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84화 (83/185)

제84화.

"어디 아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나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어디 아프냐는 말이었던 것 같다.

그를 볼 때마다 라그나르가 떠올라 슬퍼했기 때문인 걸까.

“아니야. 그냥 옛날 생각이 조금 나서 그래.”

별 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작게 흔들자 그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와닿았다.

어차피 호텔은 거의 다 와 갔고, 조금만 더 걸어가면 도착이었다.

곧 헤어지는 시간이니까 이제는 꺼내야 할 말이다.

“나스.”

“왜 그러지?”

“고마워."

나스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푸른 눈을 깜빡깜빡였다.

나름 당황한 모습인 걸까?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콜로세움에서 구해 준 것도, 내가 걱정돼서 이렇게 데려다준 것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추운 겨울바람 때문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부끄러워서 그런 것일까.

나스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소속은? 구했어?"

“응.”

“아….”

생각보다 빠르게 구했구나.

'헤어지기 싫다.'

하지만 이게 맞는 걸 거야.

내게 그 누구도 라그나르를 대신할 사람은 없으니까.

'그저 그리워서 미련이 생기는 거야.'

정말 놀랄 정도로 닮은 사람을 만나서, 성격이 매우 다르지만 다정한 모습은 비슷해서.

'그래, 정말 그것뿐이야.'

겁쟁이처럼 피하는 것은 그만해야 했다.

어차피 이제 헤어질 사람이니까 잘된 일일 거다.

“헤어지기 전에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낯간지러운 말이었는지 나스의 입가에 어색한 웃음이 지어졌다.

친절한 나스에게 마지막 인사는 제대로 해주고 싶었다.

“그럼 잘 있어.”

시간이 지나고 우연히 오스왈드에서 만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처럼 함께 시간을 보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 이게 단둘이 있을 마지막 시간이니까 인사하는 거다.

“그래. 안녕.”

나스도 나를 따라서 아쉬움을 담아 인사를 건넸다.

나는 인사를 듣자마자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차라리 더 정을 주기 전에 이렇게 떠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인형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

모두가 잠든 새벽 나는 침대에 앉아 조심스럽게 편지봉투를 뜯어보았다.

곱게 접혀 있는 편지지가 나왔는데 슬쩍 보니 정갈한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여우 인형을 끌어안고서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어보았다.

"아.”

그리고 편지의 첫 줄을 읽자마자 눈물을 터트려 버렸다.

보고 싶은 다프네에게 어쩌면 내 주변에는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밖에 없는 걸까.

또르륵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편지의 내용은 별다른 게 없었다.

오늘은 어떤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라든가, 겨울이어서 너무 춥다는 내용.

평범한 일상을 담아 놓은 편지는 과거에 나누었던 편지와 다를 바가 하나 없어서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치 과거로 시간 여행이라도 온 기분, 그때가 그리워지는 향수에 나는 훌쩍이며 편지를 계속해서 읽어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시선이 닿았을 때 훌쩍임을 넘어서 엉엉 눈물을 터트렸다.

사랑스러운 내 친구 다프네. 언제나 너를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왜 시몬이 나를 원망하고 미워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이렇게 다정한 사람인데 홀로 겁을 먹고서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이 미안하면서 차오르는 죄책감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5년이라는 시간이 참으로 길었을 텐데 나는 소중한 친구에게 또 못된 짓을 하고 있었구나.

평생 답장을 못 쓸 줄 알았는데 마음속에서 용기가 차올랐다.

보고 싶었다고, 용기가 없어서 이제야 편지를 펼쳐 보아서 미안하다고 답장을 보내어 다시 편지를 나누고 싶었다.

만약에 나스가 조언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평생 편지를 펼쳐보지 못했었겠지.

'좋은 애였어. 이제 다시 만나기는 힘들겠지만.'

여러 감정이 복받치는 고요한 새벽, 나는 편지와 여우 인형을 끌어안은 채 훌쩍이면서 침대에 누웠다.

부디 앞으로 나아갈 길만 바라보기를 다짐하면서 잠에 빠져든 것 같다.

* * *

플뢰르와 크세스도 퇴원하고, 출항 준비도 끝이 나 드디어 오스왈드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나는 저크시즈를 떠나기 전에 시몬에게 쓴 편지를 보낸 뒤 배에 올라탔다.

아마도 내가 오스왈드에 도착한 뒤 한참 지나서야 시몬에게 편지가 닿을 것이다.

답장이 늦게 올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벌써부터 답장이 기다려져서 큰일이었다.

친엄마의 조국으로 떠나는 가벼운 발걸음,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지반이 되어줄 곳, 그리고 새로운 곳을 향하는 설렘.

시몬에게 보낸 편지까지 더해져서 기분이 더 들떴다.

이 여행이 정말 즐거울 것 같다고 생각하며 객실에 짐을 정리한 뒤 갑판 위로 나왔다.

어느새 배가 서서히 항구를 떠나고 있었고, 배의 움직임에 따라 바닷물이 부드럽게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배를 타는 것이 처음도 아니면서 설레는 마음 덕분인지 모든 것이다 즐거웠다.

“모두 주목. 소개할 사람이 있다.”

플뢰르 옆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니 엄마 옆에 익숙한 누군가가 서 있었다.

