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어디에서 넘어지기라도 한 듯 팔에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다친 거야?”
“넘어지면서 다쳤지."
“그래. 상처가 맞기는 하는데."
곧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해야 할지.
‘넘어져도 이것보다는 크게 다치겠는데.'
나스가 상처를 더 자세히 보란 듯 팔을 내밀었다.
"나도 플뢰르처럼 치료해 주지 않겠나?”
작게 까진 상처에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내 옆에 소파를 톡톡두드렸다.
"앉아 있어 봐. 구급상자 가져올게.”
내가 일어나려 하자 그가 한쪽에 준비되어 있는 구급상자를 들고 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자. 얼른 치료해 줘."
도대체 얘가 왜 이러는 걸까.
나는 상처를 치료해 주는 물약을 솜에 두들겨 부드럽게 상처를 닦아 주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플뢰르가 치료받는 모습을 보며 한심해 했으면서."
“그런 적 없는데.”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 듯 뻔뻔하게 꺼내는 말에 어이가 없어졌다.
주변에서 작게 생겨나는 던전에는 나스도 자주 갔지만, 플뢰르도 수련의 목적으로 함께 따라가고는 했다.
지난번 던전에서 방심하다가 플뢰르가 꽤 크게 다쳐와 놀라서 직접 치료를 해 주었다.
그때 계속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본 걸 내가 아는데 그런 적없다니.
플뢰르가 씩씩거리며 분한 것을 참지 못하고 수련의 강도를 높인 것도 저 때문인 걸 모르는 모습이었다.
'자기도 치료를 받고 싶었던 건가? 유치한데 귀엽네.'
왜 받고 싶어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작은 상처 위에 밴드까지 붙여주니 치료가 금방 끝이 났다.
치료가 끝이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스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도 다치면 치료해 줄 거지?”
"아니. 다음에는 다쳐서 돌아오면 안 보려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자 나스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다시 소매를 내렸다.
“알겠어. 안 다치고 조심히 돌아 오도록 하지.”
다짐하듯 꺼낸 말에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스는 바로 방을 빠져나가지 않고 내게 던전에서 본 것을 얘기해 주기 시작했다.
“던전이 작아서 몬스터가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안에 보물 상자가 있더군.”
“보물 상자?”
“검이 들어 있었어. 장식용이라 무기로는 못 쓰겠지만.”
“그리고 또?”
어느새 고롱고롱 잠든 키키의 머리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떼며 나 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스가 눈을 도르륵 굴리더니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외에 별다른 것은 없었나 보다.
“그래? 던전의 부산품은 어때?
좀 챙겨 왔어?”
"네 오빠들은 좋아했어."
“오히려 적게 가져왔다고 한 소리 들었구나?”
나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에 그럴 줄 알았다며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리카르다도 간다 할 때 같이 가지.”
"혼자가 편해. 따라오면 방해밖에 안 되니까.”
“쓸데없는 고집이야. 혼자서 모든 걸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 말에 나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를 한 번, 그리고 뒤에 있는 종이가 쌓여 있는 책상을 한 번 보더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는다.
"너도 혼자서 고생하고 있잖아?"
“특산품 이야기는 내가 먼저 꺼냈으니까. 내가 조사하는 게 맞지.”
잠깐, 그런데 우리의 대화가 언제부터 이렇게 편해진 걸까.
너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루어져서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다.
“그런데 너가 뭐야? 제대로 아가씨라고 불러야지. 오빠들 호칭도 마찬가지야.”
플뢰르도 크세스도 베네디토의 일원이 된 후 꼬박꼬박 호칭을 바꿔서 부르고 있는데..
다른 고용인들도 모두 마찬가지인데 아무리 편하다 한들 나스만 편애할 수는 없었다.
“도련님이라 불렀더니 둘이 질색 하던데…. 다프네 아가씨 이렇게 불러 줘?”
“…으음.”
왜 질색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호칭 자체가 좀 꺼림칙하게 느껴져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다른 이들 앞에는 잘 나서지 않으니까 괜찮겠지?
다른 직원들이 편애한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는데 나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해. 도와줄테니."
“호위만 열심히 해."
나는 키키를 소파에 아주 조심히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활발한 대낮이다 보니 여전히 밖은 시끌시끌 소란스러웠다.
나스가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밖을 힐긋 하고 내다보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하나로 묶여 있는 그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살랑하고 흔들렸다.
“생각보다 사람들 안색이 더 좋아졌더군.”
며칠 전보다 더 도시의 분위기가 좋아진 것 같다는 말에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엄마가 거의 물가의 반 이상을 낮출 줄은 몰랐는데 더 효과적이었어.”
엄마는 이왕 해야 한다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다며 파격적인 가격으로 물건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거의 3분의 2에 가까울 만큼의 가격이다 보니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있었다.
