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가족이 없다고? 홀로 지내는 헤츨링은 오래 살아남기 어렵지. 너를 위해 내가 특별히 대부가 되어 주마.”
아무것도 모르는 라그나르는 도움을 준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나르가 요제프의 레어에서 눈을 떴을 때는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어쩐지 몸이 꽤 자라났다 싶더니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단다.
각성을 위해 3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말에 라그나르는 기겁했으나 요제프는 감탄했었다.
“적어도 5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3년밖에 안 걸렸으니 놀라지 마라.”
요제프는 오히려 라그나르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래도 죽기 전에 제대로 된 놈하나는 키우고 가겠구나.”
의미심장한 요제프의 목소리에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저 다프네를 보고 싶어 눈을 떴을 뿐인데 각성을 마치고 깨어난 것이라니.
꽤나 큰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며 눈을 빛내는 그 모습에 소름이 돋은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 * *
“미친 게 분명해.”
라그나르는 눈앞에 놓인 엄청난 양의 책들을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가고 싶었으나 어느새 뒤로 온 건지 요제프가 얄밉게 웃으며 도주로를 막고 서 있었다.
“이곳의 책을 모두 읽고 지식을 머릿속에 넣고 나면 풀어 주마."
“뭐? 진짜 미쳤어?"
라그나르의 질색하는 목소리에 요제프는 즐겁게 웃음을 터트렸다.
"드래곤의 수명은 길지. 네가 죽기 전에는 다 읽을 수 있을 거다.”
“난 최대한 빨리 반려의 인을 맺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을 텐데.”
“반려의 인을 배우기 전에 너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우선이다.”
요제프의 단호한 말에 라그나르는 다시 쌓여 있는 책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커다란 도서관 같은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읽으라니.
“그럼 식사나 잠은 어떻게 하지?”
"드래곤은 몇 년 굶거나, 잠을 못 잔다고 죽지 않는다.”
요제프가 끌끌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그것 봐라. 자기 종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반려의 인을 바로 배우겠다고? 그게 배우고 싶다고 바로 배워지는 건 줄 아느냐?"
몇 번을 설명해 줘도 마음만 앞 선다며 요제프가 고개를 절레절레저었다.
“반려를 만날 생각이 없는 게냐?
그 아이가 다 죽고 나서야 찾아가려고?"
라그나르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잔소리를 하는 척 놀리는 요제프의 얼굴에 주먹을 한대 날리고 싶었지만, 성격 나쁜 저 고룡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최대한 빠르게 읽을 수밖에 없어.'
라그나르가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주변이 고요해졌다.
순식간에 책으로 빠져드는 엄청난 집중력에 요제프는 코웃음을 치면서 사라졌다.
* * *
라그나르가 마지막 책을 덮고 그곳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1년이 지나가 있었다.
드래곤에 관한 책도 있었지만, 그 외에도 인간 세계의 문학 작품등 여러 분야의 서적이 가득하였다.
덕분에 자신의 종족에 대한 이해는 물론 머릿속이 온갖 정보로 채워졌다.
"자. 이제 반려의 인을 맺는 법을 알려 줘.”
"나를 이기면 알려 주지."
반려의 인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뜬 라그나르에게 갑자기 엄청난 마법 공격이 쏟아져 내렸다.
“뭐, 뭐야!”
라그나르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속으로 욕을 하다가 정신을 놓아 버렸다.
그 후 힘겹게 다시 눈을 떴을 때도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몰아치는 요제프의 마법 공격에 기절하고, 다시 깨어나는 과정을 수백번도 넘게 반복하기까지 했다.
“너무 기대감이 컸나 보군. 어쩔 수 없지. 나를 한 대라도 때린다면 알려 주마.”
“내가 어떻게든 너를 때리고 만다.”
몇 번이고 기절을 반복한 라그나 르에게 남은 것은 악뿐이었다.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라그나르는 요제프의 머리카락 한 가닥도 스치기가 어려웠다.