“베네디토에 새로운 호위가 들어왔으니 모두 잘 대해 주도록."

"반갑습니다.”

딱딱한 무표정으로 인사하는 사내의 모습에 나는 마치 머리를 한대 맞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너, 너!”

주위에 시선이 몰리는 것도 신경쓰지 못한 채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니 눈을 마주친 그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안녕, 다프네.”

새로운 호위는 빌어먹게도 작별인사까지 마친 나스였다.

* * *

“다프네, 아직도 화났나?"

"......"

나스가 인사를 건넸으나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급하게 그 자리를 피했다.

내 무시에 나스가 졸졸 쫓아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기어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가씨. 내쫓을까요?"

플뢰르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쓸데없는 일에 힘 빼지 마. 플뢰르는 아직 휴식이 필요해.”

"아가씨….”

플뢰르의 감동 섞인 목소리와 다르게 내 머릿속은 짜증이 가득했다.

그날 나를 만나기도 전에 나스는 이미 베네디토 상단에 호위로서 고용되었던 것이다.

'먼저 말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에 서운해 하다가도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니 당연한 건가 싶기도 했다.

‘어차피 나스에 대해서 잊어버리려 했었잖아. 서운해 하면 안 되지….’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얼마나 힘겹게 내뱉은 말인지 나스는 모르겠지.

'그래. 애초에 우리가 시시콜콜대화를 주고받을 정도로 좋은 사이도 아니잖아.'

약간의 호의를 받았고, 그 호의에 대해 보상을 받게 된 것뿐이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데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니 나도 모르게 계속 인사를 해도, 말을 걸어도 고개를 돌리기 바빴다.

반나절을 피해 다니니 나스가 다가와서 말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까 말하지 않았어.”

내가 자기 때문에 심란한 것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조심스럽게 하는 말에도 왜인지 모를 짜증이 났다.

괜히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아 또다시 그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다.

누가 들으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름 큰 각오를 하고서 건넨 인사였단 말이다.

'거기서 끝나는 인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라그나르를 닮은 이 얼굴을 자주 보게 된다면 나는 괜찮을까?

나스를 정말로 마음 편히 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나스를 받아 준 걸까.'

엄마도 오빠들의 마음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두들 라그나르와 닮은 얼굴을 봐도 아무렇지 않은 걸까?'

나만 이렇게 불안한 걸까.

에휴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든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내일이면 오스왈드에 도착할 테고 그 후로도 나스는 계약된 날까지 호위로서 열심히 일하겠지.

실력은 보장되었으니 상단에도 손해는 없을 것이다.

'다 괜찮아하니 나만 참으면 돼.'

조금 불편한 마음만 참고 지내다보면 언젠가는 괜찮아질 것이다.

“여기 있었네, 다프네.”

생각하기 무섭게 들리는 목소리에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나스가 처음과 변함없는 딱딱한 표정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안녕, 나스.”

“이제 무시하지 않는 건가?”

“?”

“계속 무시하길 원한다면….”

"아니, 사양하지.”

나스는 내 대답에 놀라더니 빠르고 단호하게 답했다.

그러면서 슬금슬금 내 옆으로 다가왔다.

겨울의 해는 짧아 아직 여섯 시도 안 되었는데 바다를 어둠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하다."

“…아니야. 화가 난 건 아니고 그냥… 개인적으로 생각이 많아져서 그랬어.”

오히려 무시를 당했다고 화를 내야지 왜 사과를 하는지.

미안함이 가득 담긴 표정을 한 나스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내 옆에 서서 어두운 바다를 빤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베네디토의 상단 자체의 호위보다는 네 호위가 되고 싶었어.”

“왜?”

나스는 잠시 말이 없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깊은 푸른색 눈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잘 읽히지 않았다.

곧게 나를 향한 눈빛에 오히려 내 마음속이 더 복잡해져 버렸다.

겨우 아무렇지 않은 척 라그나르를 마음속에 묻어 두고 있었는데.

마치 내 마음에 거대한 폭풍을 안겨 주겠다는 듯 나타난 나스가 어떻게 신경이 쓰이지 않겠는가.

‘차라리 못되기라도 했으면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갑자기 나타나서 신경이 쓰인다고 도와주고, 도움이 필요할 때 나타나 위험에서 구해 주고, 표정은 딱딱했으나 도움을 내미는 손길은 부드럽기 짝이 없어 무뚝뚝해도 심성이 나쁜 자는 아니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나스는 정말로 라그나르가 아닐까?'

닮아도 너무 닮은 외모, 목소리도 비슷한 것 같고, 강하고, 또 키키도 처음부터 이유 없이 굉장히 좋아하고 잘 따른다.

… 만

이렇게 비슷한 점이 많은데… 만약에 라그나르가 그날 살아남았다면?

겨우 살아남았지만, 충격으로 인해서 나를 잊어버린 거라면?

원작을 따르게 만드려는 그 힘에 다시 불안해 지겠지만.

그래도 그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기쁠 텐데.

'아니. 내가 그냥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뿐이잖아.'

속상함에 올라오려는 눈물을 꼭 참아 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물었다.

"아직도 내가 신경이 쓰여? 왜?"

내가 바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간절함을 담아 보았다.

한참 답이 없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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