사재기하려는 사람도 있었고, 구매한 물건을 비싸게 팔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잡아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호의를 받은 마을 사람들이 직접 나서서 질서를 갖추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한 명이 나서기 시작하니 여러 사람이 나서 혼란스러움이 많이 가라앉았다.
현재 한 달 조금 지난 이 시점, 이 마을에는 꽤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값싼 생필품과 식료품의 가격 덕분에 살만해진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굶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졌다.
특산품을 판매하기 위한 배가 항구에 드나들면서 인력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도시에 활기가 차기 시작했다.
고작 한 달 만에 일어난 변화에 마을 사람들은 살 만해짐을 느끼고 있다나.
"다들 베네디토에게 감사한다고 말하고 다니던데.”
"겨울을 버틸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 감사하겠지. 베네디토는 정말 손해를 감수하고서 도전한 일인데 잘 풀려서 다행이고."
나스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많이들 웃고 다닌다. 처음 봤을 때랑 다르게.”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설핏 미소를 지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이곳을 도우려 하지?"
"그냥.”
별 이유 없다는 말에 나스가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약해지는 눈빛이었지만 꿋꿋이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별 이유가 없었다.
베네디토 상단이 정말 대륙에서 최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제일 첫 번째였다.
다시 말해 마케팅을 위해서 머리를 열심히 싸매고 나름대로 노력도 해본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하지 못한 이유는….
'친엄마의 고향이 이렇게 망가져가는 것을 보기 싫어.'
엄마의 유골이 묻힐 장소가 볼품이 없다면 실망도 크지 않겠는가.
적어도 아름답고 즐거움이 가득한 곳에 엄마의 유골을 묻어 주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시작인 거야. 겨울이 완전히 지나가고 봄이 오면 농사가 시작될 테니까.”
“상단이 더 바빠지겠군.”
"여기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로도 범위를 넓혀 가고 있으니까.”
내륙 안으로 들어갈수록 생각보다 더 어려운 마을의 사정에 곤란한 문제도 많이 생겼다 들었다.
“일단은 관리자를 보내서 확장하고 있지만, 나중에 들러 봐야겠지."
“나도 데려가.”
“엄마가 괜찮다고 한다면."
좋다고 미미하게 웃는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일이 늘어나는 게 그렇게 즐겁니?”
"네가 나도 모르게 혼자서 다치는 것보다는 나아.”
“플뢰르도 있어.”
“나쁘지 않은 실력이지만 못 미더워.”
단호한 평가에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일거리를 생각하니 저절로 피곤이 몰려와서일까?
하품이 나와 눈가에 대롱대롱 눈물이 고였다.
“피곤하면 조금 더 자는 게 어때? 무리하지 말고.”
나스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내었다.
"......?"
눈가에 닿는 손길에 깜짝 놀라 휙 고개를 돌려 놀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내 반응에 나스도 입을 벌리고 당황한 모습을 보여 주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제대로 짓지도 못해서 일그러진 것이 나보다 자기가 더 놀란 것 같이 보였다.
“만지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데?"
"아, 아니… 나도 모르게.”
"너 평소에도 이렇게… 여자들을 서슴없이 만지고 그러니?”
"아니야.”
억울한 목소리에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가오지 마.”
“오해하지 말고….”
“오빠가 서슴없이 만지는 남자들은 나쁜 놈들이랬어."
내 말에 나스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무어라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입만 뻐끔뻐끔했다.
'깜짝 놀랐네'
나는 눈물에 젖어 촉촉한 눈가를 닦고는 그를 의심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타고난 배려일지 아니면 의도가 있는 배려일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한 번 말했으니 다음에도 그러지는 않겠지.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려 했는데 쉽지가 않네.’
아직 나스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낸 바가 없었기에 마냥 가까이하기에는 조심스러웠다.
‘언제까지 옆에 둘 수 없으니 정보를 좀 얻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약해지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이게 뭐지?”
“응?”
그런데 갑자기 나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마치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듯 얼음처럼 굳어 버린 표정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억울해하며 무해한 표정을 짓던 녀석이 이렇게 차갑게 표정을 굳히는 것이 낯설었다.
내가 당황하는 사이 나스가 내 손을 잡아챘다.
‘아차..'
아뿔싸 하는 마음에 손을 움켜쥐려고 했지만 억지로 펴는 것이 더 빨랐다.
하얀 장갑 위로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내가 손을 빼려고 했지만 벌써 나스가 장갑을 벗기는 것이 더 빨랐다.
손바닥에 가득 잡힌 붉은 상처와 물집에 그의 표정에 냉기가 서렸다.
“누구야?"
"왜, 왜 그래?”
마치 이렇게 만든 사람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스물스물 올라온 살기는 덤이었다.
“응? 누가 이랬어, 다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