 콰직 소리를 내면서 문이 부서졌고, 곧 씩씩거리는 에밀과 그의 부하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 갔나 했다. 이 쥐새끼 같은 꼬마야.”

에밀의 목소리에 나스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다 끝났어?”

“아니. 저 사람 품에 마도구가 하나 더 있었어.”

“그래?"

나스가 굳은 표정으로 검을 획뽑아 들었다.

"건방진 놈. 갈 곳 없는 놈 고용 시켜 주려 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해?”

에밀이 씩씩 화를 내면서 당장 공격하라고 명을 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스에게 닿기도 전에 그가 그들을 가볍게 쓰러트리는 게 더 빨랐다.

그리고 에밀에게 달려들더니 갑자기 그의 얼굴에 냅다 주먹을 내리꽂았다.

"크헉!”

에밀이 괴로운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붙잡았고, 나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배를 걷어차자 그가 괴로움을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곧 그의 품에서 아까 보았던 버튼이 떨어졌고, 나스가 그것을 주워 들었다.

“크흑. 네놈들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마탑에서 직접 사들인 물건이다. 아무리 수를 써도 망가트리지 못할 거야!"

에밀이 나스의 발밑에 깔린 채 분한 목소리를 내었고, 소란을 느꼈는지 이쪽으로 많은 이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네놈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내 많은 부하를 모두 이기지는 못하겠지! 둘 다 아주 지옥을 겪게 해줄 테다!”

에밀이 외치자마자 뚫린 문 너머로 보이는 복도에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보였다.

“너희는 독 안에 든 쥐다!"

에밀이 교활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외치는데 갑자기 나스가 쥐고 있던 버튼도 버리고 뛰어오더니 나를 망토 안으로 감쌌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가 있는 곳 천장이 큰소리를 내면서 폭발했다.

나스 덕분에 다치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와중에 정신을 차린 에밀이 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뭐, 뭐야. 너희는 누구야!"

그리고 당황한 적들의 소음과 뿌연 먼지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다프네 오빠들이다.”

“우리 동생 어디다 숨겼어. 이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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