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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86화 (85/185)

제86화.

상단에 도착한 뒤 우리의 앞에 따스한 차가 놓였다.

몸을 녹일 만큼 따스한 차임에도 불구하고 가스파르의 눈에는 차보다는 함께 곁들인 티푸드에 더 눈이 가는 듯했다.

"배고프면 드셔도 됩니다."

“아, 아닙니다. 그저 오래간만에 보는 고급 디저트가 반가워서 쳐다본 겁니다.”

가스파르는 애써 변명을 하면서 차를 홀짝 마셨다.

엄마는 기다리지 않고서 본론을 바로 꺼내 들었다.

“그래서 식료품을 팔아 달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뜻입니까?”

엄마의 물음에 가스파르는 애꽃은 찻잔만 만지작거리며 말을 아꼈다.

망설이는 모습에 엄마는 차를 한 모금 넘기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를 재촉했다.

“상인의 시간은 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귀한 시간을 이렇게 날릴 생각이라면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엄마의 차가운 목소리에 가스파르가 화들짝 놀라며 입술을 잘근깨물었다.

그리고 곧 입을 열어 드디어 본론을 꺼내었다.

“식료품을 부디 물가보다 싸게 팔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물가보다 싸게?”

그 부탁에 엄마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외국 상단은 타국의 물가에 맞춰서 물건을 판매하는 것이 보통이니 당연한 소리인 것 같은데.'

“확실히 오스왈드의 물가가 다른 나라들에 비교해 보면 비싸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저희 상단은 가격을 높게 책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란 말에 가스파르가 몸을 덜덜 떨면서 말을 이었다.

“그것이… 확 낮춰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확 낮춰 달라?"

엄마의 표정에 불쾌감이 어렸다.

확실히 갑자기 나타나서 부탁이 랍시고 물건을 싸게 팔아 달라고 한다면 상인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달갑지 않을 뿐만 아니라 쫓아내도 별말 못 할 정도이지.

“오스왈드의 상단들은 평민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지 않습니다.

알다시피 내전이나 던전 문제로 인해서 외국 상단도 잘 들어오지 않다 보니….”

“않다 보니?”

“제국의 상단들이 폭리를 취하면서 식료품의 물가를 확 올려 놓았습니다.”

가스파르의 말에 엄마는 턱을 쓰다듬으며 이해 안 된다는 물음을 던졌다.

“농사를 짓지 않았습니까?"

“작년부터 유난히 큰 가뭄이 들다 보니….”

“항구 도시니 피해가 컸겠군요.

구매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텐하지만 다른 도시의 자작농들에게데?”

“보통 자작농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서 큰 비용을 상단에 빌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에 가뭄이 유독 심하다 보니….”

가스파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농산물의 수확량이 적어서 빚진 것을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빚 대신 수확한 것들을 빼앗겼고요.”

가스파르의 말에 엄마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가뭄 때문에 꼬여 버렸군."

"예. 대부분의 제국민들은 이러한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황실에서 나서지는 않습니까?

상단이 이렇게 폭리를 취한다면 제재가 있을 텐데.”

엄마의 물음에 가스파르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전으로 인해 황실은 우리에게 신경 쓸 틈도 없죠. 반란군을 상대하랴 귀족들을 상대하랴 바쁘니까요.”

황실은 도움이 안 된다며 가스파르의 목소리에 울음이 차올랐다.

“이곳의 상단들은 다 귀족들을 상대로 장사하다 보니 귀족들을 뒷배로 두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항의를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귀족들의 입지가 크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엄마의 탐탁지 않은 목소리에 불안감을 느꼈는지 그가 다시 한번 허리를 푹 숙였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마을의 많은 사람이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항구 도시가 이 정도면 내륙 안으로 들어가면 말이 아니겠군.”

"부탁드립니다.”

가스파르의 애달픈 부탁에 엄마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고민이 될 만했다.

보통 외국 상단은 타국의 상단들과 척을 지지 않기 위해 물가를 맞춰 주는 것이 보이지 않는 룰이었으니까.

지금껏 어느 도시에서도 모두 그렇게 상단을 넓혀 왔었다.

물가를 낮춰 주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우선은 이곳으로 물건을 나르는 해상 비용만 해도 만만치 않을 테고,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 손해가 클 것이다.

애초에 우리 상단의 주 타깃층인 평민들이 돈이 없다면 장사도 여러 의미로 더 힘들어질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실패하면 큰 손해를 안고 가기까지 해야 하니.

차라리 오스왈드에서 상단을 철거하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

그것이 덜 피해를 보는 방법일수 도 있다.

‘실패하며 피해가 정말 클 거야.'

단 한 번에 내릴 수 없는 결정이다.

하지만 이 도전을 기회로 삼는다면 어떨까?

나는 엄마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엄마의 시선이 내게 닿았고 나는 가스파르를 눈짓하며 말했다.

“엄마, 들어주는 게 어떨까요?"

“…생각해 본 방안이라도 있는 거니?”

주제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도 엄마는 내게 발언권을 주었다.

“우선 한정적인 기간을 정해서 생필품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거예요. 대량 구매를 할 수도 있으니 한 사람당 구매 수량을 정해 놓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돈이 없는 사람들은 구매하지 못해. 마냥 낮춰서 판다 해도 해결되는 게 아니다.”

