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어머니. 요새 매일 싸우고 다녀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탑 문제로 서로 비아냥거리지 않을게요.”
엄마는 집무실에서 일하다가 잘못 들었다는 듯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서 들지 않자 뒤에 있는 나를 보며 입 모양으로 물었다.
'이 둘이 왜 이러니? 미친 거니?'
하긴 요새 매번 싸우던 두 사람이 동시에 이런 모습을 보여 주니 어리둥절하실 만도 했다.
나는 검지로 나를 가리킨 뒤 양손을 머리 쪽으로 가져가 뿔 모양을 만들었다.
화났다는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짓자 엄마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엄마는 눈치가 빨랐다.
"매일 싸워서 탑에 들어가고는 다시는 안 볼 사이가 될 것 같더니.”
엄마의 말에 두 사람이 찔끔하고 잘못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럴게요.”
“저희가 너무 유치했어요. 죄송해요.”
두 사람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엄마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둘에게 물었다.
“내게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사과를 하니. 됐다."
날이 선 말에 두 사람이 울망울망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 상황에서 훈훈하게 끝날 수 있게 바람직한 말을 해 줄까,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솔직한 말을 해 줄까?"
엄마는 두 사람에게 두 개의 선택지를 던져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말이요.”
두 사람의 대답에 엄마는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눈꼬리까지 부드럽게 접고는 빙긋 웃었다.
"마탑과 연금탑 싸움이 형제 싸움이 되면 그날로 엄마랑 동생 볼 생각들은 접고 살아야 할 거다."
하지만 표정과 다르게 나온 말은 무서울 정도로 싸늘했고, 가족을 아끼는 두 사람은 긴장된 얼굴로 필사적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한 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그래, 잘 알았으면 됐다.”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반응에 엄마는 피식 웃더니 나를 불렀다.
내가 쪼르르 다가가 엄마를 꼭 끌어안자 이마에 부딪히는 뽀뽀가 돌아왔다.
"오늘은 이만 퇴근하고, 가족들 끼리의 시간을 보내자꾸나.”
* * *
오래간만에 가족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요즈음 가진 고민을 날려 버릴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 함께 항구 근처 모래사장에서 산책도 하고, 바다 근처에 자리 잡은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었다.
레녹스와 리카르다도 다투는 모습 하나 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평화로운 형제의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고, 헤어짐을 앞둔 것을 제외하면 완벽한 하루였다.
'내일이면 두 사람도 몇 년 동안은 보기 힘들겠지.'
군식구와 다름없는 나를 진짜 동생으로 받아들여 주고, 가족이 되어 준 소중한 오빠들인데.
잠시 떨어진 적은 있어도 이렇게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적은 없었기에 우울함이 몰려왔다.
'잠이 안 오네.'
침대 위를 뒤척여 보았지만, 생각이 많아졌기 때문인지 잠이 잘오지 않았다.
'따뜻한 우유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
자는 키키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나 침대에서 벗어났고, 무사히 방에서 빠져나왔다.
소리 나지 않게 무사히 닫힌 문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래층에 있는 거실로 내려갔다.
거실로 내려오니 소파에는 선객이 있었다.
“다프네, 안 잤어?”
레녹스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겨 주었다.
"어라? 다프네 아직도 안 잔 거야?”
혼자가 아니었는지 리카르다가 주방 쪽에서 걸어 나왔다.
손에 들린 머그잔에서 따뜻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니 두 사람도 잠이 안 와서 나왔나 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 옆에 앉았다.
“잠이 안 와.”
“왜 잠이 안 올까?"
“오빠들이 가는 게 서운해서.”
빠르게 흘러나온 대답에 두 사람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빠들이 가는 게 많이 서운해?
그냥 가지 말까?”
"아니, 그건 아니야.”
리카르다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레녹스가 우리 두 사람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불 꺼진 깜깜한 거실을 밝혀 주는 것은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빛이 유일했는데 고요한 새벽과 참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흐릿한 불빛 너머로 두 사람이 웃는 것이 보였다.
내일부터는 보기 힘든 웃음이니 머릿속에 잘 담아 두어야겠다.
"다프네.”
“응.”
한참 두 사람을 눈에 담는데 레녹스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살짝 돌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레녹스와 눈을 마주쳤다.
“오스왈드 생활은 어때? 괜찮아?”
“응. 좋아.”
그동안 탑에 들어갈 준비를 하느라 바쁜 두 사람이었기에 이런 대화도 오래간만에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느새 리카르다가 가져다준 우유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를 따라서 많은 것을 배워 볼 수 있어서 좋고, 플뢰르도 크세스도 옆에 있어서 무서운 일도 없어.”
“그래?"
"응. 다행히 상단도 이름을 널리 알려서 큰 도시까지 소문도 났다고 하고….”
“그리고?”
이번에는 리카르다가 물었다.
무언가 더 있던가?
"아! 요새 키키가 너무 무거워져서 안고 다니기가 힘들어. 성장이 늦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건강히 잘 크고 있는 것 같아.”
몇 년 동안 몸이 잘 커지지 않아 걱정이 많았는데 요새 쑥쑥 자라나서 어른 여우의 모습이 멋지게 잘 어울렸다.
“아기 키키도 귀엽지만 다 자란 키키도 귀여워.”
지금은 내 침대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아 자는 키키를 떠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그럼 나스는?”
나스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두 사람이 왜 이런 걸 물어봤는지 알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라그나르랑 똑 닮은 얼굴이니 걱정이 많았겠지.
라그나르 때처럼 옆에 두고서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른 직원들에 비해 자주 만나기는 했으니까.
“…사실 처음에는 라그나르가 살아서 돌아온 줄 알았어.”
