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항구 도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곳도 꽤 활발한 곳 같습니다!”
밝은 플뢰르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에 날릴 뻔한 모자를 잡고서 넓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가씨와 함께 이렇게 다른 도시로 나오니 좋군요. 날씨도 아주 따스해진 것 같고 상단도 점점 더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플뢰르의 자부심이 가득한 목소리에 다프네가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들께서도 각각 탑에 들어 가셨으니. 앞으로 잘 될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좋겠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각자의 탑으로 떠난 두 오빠를 떠올리며 웃었다.
“레녹스가 있는 연금탑은 북부지방에 있고, 리카르다가 있는 마탑은 남부 지방에 있으니 나중에 놀러 가 보자.”
"네!"
여행이라 생각했는지 플뢰르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활기찬 미소에 나까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외국에서 건너온 상단의 도움 덕에 굶어 죽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이 제국에 파다했다.
어느새 여러 도시로 베네디토 상단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다른 지역까지 상단을 확장하다 보니 생각보다 더 빠르게 상단의 이름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먼 도시에서까지 손님들이 찾아올 정도라고 하니 하루가 마를 새없이 바쁜 나날이 연속이었다.
“덕분에 다른 상단에서 시비를 많이 건다던데."
지금 방문한 도시가 그중 하나였다.
'커티스 상단이었나?'
다른 상단이 견제할 정도로 커졌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으나 지속해서 시비가 걸린다면 그에 따른 대처를 해야 했다.
“대상단으로 오르면 가볍게 누를 수 있을 텐데.”
시비를 거는 이유도 외국 상단이 시장 경제를 다 망친다는 이유니까 대상단으로만 오른다면 그 이유로 입도 뻥긋하지 못할 것이다.
“클레멘스에서 쉽게 해 줄 리는 없겠지만.”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자본도 유명세도 충분하겠지만, 본국에서 허락해 주는 일은 희박하다고 보면 된다.
혼자 중얼거린 것이라며 말을 돌리다가 뒤에 서 따라오고 있는 나 스와 눈이 마주쳤다.
"........"
시비가 많이 일어나는 도시다 보니 엄마가 데리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해서 함께 외출한 것이기는 한데….
지난번 일 이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여간 마음이 불편한 게 아니다.
“아가씨. 나스와 싸우셨나요?”
플뢰르가 소곤소곤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싸울 것도 없어.”
“어떤 일이든 저놈이 잘못했겠지요.”
플뢰르의 박대한 평가에도 나스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과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저런 모습이었으니 다정하고 착한 레녹스도 싸가지 없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곳인 것 같습니다!"
플뢰르가 한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엄청나네.”
멀리서도 보이는 많은 인파에 발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나 꼭 이렇게 사람이 모이면 문제가 생긴다고 했으니.
“어이! 이놈들아! 남의 나라에서 장사 망치지 말고 꺼져!"
그래, 바로 이렇게 말이다.
갑자기 등장한 건장한 사내들이 앞에 쌓여 있는 상자들을 집어 던졌다.
나무 상자가 큰 소리를 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과일이 들어있던 상자였는지 그 안에서 나온 사과들이 밟혀 부서 지기도 하고, 땅에 이리저리 구르기 시작했다.
나는 내 앞까지 내려온 사과 하나를 주어 들고는 그들이 하는 꼴을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다 썩 꺼져! 이 버러지 같은 놈들! 감히 제국의 상단을 이용하지 않고 뭐하는 짓이야?”
“그래서 너희 같은 놈들이 매번 굶을 수밖에 없는 거야!"
자기들끼리 모여 있는 주민들을 욕하며 깎아내리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보려 노력해도 흉했다.
상단의 직원들이 말리기 위해 나서려고 했지만, 무기를 들고서 위협하는 모습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억울하면 네놈들 같은 직원 말고 책임자 나오라 해!"
과연, 이렇게 억지를 부리니 직원들이 방문을 부탁한 거구나.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놈이 망치를 휘두르며 외치는 모습에 피식 웃으며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이봐요, 아가씨. 위험해요.”
“이리로 와요.”
우리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말려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들의 걱정에 괜찮다는 듯 가볍게 웃어 주고는 망설임 없이 책임자를 불러오라고 말한 남자 앞에 섰다.
