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85화 (84/185)

제85화.

“그냥 자꾸 눈에 밟혀.”

단지 그뿐이라며 나스는 말을 아꼈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으면 무어라 더 말이라도 하지 그 후로 다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래. 그럴 리가 없잖아.'

너무 갑작스러워서 혼란한 마음에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나는 주먹을 쥐고 멀어진 정신을 꽉 잡았다.

“그뿐이구나.”

혹시나 했던 마음이 마치 쓰레기처럼 와그작 구겨져 버렸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어.’

죽은 흔적을 확실하게 보았으니까, 그 큰 감옥이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사라졌으니까.

살아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기적일 것이다.

빌어먹을 기적은 내게 찾아오지 않을 테니 포기해야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마음은 머리와 다르게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웠다.

감정이 이성을 흔드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라그나르와 너무도 비슷한 자를 보고 나니 실낱같은 희망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다.

터무니없는 짓이고, 누가 보면 과거에서 벗어나라고 하겠지만….

‘용의 감옥에 대해 알아봐야겠어.'

오스왈드에도 드래곤에 관한 전설이 적힌 책 정도는 있겠지.

말도 안 되는 일이고, 헛수고일수도 있지만 해 봐야 했다.

아니, 하고 싶었다.

'나스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해봤어야 하는 일이었어. 오히려 너무 늦게 찾아보는 거라고.'

감옥 근처에 피가 뿌려진 것을 보고 죽었을 것이라 확신했지만, 사라진 용의 감옥은 찾지 못했으니까.

단순히 라그나르가 그리워서 헛된 희망을 품는 것일 수도 있다.

그저 닮았다는 외모로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니까.

나는 나를 바라보는 나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럼에도 저 짙은 파란 눈동자가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도 나스 네가 신경 쓰이니까.'

서로 눈이 마주친 채 한참 정적이 이어지자 불편했는지 나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편지는 읽어 봤나?"

"응. 새벽에 읽어 봤어.”

"어땠지?”

표정의 변화는 없지만, 눈빛에는 기대감이 차오른 것이 보였다.

그에 나는 다시금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그러자 저절로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자기는 잘 지내고 있다고, 내 답장을 계속 기다릴 거라고 하더라."

“편지 읽기를 잘했군."

“응. 정말로, 답장도 보냈어. 난 잘 지내고 있다고, 나도 보고 싶었다고.”

시몬에게 언제 답이 올지는 모르지만 더는 편지를 열어보는 것이 두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슬며시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응. 정말로 잘한 것 같아.”

나스에게 편지의 내용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조언 덕분에 그런 용기가 났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앗. 차가워.”

갑자기 하늘에서 무언가가 차가운 것이 떨어졌다.

눈을 살풋 찌푸리다가 고개를 올려보니 하늘에서 나풀나풀 하얀 눈송이들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눈이네.”

“예쁘다.”

조금씩 떨어지는 눈송이들은 점차 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밤이 물든 하늘에 송송이 박힌 눈송이 덕분인지 춥다기보다는 다시금 여행의 설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춥지 않아?”

나스가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망토를 내게 씌어 주었다.

머리 위에 폭 얹어지는 느낌에 나는 손만 살짝 내밀어 떨어지는 눈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러운 눈이 반가운지 나스 또한 눈이 부드럽게 풀린 것이 보였다.

“나스, 사실은 진작 말해야 했었던 건데. 조금 늦었지만."

“응?”

엉켜 있던 복잡한 마음은 땅에 닿는 눈송이처럼 사르르 녹아내린 듯 사라졌다.

“앞으로 잘 부탁해."

"......"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스는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내가 내민 손을 잡았다.

잡은 손을 가볍게 흔드는 데 그가 반대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돌려 버렸다.

'뭐지?’

바다에 떨어지는 눈이라도 보고 싶었던 걸까?

'어쩐지 귀가 조금 빨간 것 같기도 하고.'

주변에 조명 빛 때문인지 착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마치 눈이 우리를 반겨주듯 하늘에 가득 차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도 많았고, 해야 할 일도 많을 것이다.

쉽지만은 않은 길이겠지.

그래도 앞으로의 나날이 조금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 *

다음 날, 오스왈드에 도착하였다.

배에서 내려 오브리 항구에 발을 디디자 두근거리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이곳이 내 친엄마의 고향 오스왈드 제국이구나.

드디어 친엄마의 유골을 고향 땅에 묻어줄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돌아온 고향을 친엄마 또한 반겨주겠지.

그런 내 설렘과 다르게 막상 도착한 항구는 어쩐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라?'

오스왈드 제국의 남부에서 제일 큰 오브리 항구는 해상 무역의 중심지라고 하였다.

