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나스가 살짝 손을 치워 주자 고개를 빼꼼 내밀 수 있었다.
주위를 가득 찬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았고 시야가 밝아지면서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깜깜한 밤하늘과 밝은 달빛 아래 레녹스와 리카르다는 무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미친놈들 뭐야!”
“미친! 콜로세움 바닥을 뚫어 버렸잖아!”
저들의 말처럼 콜로세움 경기장을 이루고 있던 거대한 돌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파편에 깔려 허우적거리고 있는 놈들을 뒤로한 채 레녹스가 시선을 움직이더니 나스의 망토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나는 망토에서 손을 빼어 가볍게 손을 흔들었고, 레녹스가 한쪽 눈썹을 까닥하고 올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놈은 누구야?"
싸늘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움직여 나스를 바라보았다.
"나를 도와준 사람인데.….”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두 사람은 나스에 대해서 들은 것이 없을 텐데.
내가 눈을 도르륵 굴리면서 답을 미루자 레녹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상황 정리하고서 이야기하자.”
차가운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 끄덕였다.
'왜 화가 난 것 같지?'
키키가 큰 소리에 놀란 듯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품에 파고들었다.
"괜찮아, 키키.”
"여우가 많이 놀랐나 보군."
나스가 손을 올려 키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키키는 커다란 손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자 움찔하더니 고개를 들어 올려 나스와 눈이 마주쳤다.
끼잉 하고 우는 울음소리에 어르듯 흔들어 주는데 리카르다가 짜증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거기서 좀 빠져나오는 게 어때?"
“아.”
내가 아직도 나스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나스는 벗어나려는 내 팔을 잡더니 그대로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안 돼. 다칠 수도 있어."
나스의 차분한 목소리에 리카르다가 이를 갈며 말했다.
"내 동생에게서 떨어져."
나스는 아예 고개를 돌려 리카르다의 말을 무시했다.
“혹시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맞은 곳이 아프지는 않고?"
“응. 난 괜찮아.”
무시한 채 우리끼리 하는 대화에 화가 났는지 리카르다가 울컥하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레녹스가 황급히 그 손을 잡았다.
“일단. 여기 상황 정리하고서야.”
“짜증 나.”
레녹스의 만류에 리카르다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너희는 누구냐! 네놈들이 이렇게 콜로세움을 뒤엎어 놓고서 멀쩡히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에밀이 직원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일어났으나 이미 엉망이 된 이곳을 보며 왈칵 화를 터트렸다.
"내 동생을 납치하려고 했으면 이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
“고작 그것 가지고!”
“고작?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네.”
리카르다가 짜증을 삼키고서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이건 또 뭐야?"
부서진 건물 더미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위로 떠올랐다.
"마탑에서 파는 것 같은데.”
“그래! 마탑에서 구매한 마법 족쇄다! 플뢰르를 사가고 싶다고?
어림도 없지! 절대로 풀어 주지 않을 거라고!"
에밀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은 들리지도 않는지 리카르다가 가볍게 손을 튕겼다.
그와 함께 그 버튼은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족쇄 다 사라졌는데 어쩔래?”
“뭐, 뭐? 뭐야? 어떻게 한 거야.
보통 마법으로는 어림도 없는 거라고 했는데….”
“장난하나?”
리카르다가 불쾌한 표정으로 손을 다시 튕겼다.
무너진 잔해들이 하늘 위로 떠오르더니 에밀을 향해 날아갔다.
“으아악!”
에밀이 눈을 질끈 감았고,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얼굴을 제외하고 잔해 속에 갇힌 상태가 되었다.
“차기 마탑주가 될 내가 이런 것 하나 소멸시키지 못하면 창피한 거지.”
“차, 차기 마탑주?”
에밀의 당황스러운 목소리 뒤로 다시 한번 커다랗게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다른 곳에 설치한 폭탄이 터졌나 보네.”
그 커다란 소음에 레녹스가 별감흥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포, 폭탄?"
“요새 연금탑에서 주력하고 있는 물건인데. 덕분에 실험 좀 했네.”
“여, 연금탑?”
에밀은 사색이 된 얼굴로 설마하는 표정을 지었다.
“차기 마탑주 형이 차기 연금탑 주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레녹스는 굳이 답지 않고서 자기 이야기만 했다.
“입구에 설치해 놓았는데…. 이러다 노예들이 다 탈출하겠어.”
“다른 마도구도 망가진 것 같으니 탈출은 금방이겠지.”
리카르다가 확신까지 시켜 주자 에밀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다 곧 표독스럽게 외쳤다.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사유재산을 건드리다니! 경비대에 당장 신고하겠어.”
“이미 신고는 들어갔어. 감히 베네디토 상단의 후계자를 납치해 노예 매매에 내보내려 해?"
“뭐, 뭐?”
리카르다의 말에 에밀은 이제야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한 듯했다.
"네가 얼마나 더러운 짓을 하는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다 프네가 껴 있는 이상 그냥 묻고 지나갈 수는 없지."
“아, 안 돼. 나, 나는 저 꼬마가 그냥 평범한 아이인 줄 알았단 말이야! 고의가 아니었어! 억울하다고!”
“경비대가 와도 그렇게 변명 열심히 해 봐. 조사하면 다 털리고 끝이겠지만.”
리카르다가 어깨를 으쓱이고서는 어정쩡하게 남아 있는 에밀의 부하를 노려보며 말했다.
“다프네를 때린 놈이 누구야.”
부하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얼추 상황이 정리되자 나는 익숙한 사내가 숨어드는 것을 보며 그쪽을 가리켰다.
“저 사람이야. 나 머리에 혹도 난 것 같아. 아파."