엄마의 말에 틀린 것 하나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하는 다른 사업이 있잖아요. 특산물 사업. 이곳의 특산품을 다른 나라로 수출하는 건 어떨까요?”

나는 가스파르의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통 평민들과 다르게 옷의 문양이 화려하잖아요. 다 수제품인 것 같은데 맞나요?"

"마, 맞습니다. 우리 마을은 손재주가 좋은 이들이 많아서 예전엔 옷감에 문양을 새겨서 판매하고는 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전반적으로 오스왈드의 특산품은 흔치 않으니 꽤 좋은 값에 팔릴 거예요.”

"흐음.”

“만약에 돈이 부족하다고 하면 특산품으로 판매할 만한 것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엄마의 미간이 조금 펴졌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생각하시는 것 같아 의견을 더해 보았다.

"아니면 우리가 특산물을 구매해서 다른 곳으로 팔아도 좋고요.

우리야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팔수 있잖아요.”

“하지만 성공 확률이 적을 텐데.

오스왈드의 상단과 귀족들의 반발도 꽤나 있을 테고."

“상인 연합에 들면 상단 간의 훼방은 피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귀족들의 위협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오스왈드의 황실은 귀족들을 견제해야 한다고 들었어요. 황실에 납품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엄마는 내 말을 듣고 조용히 생각에 빠지셨다.

“그렇다고 오스왈드의 사람들이 외국 상단을 흔쾌히 이용할까? 너무 위험한 도전일 것 같구나.”

엄마의 말에 동의하지만 해야 할말은 해야 했다.

“하지만 해 보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단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이잖아요?"

“그렇지.”

내 말에 이번에는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이곳은 클레멘스와도 멀리 떨어져 있는 제국이지 않은가.

오스왈드만큼 베네디토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저렴하게 물건을 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 그럼 자동으로 이름을 궁금해하겠죠."

“그리고?”

“그리고 사람들의 입을 타고서 여러 지역에 상단의 이름이 알려질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도전이라고 생각해요."

내 이야기는 모두 끝이 났다.

물론 완벽한 계획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해결 방안의 일부분이 되어 줄 수는 있겠지.

내 말이 끝나자 가스파르가 희망에 찬 얼굴로 필사적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저, 저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애당초 저희의 주 소득은 특산품판매였으니 판매할 기회를 주신다 면야!”

들뜬 목소리는 내 의견에 힘을 보태주고 있었다.

“상인 연합에 들고 대상단의 자격이 주어진다면 위쪽의 압박도 줄어들겠지. 그러기 위해선 이름을 알리는 게 제일 중요하고."

엄마 또한 나쁘지 않다 생각하는지 어느새 미간에 구겨진 주름이다 펴져 있었다.

“최고의 자리에서 하는 도전은 진부하잖아요. 우리 새롭게 도전해 보는 건 어떨까요?”

내 제안에 엄마가 못 말린다는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곧 나올 대답을 알 것 같아 빙그레 웃으며 엄마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우리 상단이 얼마나 높아질 수 있을지 같이 도전해 보고 싶어요.”

* * *

살고자 하는 의지는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 힘을 준다.

오스왈드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말이 얼마나 잘 맞는지 느끼고 있다.

“생각보다 더 잘 흘러가네."

나는 3층에 있는 내 방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건너편 건물의 1층은 굉장히 넓었는데 이 거리에서 유독 사람이 넘치는 가게가 있었다.

바로 베네디토 상단의 가게 중 하나였다.

기분 좋게 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열린 문 너머 나 스가 가볍게 손을 흔들고 다가왔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창가에서 위험하게.”

슬쩍 손으로 창가를 막는 것에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빨리 돌아왔네?"

“키키의 도움이 컸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디선가 키키가 달려와 내 발에 몸을 부딪쳤다.

“키키! 괜찮아?”

“오래간만에 봐서 반가운가 보군.”

“사흘 만이어서 그래?"

나는 몸을 낮춰 키키를 들어 올려 품속에 껴안았다.

기분이 많이 좋은지 살랑이면서 계속 꼬리를 흔드는 것에 코에 쪽 입을 맞추어 주었다.

“언니 오랜만에 봐서 좋아?”

마치 내게 뽀뽀를 해주듯 코를 뺨에 촉촉 부딪히는 것에 꺄르르웃었다.

나는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부드러운 키키의 털을 열심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내 걱정은 안 해 주는 건가?"

나스가 나와 키키를 빤히 보더니 조용히 내뱉었다.

나는 그를 힐긋 올려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작은 던전이었다며. 당연히 다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나라고 처음부터 이렇게 키키만 챙긴 것은 아니다.

나스가 던전으로 간다는 소식에 처음에는 얼마나 불안해했었던가.

라그나르 때처럼 쉽게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며 잠도 제대로 못 잤었다.

플뢰르나 크세스가 괜찮을 것이라 말해도 쉽게 안심을 못하고는 했는데 내 걱정이 우습게도 나스는 멀쩡하게 돌아왔다.

몇 번을 그렇게 반복되다 보니 이제 크게 걱정도 안 들었는데 너무 무심해 보였던 건가?

나스가 평소와 다르게 조금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다쳤다."

그리고는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소매를 걷어 보여 주었다.

지금껏 괜찮다가 갑자기 다쳤다니 미안한 표정으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상처를 보자마자 나스의 뻔뻔함에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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