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나스의 행동에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확 빼내었다.
어찌나 세게 붙잡았는지 다친 손바닥보다 손목이 더 아플 지경이었다.
"뭐하자는 거야?”
"......."
차가운 내 목소리에 나스가 정신을 차린 듯 굳어 있는 손을 내렸다.
“미안하다.”
사과가 바로 나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한 기분이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다시 장갑을 끼기에는 늦었고, 말해 주지 않는 한 시선도 떨어질 것 같지 않아서 입을 열었다.
“요새 활을 배우고 있어. 연습하다 보니 생긴 거야.”
“무기를 든다고? 어째서?"
"오스왈드는 험한 곳이잖아. 스스로를 지킬 무기 정도는 들 수 있어야 하니까.”
내 말에 나스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플뢰르가 옆에 있을 텐데 굳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나?"
“스스로를 지킬 힘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나스는 마치 나를 말리려는 듯 말을 얹으려다 싸늘한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네가 돌아온 것도 들었고, 상처도 치료했으니까 인제 그만 돌아가 줬으면 해.”
“.…그래.”
나스는 미안했다며 다시 사과하고는 방을 나갔다.
나는 닫힌 방문을 빤히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다.'
어느 정도의 선을 유지해야 할지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마냥 옆에 두고 관찰하기에는 엄마가 다른 도시로 많이 내보내는 것 같고.
'사실은 이렇게 인사하러 올 필요도 없잖아.'
애초에 엄마가 고용한 직원이니까 나와 마주칠 일은 적어야 할 텐데.
외부로 출장 가듯 다른 도시를 다녀오면 꼭 이렇게 돌아와서 인사를 한다.
마치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나스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아무리 단기로 채용된 호위라지만 다른 직원들과 친하게 지내지도 않는 것 같고….
오히려 상사 격인 나랑 제일 친한 것도 이상했다.
‘머릿속을 열어서 볼 수만 있다면 보고 싶다.'
그만 한숨을 쉬자며 고개를 돌리 는데 책상 위에 올려진 피가 흐릿하게 묻은 장갑이 보였다.
'그렇게 많이 묻지도 않았는데.'
하필 오늘 하얀 장갑이어서 피가 비치다니.
무언가를 새로 배우는 것은 재미있지만 그 과정마저 모두 즐거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무엇보다 무기를 다룬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에 언제나 조심하려 하고는 있지만, 연습 도중 생기는 이런 상처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정말 모르겠다.”
나는 붉은 빛이 희미하게 맺힌 손바닥을 내려 보다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도 안 하고….”
손바닥은 언제 다쳤냐는 듯 아주 멀끔하게 치료가 되어 있었다.
나가기 전에 말도 없이 다친 손을 치료한 것이 분명했다.
“미안해지잖아.”
물론 나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화가 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진 손을 움직이며 복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스의 정체뿐만 아니라 속마음까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 * *
시간이 지나서 정말로 봄이 찾아왔다.
마을은 눈에 띄게 안정기를 찾았고, 기쁜 마음으로 새로운 계절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덕분일까 거리를 걷는 우리에게 향하는 시선에는 호의가 한가득하였다.
“어쩐지 시선들이 조금 부담스럽네.”
레녹스의 목소리에 리카르다가 그를 보며 킬킬 웃었다.
“형은 생각보다 주변 시선에 신경을 너무 써. 어차피 다들 호의적인데 왜 그렇게 눈치를 봐?"
“눈치를 보긴. 괜히 주변이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 그렇지."
레녹스의 말에 리카르다는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연금탑의 탑주가 되면 더한 시선도 받을 텐데 말이야.
뭐, 마탑 탑주 만큼은 못 하겠지만.”
“그래. 마탑의 차기 탑주께서는 이런 시선이 익숙해서 좋겠네. 아주 잘나셨어.”
투덜거리는 말에 비아냥이 어리자 리카르다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걱정돼서 그렇게 말한 건데 왜 말을 그딴식으로 해?"
“걱정은 무슨.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라. 그게 걱정하는 말투였는지."
두 사람이 갑자기 거리를 걷다 말고 멈추었다.
또 별것도 아닌 것으로 말다툼을 하는 것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나를 포함해 주변에 있는 마을 사람들도 혹은 간간이 보이는 베네디토의 직원들도 익숙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탑에 드나들고 나서부터 가끔 이렇게 별일도 아닌 거로 싸운단 말이야.'
마탑과 연금탑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은 들어봤었는데 그게 사이좋은 베네디토 형제에게까지 적용되는 줄은 몰랐다.
'심각하게 싸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작은 싸움이 큰 싸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니 조금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서로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이 다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이 몸을 움찔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탑에 드나들고 나서부터 오빠들은 맨날 싸우기만 하네. 오래간만에 셋이서 외출했는데도.”
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부터는 이렇게 보기도 힘든데 나만 아쉬운가 봐. 그렇지 키키?”
내 옆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있던 키키가 동의하듯 작은 울음을 내뱉었다.
나는 키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면서 키키에게 오빠들에게 속상한 점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탑에 들어가면 교육 때문에 몇 년 동안은 밖에 못 나올 것 같다 했으면서 마지막 날까지 싸워.”
끼이잉-
내 시무룩한 목소리에 키키가 안절부절못하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몸을 낮춰 키키에게 하소연을 이어갔다.