내 칭얼거림에 리카르다가 와그작 인상을 찌푸리더니 곧 그놈에게 다가갔다.
다른 부하들은 눈치를 챙기고서 자연스럽게 피해 주었는데 두 사람이 다가가기도 전에 무언가가 날아가 그놈의 머리에 부딪혔다.
“돌?”
얼마나 세게 던졌는지 그 한방에 사내가 풀썩 쓰러져 버렸다.
그와 함께 이 공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스?”
나스가 빠르게 나를 내려 주더니 주변에 있는 돌을 던져서 정확하게 머리에 맞춰 버린 것이다.
기절해 버린 놈을 보면서 두 사람이 이를 갈자 나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 * *
모두가 탈출한 텅 빈 감옥 사이로 플뢰르와 크세스는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온몸에 가득 찬 상처에 급하게 데리고 가치료를 했지만, 하루가 지나도 두 사람은 눈을 뜨지 않았다.
다행히도 기절하듯 잠든 것이라는 의사에 말에 안심하고 기다리기로 했지만.
'어서 눈을 떠 주었으면 좋겠다.'
나를 위해서 앞서서 그들을 막아준 모습에 감동 받아 미안하고 맙다는 말을 빨리 해 주고 싶었다.
'콜로세움에서 벗어났다는 것도 어서 알려 주고 싶은데.’
콜로세움의 노예들은 자유를 찾아 도망을 갔고, 에밀은 들이닥친 경비대로 인해서 숨겨진 비리와 불법 노예 매매 등 여러 건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체포를 당했다고 한다.
그럼 콜로세움은 어떻게 되었냐는 물음에도 엄마는 그저 빙긋 웃으며 답을 하지 않았다.
키키와 함께 산책하면서 들은 바로는 경비대에서도 벼르고 있었는지 아주 탈탈 털어서 조사했다는 것 같다는데.
잘하면 콜로세움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음, 모든 게 잘 해결된 것 같다.
나는 플뢰르의 침대 옆에 꽃을 꽂고는 침대 구석에 몸을 말고 있는 키키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꼬리가 살랑이는 것이 나처럼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얌전히 키키를 쓰다듬으며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으음.”
플뢰르가 눈을 찡그리며 몸을 뒤 척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플뢰르는 곧 눈을 떴고 화들짝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욱신거리는 배를 움켜쥐었다.
“갑자기 움직이지 마. 많이 다쳤다더라.”
“다프네?"
내 목소리가 들리자 플뢰르가 시선을 돌렸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란 듯 크게 떠진 눈이 인상 깊었다.
“왜 그렇게 놀라?"
“…여기는 어디야?"
병원이지."
“크세스는?"
“옆 병실에 있어."
내 대답에 플뢰르는 머리를 부여 잡더니 곧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구해 주러 올지 몰랐어. 그냥 그대로 빠져나갈 줄 알았는데."
"너와 크세스를 모른 척 두고 가라고? 말했잖아. 두 사람 다 내가 데려가겠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며 불쾌한 기색을 비치니 그녀가 울먹이면서도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넌 진짜 이상한 애야.”
플뢰르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 주변을 두리번 둘러보더니 한쪽에 놓여 있는 자신의 검을 발견했다.
“자주 쓰는 무기라고 해서 들고 왔어.”
"그렇구나.”
그 후로 이어지는 말이 없어 이번에는 내가 물어보았다.
“콜로세움이 어떻게 됐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망했겠지. 갑자기 감옥 문이 열리더니 족쇄도 사라지고, 다른 녀석들 모두 도망치던데."
플뢰르와 크세스는 얻어맞은 채 묶여 있어서 도망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두가 도망치고 서늘한 감옥에 두 사람만 가만히 누워 있었을 것을 떠올리니 다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나를 도와준 것 후회 안 해? 내가 그대로 도망가서 데리러 오지 못했을 수도 있는데."
“후회 안 해.”
“왜?”
플뢰르는 아프지도 않은지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말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검을 들었으니까.”
플뢰르가 자신의 검을 만지작거리며 내게 물었다.
“다프네, 성은 뭐야?"
“베네디토.”
내 대답이 나오자마자 플뢰르가 내게 검을 내밀었다.
그녀가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지금껏 내가 본 것 중 제일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저 플뢰르는 이제부터 저의 모든 것을 바쳐 다프네 베네디토를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플뢰르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향해 기사의 맹세를 하기 시작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의 주인을 위하여 검을 휘두를 것입니다. 당신만을 위한 기사가 되겠습니다.”
스스럼없는 미소에 나는 받은 검을 쥔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플뢰르는 눈은 눈물에 짓물러 붉어져 있었지만, 그 어떤 때보다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기사 맹세를 받게 될 줄은 몰랐네. 난 귀족도 아닌데.”
조금 어색했지만, 플뢰르의 방식으로 내게 마음을 표현했단 걸 알기에 나 또한 기쁘게 받아들였다.
나는 검을 플뢰르의 어깨에 가볍게 얹었다.
"그대를 나의 기사로 허한다.”
“평생을 따르겠습니다."
어두운 기색을 품고 있던 그녀는 사라졌고, 강렬한 빛을 품고서 나만을 위한 기사가 될 것을 맹세했다.
예상치 못한 사고를 겪었지만 이로써 플뢰르는 나만의 기사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맹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나를 지킬 것이며, 나 또한 주군으로서 그녀를 존중할 것이다.
기사의 맹세란 그런 것이니까.
나는 플뢰르를 향해 진심을 담아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해냈다는 성취감.
완전히 나의 사람이 된 플뢰르는 분명 내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그 고생을 한 보람이 있는 인재였다.
모든 것이 끝났고 이제 오스왈드로 넘어가면 될 텐데.
자꾸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나스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