'사람이 너무 없는 것 같은데.'

항구에 배도 별로 없고, 일하는 사람도 우리 상단의 인력을 제외하고는 보이지 않았다.

"너무 조용한데요?”

이상함을 느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레녹스의 의문과 함께 심각한 엄마의 표정이 보였다.

“소문으로 듣기는 했었지만, 생각보다 더 심한걸.”

“소문? 설마….”

"내전 때문에 무역선이 잘 드나 들지 않는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엄마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며 나는 설마 했던 짐작이 들어 맞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전….”

형제끼리 황권을 갖기 위해 벌이는 싸움.

친엄마의 요청을 무시할 정도로 매정한 그 두 형제가 벌이는….

생각만으로도 아드득하고 이가 갈렸다.

“하지만 항구장아요. 이렇게까지 조용한 것은 이상한걸요."

“오스왈드 제국의 상단들은 사치 품을 주로 수입하여 귀족들에게 판매하니까. 거의 귀족 전용 상단이라고 보면 된다.”

“그럼 평민들은요?”

내 물음에 엄마가 착잡한 표정으로 답을 해 주었다.

“농사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은 주로 외국 상단에서 수입해 오는데….”

엄마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두 가지 이유를 말해 주었다.

“던전이 자주 출몰하는 제국인데 내전까지 있으니 위험해서 개입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하는 걸 거야.

그리고….”

“그리고?"

“외국 상단은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거든. 본국의 황실에서 내린 허가권이 있어야만 대상단으로 인정받을 기회가 생겨 절차가 까다로운 편이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여러 한계가 있으니까 도전조차 하지 않는 거구나.”

“위험 요소를 감수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심한걸.”

엄마의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확실히 지금껏 돌아다녔던 어느 왕국에서도 이렇게까지 조용한 항구는 없었다.

“보낸 짐들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

“미리 사들인 건물에 보관한다고는 했는데.”

일단 그곳에 가 봐야 할 것 같다며 움직이려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자, 잠시만요! 기다려 주세요!"

나이를 꽤 먹은 노인이 헉헉거리면서 힘차게 뛰어와 우리 앞에 도착했다.

그는 거센 숨을 억지로 들이 삼키며 우리를 간절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헉, 헉. 혹시 베네디토 상단입니까?"

“그렇습니다만.”

“저, 저는 이 마을의 이장 가스파르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베네디토 상단의 상단주 클로에 베네디토라고 합니다.”

가스파르의 소개에 엄마가 악수하고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가스파르는 엄마와 악수를 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우리 앞에 엎드리고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제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도와달라니?"

엄마의 물음에 가스파르는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한 채 간절하게 빌었다.

"부디, 부디 우리에게 식량을 팔아 주세요.”

갑작스러운 부탁에 엄마는 당연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식량이야 원래 팔려고 가져온 것이니 문제야 없습니다만."

“그것이 ….”

가스파르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는 것이 아무래도 무언가 사정이 있는 듯싶었다.

엄마는 한숨을 쉬면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상인이 물건을 팔러 왔지 그럼 기부하러 왔겠습니까. 우선 자리를 좀 옮겨 봅시다.”

가스파르가 힘겹게 그 손을 잡고서 일어났다.

'아. 뭐가 이상한지 알겠다.'

처음 봤을 때 기시감이 느껴진다.

싶더니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엄마가 내민 손을 잡은 그의 손은 너무 말라 있었다.

얼굴도 핼쑥해 보일 정도로 야위어 보였는데 소매 사이로 비친 팔목 또한 심각하게 말랐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래 굶은 것 같지?'

이상할 정도로 야윈 사람은 가스파르 뿐만이 아니었다.

거리를 걸어가면서 몇몇 사람과 마주쳤는데 모두 다 삐쩍 마른 것이 딱 보아도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 옆에 있던 플뢰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가씨, 저들이 정말로 오스왈드의 제국민들이 맞나요?”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맞는 것 같아.”

“그런…. 오스왈드는 전쟁에서 승리하였는데 어째서 저들이 패전국 사람들보다 더 못 먹고 사는 것 같을까요.”

플뢰르는 화조차 나지 않는다며 그들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그 정도로 심각한 모습이었다.

적어도 메이슨 왕국은 오스왈드에 패전해 속국으로 들어간 뒤 몇 년이 흐르자 어느 정도 사람들이 살 만한 나라가 되었다.

적어도 저들처럼 항구에서 굶어가는 사람들은 없었다.

“메이슨뿐만이 아니라 도나 왕국이나 아자르 왕국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제일 부유해야 할 나라의 사람들이 이런 꼴이 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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