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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83화 (82/185)

제83화.

나도 모르게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나스!”

“거의 일주일 만인가?"

“그때는 왜 갑자기 사라진 거야?"

내 다급한 물음에 나스가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답했다.

"복잡한 일은 싫어해서.”

나스는 시선을 돌려 콜로세움이 있던 곳을 한 번 바라보았다.

“괜히 목격자나 증인이 되어 휘말리면 골치 아프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그 점까지는 생각 못 했어.”

나스는 자유 용병이라고 했으니 억지로 이곳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 싫을 수도 있다.

내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나스가 물었다.

"어디 가는 중인가?"

“산책하는 길이었는데….”

“또 혼자서 돌아다니는 건가?"

“잠시 병문안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야. 위험한 곳에 간 것도 아니고.”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어쩐지 변명처럼 들렸다.

내 말에 나스가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세하게 구겨진 미간에 나는 키키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앞으로 내밀었다.

“키키가 널 많이 보고 싶어 했어.”

자신의 이름이 들렸는지 키키가 바구니 속에서 퐁 하고 튀어나왔다.

그러고 나스를 보더니 반갑게 꼬리를 흔들며 즐거운 울음을 내뱉었다.

“귀엽네.”

“그렇지?”

"인제 와서 묻는 게 이상하기는 하지만…. 쓰다듬어 봐도 되나?"

물어볼 필요가 있었을까?

어정쩡하게 내민 나스의 손에 키키가 먼저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나스가 키키의 머리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부드럽네.”

“키키가 누굴 이렇게 좋아하는 것 처음 봐. 나랑 라라에게만 이 랬었는….”

나는 무의식적으로 라그나르의 이름을 꺼내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을 하다 말자 나스가 뒷말을 기다리며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어떻게 이렇게 웃으면서 그 아이의 이름을 쉽게 꺼낼 수가 있을까.

가슴 위로 떠 오른 죄책감이 심장을 쿡쿡 찔러 댔다.

나스를 만나서 반가웠던 기분이 단번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갑자기 아무렇지 않게 나스를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 * *

그 후로 어떻게 호텔로 돌아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행히 키키와 함께 무사히 돌아온 것 같기는 한데 하루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머리가 멍했다.

나스를 보면서 자꾸 라그나르와 있던 때가 떠오르니 잠시 잊으려한 죄책감이 나를 괴롭힌다.

외출하지도 않고 호텔에서 조금 쉬고 싶었는데 그것조차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또 왔어, 편지.”

베네디토가 저크시즈에 며칠 더 머문다는 것을 알았는지 시몬에게서 편지가 또 왔다.

“찬바람이라도 좀 쐐야겠다."

이 멍한 정신을 좀 깨우려면 차가운 공기가 필요했다.

나는 테라스로 나와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 같은 시몬.”

그리고 바보 같은 나.

여기서 최고로 멍청이는 마음이 약해질까 두려워 차마 열어 보지 못하는 나일 것이다.

‘미안해, 시몬..'

차라리 나 같은 친구는 없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어쩐지 기분이 울적해져 괜히 편지 봉투를 쥐고 흔드는데 갑자기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편지 봉투가 날아가 버렸다.

“안 돼!”

깜짝 놀라 손을 뻗었으나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편지 봉투는 내 손에 닿지 않고 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호텔 바로 아래 천천히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 편지!”

제발 바람이 거세게 불지 않기를 바라면서 빠르게 뛰쳐나가니 호텔근처의 나무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나는 한숨을 삼키고는 나무를 잡고 흔들어 보았다.

그때 갑자기 또다시 바람이 불어와 편지 봉투가 붕 뜨기 시작했다.

“가지 마!”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편지를 쫓기 시작했다.

짜증 나게도 내 키보다 높이 떠올라 있어서 뛰어올라도 잡을 수도 없었다.

그저 총총 뒤쫓는 것밖에 못 해짜증을 내려는 그 순간 편지가 누군가의 얼굴에 부딪혔다.

"앗."

편지가 스르르 떨어졌고, 편지에 맞은 사람이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편지?”

"나스…!”

편지를 잡은 사람이 내가 아는 이여서 다행이었다.

'…다행인 게 맞나.'

나스를 보고 라그나르가 떠올라 혼란스러워한 지 얼마나 됐다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스가 편지를 한 번 보더니 내 손 위에 올려 주었다.

나는 또다시 바람에 날아갈까 편지를 꼭 쥐고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녕, 다프네.”

"안녕, 나스, 편지 잡아 줘서 고마워.”

나스는 괜찮다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중한 편지인가 봐?"

“응. 친구가 써 준 편지거든.

아니, 지금은 친구가 아닌가."

나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물었다.

“친구랑 싸우기라도 했나?"

나스의 질문에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싸운 것은 아니고…. 내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떠났거든.”

“왜?”

“내가 잘못한 게 있어서."

소중한 친구가 나 때문에 죽었다.

고 말할 수 없었기에 그저 말을 얼버무렸다.

나스는 탐탁지 않다는 듯 편지를 노려보았다.