“넌 또 뭐야?”
짙은 갈색 머리에 사나운 눈매를 하는 건장한 사내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책임자를 찾으셨잖아요? 이 상단의 책임자입니다.”
“뭐?”
사내가 불쾌한 농담이라도 들은 듯 미간을 팍 찌푸렸다.
"뭐라고 헛소리를 하는 거야?
야, 일하는 거 방해하지 말고 다치기 전에 꺼져.”
상스러운 말에 플뢰르가 검으로 손을 옮겼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에 앞에 있는 사내가 놀란 듯 움찔하며 다시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다프네 베네디토라고 합니다.
이 상단의 후계자, 그쪽들이 찾는 이곳의 책임자라고요. 자, 그래서 그쪽 이름은?”
“뭐? 뭐라고?”
내 이름을 들은 사내가 잘 못 들었다는 듯 다시 물어왔다.
“그쪽 이름과 소속을 알려 주셔야겠습니다.”
“뭐야? 이 계집애가 뭐라는 거냐? 응? 자기가 상단의 후계자란다."
사내가 낄낄거리며 나를 비웃기 시작했다.
“하. 어쩐지. 계집애가 하는 일이다 이렇지. 어디서 배운 상도덕인지 모르지만, 이딴 식으로 장사하면 안 되지!”
“이름과 소속 물었습니다.”
내 말에 사내가 비웃음을 가득 담아 내 앞으로 건들건들 걸어왔다.
바로 앞에 서서 마치 위협이라도 하듯 인상을 찌푸리며 바라보는 것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어? 웃어어?”
사내가 말을 늘리면서 열 받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럼 웃기지 않니?"
"하. 뭐가 웃기는데? 어? 뭐가 웃기는데?”
“목소리만 크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머리를 가진 놈이 상단의 직원이라는 게 웃기 다고.”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사내를 동조하듯 같이 욕지거리를 내뱉던 뒤에 있던 남자들도, 안절부절못하는 다른 직원들도.
그리고 구경하는 사람들마저 놀라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순식간에 주변이 싸늘해졌다.
“뭐, 뭐.”
사내가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충격 받은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자기를 가리켰다.
“지금 나 말하는 거냐?"
“그 정도 머리는 있나 보네.”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에 사내가 얼굴을 붉히더니 언성을 높이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조금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흠. 무슨 일이냐.”
“도, 도련님!”
화려한 의복을 입은 조금 야비하게 생긴 내 동년배 정도로 보이는 남자애가 슬금슬금 앞으로 다가왔다.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지 몰라도 난리를 친 놈들이 깍듯하게 대하는 것을 보니 같은 일행인 것이 안 봐도 뻔했다.
'뒤에 숨어 있다가 일이 커질 것 같으니 나오는 건가. 야비하긴.’
“아니, 저희가….”
사내가 무어라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그때 이번에는 내가 그의 말을 막았다.
“이 사람들의 고용주 되나요?"
"흠. 그런데?”
“그래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아담 커티스라고 한다만."
‘역시 예상대로 커티스 상단의 짓이었구나.'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이렇게 당당히 이름을 밝히는지 모르겠다.
나는 덜덜 떨고 있는 직원을 이리로 불렀다.
“기록한 장부 주세요."
“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지 아담은 실실 웃으며 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네가 베네디토 상단의 후계자인가 보네? 여자라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예쁠 줄은 몰랐는데.”
아담의 말에 눈을 마주치고는 빙긋 웃었다.
내 웃음에 아담이 히죽 웃으며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곧 그 웃음이 사라졌다.
“나도 커티스 상단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들어봤지만 이렇게 머리가 텅텅 빈 놈인 줄 몰랐는데.”
“…뭐?”
“목소리만 큰 직원들을 써서 귀가 많이 안 좋아졌니? 몇 번을 말해 줘야 알아듣는지 모르겠네.”
아담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해갔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듯 부들부들 떠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장부를 펼쳤다.
“밀가루 50포대, 양배추 20상자, 당근 30상자, 감자 30상자, 그리고 소금과 설탕 각각 백 포대."
“뭐, 뭐를 말하는 거냐?"
