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지옥 같았던 콜로세움에서 탈출한 후 플뢰르의 하루하루는 마치 새로운 삶을 선물받은 것 같았다.
병원 내부가 고작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발로 원하는 곳을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다는 자유는 잃어 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겠지.
'다프네 베네디토, 이제부터 내가 모시게 될 나의 주인.'
플뢰르는 병원 입구 근처 벤치에 앉아 차가운 겨울바람을 쐬면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인생은 메이슨 왕국이 오스왈드 제국에게 패했을 때 끝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죽고 싶지 않아 전투 노예가 되는 것을 선택했지만,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사람이 아닌 물건으로서, 어제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과 다음 날 서로 검을 겨누어야 하는 끔찍한 하루하루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었다.
이 이상 더 나락으로 떨어질 곳도 없을 것 같았는데 그 아래가 있다는 것에 슬퍼하며 꾸역꾸역 살아남고자 했다.
아니, 차라리 가족들과 함께 죽었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업보를 받아들였다.
그런 플뢰르에게 단 한줄기의 빛이 내려왔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이라고 생각했었다.
자신보다 고작 몇 살 어려 보이는 아이가 갑자기 다가와서 이곳이 좋냐고 물어보기에 놀리는 것인가 싶어 화도 났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다프네가 찾아오는 것을 계속 기다리게 되었다.
점차 사람임을 잊어가게 하는 잔인한 일상 속 작은 변화는 아주 달콤한 선물이었고, 낯선 행복이었으니까.
다프네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자신은 그저 하나의 전투 노예가 아닌 플뢰르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러므로 다프네가 떠나고 나면 현실이 자각되어 쓸쓸함이 더욱 커져 갔다.
환한 빛과 같은 그 아이에게 자신이라는 오점을 남길 수 없었다.
크세스를 버리는 것도 모자라 감히 주제넘게 다프네의 호위를 탐하면 안 된다며 주문을 외우듯 스스로를 다그쳤다.
하지만 결국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다프네가 자신을 보러 왔다가 납치를 당했을 때도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다.
그녀를 거절한 주제에 감히 속으로 작은 희망을 품어서, 욕심을 부려서 신이 벌을 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프네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데리러 왔어.'
자신을 데려가고 싶다는 것도 함께 빠져나가는 것도 모두 진심이었다.
적어도 다프네는 자신에게 거짓말 따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진짜 아팠지만, 기뻤었지.'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 검을 든 그 순간의 짜릿함.
족쇄로 인한 고통과 쏟아지는 폭력에도 다프네가 빠져나기만 한다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모든 것을 바쳐서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겨난 것이다.
자신의 사람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 이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 자신을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 속에 담긴 따스함은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필요하다고 하시잖아.'
전투 노예가 아닌 플뢰르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자존심도 긍지도 구겨 버린 채, 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던 콜로세움과는 달랐다.
귀족 작위를 박탈당하면서 잊고 살았던 기사의 맹세를 한 것도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자랑스러워서 떠올리 기만 하면 웃음이 나와 문제였다.
"또 여기 있었냐.”
익숙한 목소리에 플뢰르가 감고 있는 눈을 떴다.
예전보다는 안색이 좋아진 크세스가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플뢰르의 옆에 앉았다.
“추운데 왜 나왔어?”
“잠깐 산책 정도는 괜찮단다.”
크세스가 옷깃을 여기며 찬바람을 후 불었다.
입에서 뿜어지는 하얀 연기에 플뢰르의 얼굴에 걱정이 차올랐다.
“플뢰르, 다프네가 나를 상단 직원으로 받아 준다고 하더라."
크세스가 뭐가 재미있는지 킥킥웃었다.
아니, 재미있다기보다는 마치 이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치료가 끝나면 네 스승이 되라고 하더라."
“뭐라고?"
플뢰르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크세스도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크세스의 병세는 심각하였으나 병원에서 고치지 못할 불치병은 아니었다.
전문적인 치료를 받으면 얼마든지 나을 수 있는 병이었기에 다프네는 크세스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그 덕분인지 크세스의 안색은 지난번보다 훨씬 말끔하고 건강해 보였다.
"뭘 잘할 줄 아느냐고 물어서 무기를 잘 다룬다고 했지. 과거에는 용병 일로 먹고 살았으니까.”
“그래서?”
“그랬더니 다프네가 너의 스승님이 되어 달라고 하더라.”
"하. 다프네가 아니라 다프네 아가씨겠지.”
기가 막힌다는 듯 대답하는 플뢰르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크세스는 전투 노예가 된 그 순간부터 콜로세움에서 빠져나온 지금까지 제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조언을 해 준 사람이었다.
겉으로만 표현하지 않았지 이미 크세스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스승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는데….
“그것 참 다행이네.”
“울어?”
“울기는, 기뻐서 그래.”
크세스의 놀란 목소리에 플뢰르가 옷깃으로 눈가를 훔쳤다.