“편지를 읽어 보면 아직도 친구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텐데.”

“겁이 나서 읽어 보지를 못했어."

나는 손에 쥔 편지를 만지작거리다가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나스가 눈을 도록 굴리더니 내 가방을 한 번 보고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가 꽤 많은데 하나도 안 읽은 건가?”

"......."

무언이 긍정이라 것을 알았는지 나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계속 편지를 봐 달라고 보내 주는 사람이 어떻게 친구가 아니지?”

“내가 그 친구에게 잘못한 일이 있어. 그래서….”

“그 친구랑 이야기해 보기는 했나?"

“…아니.”

겁이 나서 떠나는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

내 표정은 점차 어두워져 갔다.

나라고 이 편지를 안 읽어보고 싶었겠는가.

시몬이 계속 보내는 편지를 뜯어 읽어 본 다음 답장을 보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 않나.

시몬과 연락을 끊는 것이 맞았다.

“그럼 한 번 편지를 읽어 보는건?”

“…무서운걸."

“무섭다고 계속 피하면 진짜로 그 친구를 잃을지도 모를 텐데.”

나스의 뼈 있는 말에 괜히 발로 땅을 툭툭 찼다.

"내가 볼 때 그 친구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아서 계속 연락을 해주는 것 같은데.”

“하지만….”

약한 소리를 내뱉는 내 입이 원망스러웠으나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을 어쩌란 말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괜히 땅만 바라보는데 갑자기 내 앞으로 주홍빛 무언가가 나타났다.

복슬복슬해 보이는 주황색 여우 인형이 움직이면서 말하고 있었다.

"나는 걱정 인형이다.”

".......”

"네 걱정을 모두 가져가 주마."

복화술도 연기도 꽝인 목소리가 날 위로해 주기 시작했다.

인형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해 나도 따라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스는 자기 얼굴에 여우 인형을 가져다 대면서 말했다.

"내가 그 걱정을 다 가져갔으니 편지는 멀쩡할 거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열어 봐."

그 말과 함께 여우 인형이 천천히 내려갔고 나스 특유의 딱딱한 무표정이 보였다.

아니, 무표정이 아니었다.

슬며시 지은 미소와 함께 나스가 내 품에 여우 인형을 폭 안겨 주었다.

“여우 인형…. 언제 산 거야?”

“예전에?"

나스는 잘 기억이 안 난다며 말을 돌리려 했다.

생각해 보면 지난번에 인형 가게 앞에 나스도 있었지.

내가 주의 깊게 관심을 가진 것을 본 걸까?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느낌에 나는 황급히 여우 인형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쩐지 볼이 살짝 뜨거운 게 이상해 보일 것 같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편지 읽어 볼 거지?"

"내 걱정은 이 인형이 다 가져가 준다고 했으니까…. 읽어볼게.”

나는 인형을 얼굴을 묻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분명히 그 친구도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스, 있잖아.”

오늘따라 나스가 너무 친절했다.

보통은 딱딱한 말투와 차가운 표정을 주로 짓더니 오늘은 달랐다.

자꾸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봐주고 고민하는 것에 친절히 조언도 건네준다.

심지어 갑작스러운 인형 선물이라니.

'떠나기 전 마지막 인사 같은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이렇게 떠나 버린다면 왜인지 모르게 정말 서운할 것 같았다.

'아니야. 서운해하면 안 된다고 다프네.’

나스 앞에만 서면 라그나르가 떠오르면서 마음이 너무나도 거세게 요동쳤다.

그와 더 있다간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릴 것이 뻔했다.

차라리 지금 인사를 하고서 깔끔하게 헤어지는 것이 맞았다.

그렇다면 그냥 이런 사람도 있었었지 하며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인사를 하기 싫은 걸까.

아직 콜로세움에서 구해 줘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예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열리지 않는 입 때문에 억울함이 밀려왔다.

“그러니까.”

“춥다.”

“응?”

눈을 질끈 감고 이야기를 꺼내려는 찰나 나스가 내게 무언가를 덮어 주었다.

자신의 망토를 벗어서 내 위에 덮어 주고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호텔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응? 아, 그렇지.”

"혼자는 위험하니까 데려다줄게.”

오늘도 베풀어 주는 호의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손을 잡은 채 그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장갑을 낀 손이어서 그런지 촉감은 잘 느껴지지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그가 의식되었다.

'내가 곤란해 보이기라도 했나?'

나스는 표정이 매우 싸늘한 사람이었지만 의외로 마음이 착한 친구였다.

라그나르도 이렇게 착하고 다정했었는데.

곤란한 상황이면 오히려 웃으면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던 아이였지.

‘언제쯤이면 너를 떠올리면서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라그나르와의 즐거웠던 추억은 슬픈 기억에 파묻혀서 깊은 가슴속에 숨겨 두었는데 다시는 꺼낼 수 없는 거겠지?

그리고 나스도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

그런 생각들이 자꾸 떠오르다 보니 속상한 마음에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어느새 두 걸음 정도 앞서 걷는 나스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것과 같은 모양새가 되었을 때, 나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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