자존심은 자존심대로 구겨지고, 마음은 마음대로 조급하고, 요제프는 라그나르의 허술한 공격을 보며 혀를 차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지식을 배워 놓고 쓸 줄도 모르는구나.”
칭찬은커녕 조롱의 말을 들으며 열심히 얻어맞아서일까.
라그나르는 자신의 몸속에서 느껴지는 방대한 힘을 끌어내는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엄청난 마력에 눌려 기절하기도 하고, 얻어맞아 기절하기도 하고.
포기하지 않고 달려든 결과,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느꼈을 때 그의 뺨에 주먹 한 대를 겨우 날릴 수 있었다.
"좋아. 이 정도면 어디 내놓을만은 하겠군.”
라그나르는 지쳐 쓰러져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었다.
“이제 반려의 인을 알려 줄 때도 됐잖아.”
“그렇지. 네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5년이 되어 가니. 슬슬….”
"나는 어서 다프네를 만나야 한단 말이야.”
“만나서 무어라 말하려고?"
요제프의 말에 라그나르가 상상만 해도 좋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내가 드래곤이라고 말해야지.”
“그리고?"
“반려의 인을 맺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거야.”
라그나르의 행복한 상상에 요제프가 피식 웃으며 누워 있는 라그나르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약속 하나 하자꾸나.”
“무슨 약속?”
"조급하게 드래곤임을 밝히지 않기로.”
단순한 심술이라고 하기에는 장난기가 빠진 목소리여서 라그나르 또한 진지하게 물었다.
“이유가 있나?”
"드래곤임을 밝혔다가 사랑하는 이에게 죽은 놈을 본 적이 있었거든."
“…어째서 죽었는데?"
“사랑했던 사람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충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홀로 두려움에 떨다가 미쳐서 죽여 버렸다고 하더군.”
라그나르의 굳은 표정에 요제프는 그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아! 아프잖아."
“아예 밝히지 말라는 게 아니다.
적어도 서로의 마음이 일치한다 생각하기 전까지는 숨기라는 거야.”
"…알겠어. 그래도 반려의 인을 알려 줘야 해.”
"알겠다. 일단 오늘은 피곤해 보이니 푹 쉬어라. 내일 알려 줄 테니.”
드디어 목적 달성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는 사실에 라그나르는 안도하며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었다.
요제프답지 않은 쓸데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다 생각하며 뿌듯하게 잠들었었던 게 잘못이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넓은 레어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력을 널리 퍼트려보아도 자신보다 더 거대한 힘이 느껴지지 않아 라그나르는 레어를 뒤지기 시작했다.
반나절 정도 요제프를 찾아다녔지만 결국 발견한 것은 그가 남겨놓고 간 쪽지뿐이었다.
'사실 나도 반려를 맞이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 그러니 찾아보고 오마.’
그 쪽지를 발견했을 때의 허탈감과 분노란 말로 설명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그나르는 그대로 요제프를 찾기 위해 레어에서 뛰쳐나왔다.
추신에는 얌전히 레어에서 수련이나 하라고 적혀 있었지만 알 바가 아니었다.
벅차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당장 요제프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산맥을 빠져나온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산맥을 빠져나와서였을까?
잠시라도 그리운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라그나르는 발길을 돌려 예전에 살던 숲속의 집을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은 빈집만 남겨져 있었고, 행방을 수소문하니 떠난 지 5년이나 지난 듯했다.
'어차피 반려의 인을 맺는 방법을 모르는 이상 만나 봤자 불안감만 줄 뿐이야.'
요제프와의 약속도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며 라그나르는 대부의 흔적을 찾아 홀로 여행을 떠났다.
떠돌며 생계를 유지하려다보니 용병 일에 발을 들였고, 어느새 자유 용병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저크시즈에 온 것도 요제프의 흔적을 따라 오스왈드로 넘어가기 위해서였었다.