“참 좋은 주인이 생겼지?"
"응. 내가 이런 행복을 느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지금껏 많이 힘들었잖아. 행복해져도 될 거야.”
크세스의 위로에 플뢰르는 감정이 벅차올라 고개를 푹 숙였다.
무릎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더는 막을 수가 없었다.
크세스는 그저 조용히 플뢰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프네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이든 해낼 거야. 모든 것을 바쳐서 지켜 드릴 거야."
“그래. 나 또한 마찬가지야.”
“난 아직 검사로서 부족한 부분이 많아. 크세스보다는 실전에 많이 약하니까 잘 가르쳐 줘."
“걱정하지 마. 내가 다 낫기만 하면 바로 뼈 빠지게 굴릴 거니까.”
크세스는 일부러 농담 식으로 말을 던졌다.
하지만 플뢰르는 몰랐다.
함께 다짐하는 이 순간.
크세스 또한 살아 있음을 느끼며 밀려오는 벅찬 감동에 눈가가 붉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손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호텔의 한 식당.
그곳에서 클로에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앞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원하는 게 그것뿐인가?"
"예. 잠시 소속만 빌려 주면 됩니다.”
나스의 무심한 목소리에 클로에는 앞에 놓인 서류에 서명했다.
“그대가 내 딸을 도와줬으니 요구하는 바를 들어주지. 1년 동안 고용하겠다는 단기 계약서라네.
이 정도면 충분한가?”
클로에의 말에 나스는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메웠다.
클로에는 나스를 빤히 바라보며 의심이 가득한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
“꽤 실력이 있는 용병 같았는데.
오스왈드에 입국하는 것 외에 우리 상단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딱히 없습니다."
나스의 짧은 답에 클로에가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 나흘 뒤 오스왈드 제국으로 출발할 테니 그때부터 출근하게.”
“그때 보겠습니다.”
나스는 남은 허브티를 쭉 들이켜고는 조용히 일어섰다.
“이봐. 잠깐.”
곧바로 식당을 나서던 중, 그 앞에 서 있는 레녹스와 리카르다에게 붙잡혔다.
“뭡니까?”
싸늘한 무표정에 리카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레녹스가 그를 만류하며 차분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일단 다프네를 구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입니다.
보상도 받았고 그쪽들이 감사 인사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답에 레녹스가 잠시 멈칫하였으나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이름이 정말로 나스가 맞습니까?"
나스가 찰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레녹스가 우다다 질문을 던졌다.
“출신지는 어디입니까?"
“제가 그걸 왜 말해야 합니까?”
“그럼 가족 관계는?"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대부가 한 분 계시는데, 똑같은 용병 일을 하십니다.”
“혹시 원래 머리색이….”
이어지는 질문에 나스가 불쾌함을 숨기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궁금한 게 뭡니까? 돌려 말하지 말고 물어봤으면 좋겠는데.”
"너 정체가 뭐야? 그 외모는 또 뭐고? 처음부터 끝까지 수상한 점투성이잖아.”
나스의 말에 답답함을 참지 못한 리카르다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나스의 표정이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인데… 말이 심하군.”
“그만, 리카. 우리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일지도 몰라.”
“하지만 너무 똑같이 생겼잖아.”
“세상에 닮은 사람 정도는 많겠지. 그러니까 인제 그만하자.”
레녹스의 말에 리카르다는 올라오는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등을 돌렸다.
“다프네에게 가 봐야겠어.”
리카르다는 빠르게 몸을 틀어 쿵쿵거리는 발걸음으로 분노를 표출하며 떠났다.
레녹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쪽을 바라보다가 급하게 말을 남겼다.
“나스 씨가 호위가 되기 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만…. 역시 쓸데없는 말은 아끼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레녹스는 영문 모를 말을 남긴 채 나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빠르게 리카르다를 쫓아갔다.
나스는 두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말없이 빤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보며 나스 또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들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식당을 나선 나스는 조금 전 자신이 만난 세 명의 베네디토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클로에는 어릴 적과 똑같이 딸을 구해 줬다는 이유로 어떤 보상도 아끼지 않았다.
수상한 존재라 의심이 갈 만한데도 말이다.
'아니, 의심되어 가까이 두려는 걸지도 모르지.’
레녹스는 예전보다 더 조심스러워지고, 의심이 많아진 듯했으나 다정한 미소는 그대로였다.
리카르다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감정적이고 유치했지만, 그 속에 깃든 진지한 마음 또한 여전했다.
그들은 여전히 다프네에게는 참으로 다정하고 소중한 가족이었다.
'건강해서 다행이지.'
나스는 다프네를 떠올리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까지 딱딱하게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던 남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믿지 못할 정도였다.
'다프네….’
어릴 적과 다르게 다리도 멀쩡해진 것 같았고, 성격도 더 밝아진 것 같았다.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위축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그는 괜스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나스, 아니 라그나르 나스 시어 볼드는 우연히 다프네와 다시 마주친 순간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