“마지막 기억까지 이렇게 싸우는 모습뿐이니 나는 정말 속상해.”
키키가 끼잉끼잉 하고 낮은 울음소리를 내더니 몸을 날려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악!"
제일 먼저 리카르다에 배를 향해 뛰어들더니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리카르다가 배를 부여잡고 아파 하자 레녹스가 자기도 모르게 웃었는데 곧 그 웃음이 강제로 멈춰졌다.
땅에 착지하자마자 다시 날 듯이 뛰어 레녹스의 가슴을 향해 몸을 날린 것이다.
“으윽.”
레녹스는 가슴에도 몸통 박치기를 당하고 꼬리로 머리도 한 대맞았다.
둘 다 몸통 박치기를 당한 부분을 감싸 쥐면서 앓는 소리를 내었다.
두 사람과 다르게 키키는 우아한 몸짓으로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는 도도하게 꼬리를 세우며 다가오는데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짝짝짝 박수를 쳐 주었다.
박수 소리 사이로 두 사람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면서도 맞은 부분을 감싸고 있었다.
평소처럼 애교가 아닌 진심으로 몸을 부딪쳤으니 아플 만도 했다.
“오빠들은 탑에 들어가면 오랫동안 나랑 못 만날 텐데 아쉽지도 않아?"
"아, 아니야. 다프네. 아쉽지."
레녹스가 나를 달래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내가 고개를 휙 돌렸다.
“거짓말. 아쉽다면 오늘까지 싸우지는 않았겠지.”
“미안해, 다프네. 그러니까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리카르다가 뒤늦게 변명을 하면서 사과했지만 나는 키키와 함께 두 사람을 쓱 지나치며 말했다.
“나만 아쉬웠고, 나만 슬펐던 거지 뭐. 두 사람은 계속 싸우느라 바쁠 것 같으니까 난 오늘 키키랑 놀게.”
그렇게 말하고는 새침하게 턱을 올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조금 전의 키키처럼 안절부절못하고 따라오는 것이 보였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탑에 들어가기 전부터 서로 견제하며 싸우면 나중에는 어떻게 하려고.’
안 그래도 엄마도 나도 이 부분에 대해서 걱정이 많았다.
마탑과 연금탑은 각자 마법과 연금술을 발달시키기 위해 많은 마법사와 연금술사들이 모인 곳이다.
던전이 자주 등장하는 오스왈드제국에 자리를 잡은 두 개의 탑은 서로를 라이벌처럼 여겨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다.
오스왈드에 입국하기 전까지는 가끔 들리는 정도였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탑주의 교육을 받기 위해 그곳에서 살게 된다 하였다.
'오스왈드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괜찮더니. 탑에서 무슨 소리 들을 들었으면 저러는 걸까.'
안 그러던 형제가 싸우니 걱정되는 것은 가족으로서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유치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의미 없이 싸우는 걸 줄여가면 좋을 텐데.
'아니, 형제가 각자 위대한 탑의 주인이 되는 건데 탑의 사이가 좋아져야지 왜 형제 사이가 나빠지는 거야?'
안 그래도 요새 마음이 싱숭생숭한데 오빠들마저 저러니.
“미안해, 다프네. 우리 인제 그만 싸울게. 응? 화 풀어 줘."
“진짜, 진짜로 그만 싸울게. 약속할게!”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외치는 말에 걷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미심쩍은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진짜?"
“그럼, 진짜지. 오빠들이 다프네에게 거짓말을 왜 하겠어.”
"맞아, 맞아.”
레녹스의 말에 리카르다가 맞장구를 쳤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했는데.”
"......."
지난번 싸웠을 때도 똑같이 했던 말이기에 고개를 저었다.
“난 더 이상 오빠들 못 믿겠어.
이래놓고 또 싸울 거잖아.”
키이-
키키가 맞장구쳐주듯 높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솔직히 오빠들이 탑에 안 갔으면 좋겠어. 탑에 드나들고 나서부터 매일매일 싸우기만 하니까."
내 말에 두 사람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너무 자주 싸워서 제대로 자각도 하지 못했나 보다.
“탑끼리 사이가 안 좋다고 오빠들도 사이가 안 좋을 필요는 없잖아."
서운함이 가득한 목소리에 두 사람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보다 어린애들도 아니면서.”
투덜투덜하며 말을 덧붙이자 두 사람이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네. 탑에 드나들고 나서부터 좀 많이 싸우기는 했네."
“생각해 보면 진짜 별것 아닌 일인데.”
레녹스랑 리카르다가 서로를 바라보며 민망한 듯 어색히 머리를 긁적였다.
"오빠들이 진짜로 서로를 싫어하게 되면 난 그 누구의 편도 못 들어. 둘 다 소중하니까.”
내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와락 안아 들었다.
"내려 줘. 나 아직 화났어.”
조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담담하게 말하자 두 사람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오빠들이 어떻게 하면 다프네 화가 풀릴까?”
"맛있는 걸 먹으러 갈까? 아니면 조금 멀리 나가 산책을 하고 올까?”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나를 어화둥둥 계속 달래기 시작했다.
"응?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다프네가 믿어 주려나?"
“다프네가 말하는 거 다 들어줄게. 말만 해.”
레녹스와 리카르다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두 사람을 힐긋 바라보았다.
눈빛이 와 닿자 두 사람이 어서 말해달라는 듯 눈을 반짝인다.
그래서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