오스왈드 입국 절차가 까다로워 콜로세움의 도움을 조금 받을까 하며 출전한 그 날.
마치 운명처럼 객석에 자리한 다 프네를 발견했다.
혹시 하는 마음에 경기가 끝나자마자 알아보니 베네디토 상단이 오스왈드로 넘어가기 위해 잠시 저크시즈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같은 곳에 있다고 하니까 만나고 싶다. 얼굴을 보고 싶어.'
머리로는 몇 번이고 안 된다고 결론 내렸지만 야속하게도 제 안의 욕망을 이겨 내진 못했다.
움직인 발걸음이 어느새 다프네.
바로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불러 세웠다.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무시하고 사라진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 자리에 계속 있었더라면 엉엉 울면서 다프네를 끌어안았을지도 몰랐다.
그 후로도 신경이 쓰여 계속 다 프네에게로 시선이 갔다.
이상한 놈들이 쫓아다니는데도 눈치를 못 채고, 혼자 뽈뽈 돌아다니는데 얼마나 위태로워 보이던지.
결국, 라그나르는 다프네의 앞에 나섰다.
아직 밝히지 않은 '나스'라는 자신의 미들 네임으로 말이다.
위험으로부터 그녀를 무사히 지켜 냈다는 사실에 뿌듯한 것도 잠시.
다프네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자신은 라그나르가 아닌 나 스였기에 베네디토에서 또 보상을 받게 되었다.
주변에서 들은 정보에 따르면 베네디토는 곧 오스왈드로 향한다고 들었다.
'목적지가 같으니까. 그곳까지만 욕심을 내는 거야. 들키지만 않게 조심하면 될 거야.'
그래서 망설임 없이 오스왈드로 향하는 여정에 함께 갈 수 있기를 원한다 말했다.
덕분에 리카르다나 레녹스의 의심에 찬 시선은 떨어지지 않겠지.
얼마나 경계를 할지 안 봐도 뻔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걸 어쩐다.”
라그나르는 품에 작은 여우를 안고 산책하는 다프네를 발견하고는 조금 전과 다르게 기쁘게 웃었다.
"자꾸 눈길이 가는걸.”
하지만 아직은 정체를 밝힐 수 없으니 조심해야겠지.
요제프와의 약속도 있었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프네가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니까.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하며 라그나르는 입가에 지은 미소를 지우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 * *
콜로세움 사건이 크게 터진 후 오래간만에 키키와 산책에 나왔다.
즐거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지난번에 지나친 인형 가게를 발견했다.
"아. 키키 저기 인형 어때?”
당연히 여우 인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다가갔는데 아쉽게도 전시된 자리에는 토끼 인형이 놓여 있었다.
“팔렸나 봐.”
주황색 여우 인형이 키키랑 닮아서 진짜 귀여웠는데.
'키키랑 같이 있으면 더 귀여웠겠지.'
키키는 잘 모르겠다는 듯 작은 머리를 갸웃갸웃 움직였다.
“토끼 인형이라도 살까?"
작은 인형 친구를 만들어 주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키키가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싫구나.”
하긴 나도 저 토끼 인형에는 만족하지 못할 것 같은걸.
어떻게 타이밍이 이렇게 나쁠 수 있을까.
아이들도 별로 없는 도시니까 당연히 안 팔렸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내 착각이었다.
역시 그때 샀어야 했다며 후회하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나중에 더 귀여운 여우 인형 사 줄게? 알겠지?"
키키잉-
키키의 작은 울음소리가 듣기 좋아 콧잔등에 가볍게 쪽 뽀뽀를 해주었다.
마치 괜찮다고 답해 주는 것 같아서 쪽쪽 뽀뽀를 해 주니 기분좋은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보다 정말로 나스는 어디로 갔을까?”
산책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요새 가장 많이 떠오르는 사람은 나를 구해 주고 사라진 나 스였다.
아직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는데.
“역시 도시를 떠난 걸까?"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잡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는 그때.
“안녕, 다프네.”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