조용한 내 말에 두 사람이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외모는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같이 생겼고,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점도 닮았고, 키키도 이상할 정도로 좋아하니까.”
“잠깐. 걔가 다정하다고?"
내 말에 리카르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안경알 너머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이 훤히 보여 오히려 내가 질문했다.
"다정하잖아?”
"어디가?"
“으음.”
레녹스 또한 리카르다의 의견과 같은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두 사람의 반응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일단 처음 보는 내게 선뜻 도움을 내민 것도 그렇고, 내가 다칠까 봐 위험한 일은 대신해 주려 하기도 하고."
두 사람이 더 해 보라는 듯 나를 빤히 쳐다봤다.
“무거운 물건을 들기라도 하면 어디선가 나타나서 그걸 들어주고는 조용히 사라져.”
“뭐?”
“그리고 내가 피곤한 날에 말도안 했는데 대신 키키랑 산책하고와.”
“허?”
리카르다가 짜증 냈고, 레녹스도 한쪽 눈썹을 까딱 올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걔가 그걸 어떻게 알고?"
"따라다니는 건가?"
두 사람의 의심이 가득한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음침한 애는 아니야.”
"모르는 거지.”
리카르다가 진지한 목소리로 단호히 말했다.
"마법도 검술도 꽤 실력이 있는 녀석이야. 작정하고 숨어서 쫓아다니면 모를 수도 있어."
“그럴지도 몰라서 물어봤더니 그런 짓은 안 한대."
“그걸 어떻게 믿어?"
"거짓말을 하는 애는 아닌걸."
내 말에 리카르다가 답답하다는 듯 자기 가슴을 콩콩 내리쳤다.
“다프네. 네가 나스에게 유독 마음이 약해지고, 부드럽게 대하는 것 알고 있어.”
답답해하는 리카르다를 대신하여 레녹스가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런 생각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말도 안 되는 상상임에도 레녹스는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우리도 처음에 그런 생각을 했었으니까. 하지만 대화를 해 보고 생각을 정리했어. 라그나르는 그렇게 싸가지 없는 애가 아니었으니 그럴 리 없다고 결론 내렸지.”
하지만 웃는 것과 다르게 입에서 나온 평가는 가차 없었다.
“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드래곤에 관련한 책을 읽는 것도 알고 있었고."
"으응.”
바쁜 와중에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은 어떻게 본 거람.
“네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야. 탓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울상 짓자 레녹스가 옆으로 다가와서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사실 우리는 아무리 단기 계약이라 해도 나스를 고용하는 건 반대였어.”
“우리도 보고 깜짝 놀랐으니까.
다프네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고.”
레녹스의 설명에 리카르다가 투덜거리며 맞장구쳤다.
"어머니가 왜 나스의 제안을 받아 줬는지 알고 있어?"
물어본 적이 없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나스를 만난 뒤로 자주 웃었대.”
"내가 그랬어?”
"어머니는 네가 나스를 보면서 라그나르와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셨어.”
레녹스는 언제나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위로해주기 시작했다.
“라그나르와 슬픈 이별을 했지만 그래도 소중한 친구였으니 잊어버리지 않기를 바라셨나 봐.”
"......."
라그나르가 그렇게 죽고 그 후로 단 한 번도 라그나르의 이름을 담아 본 적이 없었다.
잘 잊고 괜찮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었으니까.
“소중한 추억이고, 제일가는 친구였으니까. 좋은 기억마저 모두 잊어버릴까 봐 그러셨대.”
“몰랐어.”
"우리도 처음에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네가 황태자에게 답장을 보낸 것을 보고 나서.”
확실히 나스의 조언이 아니었다.
면 시몬에게 답장을 보내기 힘들었을 거다.
아마 지금까지도 못 보내고 공공앓고 있었겠지.
레녹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나스가 왜 오스왈드에 오려고 했는지는 알고 있지?"
“응.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보살펴 준 대부를 찾으러 온 거라고 들었어.”
내 대답에 레녹스가 바로 말을 이어갔다.
“나스가 라그나르와 똑 닮은 외모지만 머리도 눈도 다른 색을 갖고 있어. 무엇보다 동공의 모양도 그렇고.”
레녹스의 조곤조곤하게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어린 시절의 기억도 있는 것 같고, 자기 나이도 잘 알고 있고, 또 마법도 쓰지. 가족도 있고 말이야.”
레녹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것 같다.
“비슷한 점만큼 이렇게 다른 점도 많아.”
"알고 있어. 다른 사람이라는 게 더 말이 된다는 사실 정도는."
내 시무룩한 목소리에 레녹스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네가 궁금한 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스스로 찾아보는 것에 대해서 말리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다프네, 라그나르는 죽었잖아.”
리카르다도 내 옆자리로 넘어와 앉더니 레녹스를 따라 나를 끌어 안아 주었다.
“다프네. 나스를 보면 마음이 복잡하지? 매번 라그나르인지 아닌지 의심하게 되고, 아니라고 하면 실망하게 되고.”
리카르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워서 그런 거야. 네 마음과 다르게 나스가 라그나르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많이 보이니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 혼란스러움이 나중에 너를 잡아먹어 더 깊은 어둠으로 끌어 들일까 봐 그게 너무 걱정돼."
내가 나스 일로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구나.
“지금 와서 후회하기는 너무 늦었지만, 우리가 너무 경솔했어.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좋게 변한다고만 생각했으니까.”
이 뒤를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네가 더는 헛된 희망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니 우리랑 약속해 줄래?”
레녹스의 다정한 말이 오늘따라 독처럼 따가웠다.
"더는 나스를 신경 쓰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