“지속적인 업무 방해와 협박, 그로 인한 직원들의 과도한 스트레스와 피해. 지속적인 항의에도 뻔뻔한 무대응.”
하나하나 읊어 주는 지난 일주일간의 기록에 아담이 헛기침을 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듣고도 모르겠니? 상황 파악이 안 돼?”
아담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커티스 상단 직원들이 베네디토 상단의 사유재산을 멋대로 훼손하고, 지속적인 피해를 준 기록인데?”
“우리는 모르는 일인데?"
뻔뻔하게 모른 척하려는 것인지 그가 팔짱을 끼고서는 당당히 턱을 올리며 말했다.
“오늘 일은 작은 사고인 것 같으니 이에 대해서는 나도 사과하지.
리 쪽은 모르는 일이야."
하지만 지난 기록에 대해서는 우
"발뺌한다고 했던 일이 없어지지는 않을 텐데? 정식으로 소송을 걸어야 정신을 차릴까?”
“증거는 있고? 증거도 없으면서 몰아가려고 하지 마. 장사가 좀 된다고 기세등등해서는, 천박하게 협박이라니.”
혀를 차는 소리에 스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스가 검을 빼어 들고서 아담의 목에 겨눈 것이다.
“히익!”
"이 새끼가!”
나를 비웃던 사내가 망치를 들고 덤비기도 전에 플뢰르가 검을 뽑아 드는 게 빨랐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목 앞에 검날이 반짝하고 빛이 나자 그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상태로 굳어 버렸다.
“뭐, 뭐 하는 거냐. 감히 커티스상단의 후계자를 건드려 놓고 무사할 줄 알아?"
“그럼 베네디토 상단의 후계자를 모욕하고, 장사 자체를 방해했는데 무사히 넘어갈 줄 알았나?”
아담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면서 직원이 건네주는 물건을 받아들였다.
"네가 지난 일주일 동안 우리 상단의 업무를 방해한 장면이 모두 담긴 마도구야.”
"뭐, 뭐?"
“정중하게 커티스 상단에 요청했지만, 중재가 되지도 않고, 이에 따른 사과도 없었으니 우리 쪽도 어쩔 수 없겠더라고.”
꽤 기회를 많이 준 것 같은데 스스로 들어온 기회를 발로 찼으니 어쩌겠나.
“우리 상단이 비록 싼값에 물건을 팔아 치웠다지만 법에 문제가 되지는 않아. 같은 업계에서 조금 야비하다는 소리 듣고 말겠지."
아담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마도구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그런데 커티스 상단이 한 짓은 아니잖아. 베네디토도 오스왈드지점은 엄연한 오스왈드의 상인 연합 소속이거든.”
"뭐, 뭐 언제?”
“이제 상황이 좀 심각한 것 같니? 이제야?”
평온하게 나오는 내 목소리에 아담이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상인 연합에 소속되어 있는 커티스 상단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
연합 소속 상단을 공격하면 대상단으로 올라갈 기회가 박탈당하는것.”
그 말이 끝나자 저 멀리 경비대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뭐, 뭐야. 경비대가 왜 여기에….”
“그렇게 소란을 피웠는데 안 오는 게 이상하지. 왜? 뇌물이라도 줬니? 이것도 함께 고발해야 하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경비대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아담이 필사적이게 외쳤다.
“서, 설마 신고하려는 건 아니지? 연합에 항의할 건 아니지?
같은 상인이라면 얼마나 큰 페널티인지 알잖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소를 짓자 아담이 간절하게 부탁했다.
“하, 한 번만 봐줄래? 사과할 테니까 한 번만 봐줘. 응? 그래 주게, 부탁이야!”
저 모습이 강요지 어떻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일까..
나는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지운 채 딱딱한 표정으로 경비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자, 잠시만! 내가 어떻게 해야 이걸 넘어가 줄래? 응? 알려 주면 다 할게! 들키면 난 아버지께 쫓겨난다고! 그러니까 제발!”
아무래도 단독적으로 벌인 일이었나 보다.
나는 애걸복걸 요청하는 아담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에 아담도 따라서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웃으니 봐줄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딜 감히 쉽게 넘어가려 해?'
싱긋 웃은 미소와 다르게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면 당장 이곳에서 무릎 꿇고 사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