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내 말이 끝나자 주변에 정적이 찾아왔다.
아담은 차마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는 듯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지, 진심이야?”
"나는 누구와 다르게 입에 거짓말을 담지 않아.”
아담은 안절부절못하더니 주변을 둘러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절대 못 해! 안 해!"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나는 그를 지나쳐 경비대들이 있는 방향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아담이 내 옷자락을 붙들었다.
“자, 잠시만. 아니야, 할게. 하면 되잖아.”
경비대들이 가까워지니 초조한 모양이었다.
나는 턱을 까딱하고 움직였다.
“해 봐.”
아담의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어, 업무를 방해해서 미안해. 다시는 이런 일 없을 테니까 그만 화를 풀어 줘.”
무릎이 땅에 닿자 그가 나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을 보며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뒤쪽을 향해 말했다.
“너희는 뭐하니? 안 해?"
내 말에 조금 전까지 이곳에서 난장판을 피우던 사내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무릎을 꿇고 싶지 않은지 몸을 사리는 것이 보였다.
"너희가 망설일수록 주인이 무릎꿇는 시간이 더 길어질 텐데.”
내 말에 아담이 뒤에 있는 부하들을 흘겨보았고, 그들은 재빠르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아 어지간히 자존심이 꺾였을 것이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얼굴 붉힐일 없으면 좋겠다.”
내 말이 끝나자 어느새 도착한 경비대가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조금 다툼이 있었는데 조금 전에 사과를 받았습니다.”
경비대원은 무릎 꿇은 아담과 그의 부하들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보다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큰 소란은 삼가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얼추 상황이 끝났기에 경비 대원들은 그렇게 떠났다.
“그쪽도 그만 일어나지."
"일어나도 되는 건가?"
아담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에 쥐가 났는지 그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과했으니 증거물을 지워 줬으면 하는데….”
“개인적인 사과를 받았지만 상단을 통한 사과는 아직이잖아?”
나는 들고 있는 피해 장부를 넘겨주며 말했다.
“상단을 통한 정식적인 사과와 피해 금액의 열 배를 보상으로 주면 지워 주지.”
“뭐? 얘기가 다르잖아! 내가 사과만 하면 지워 준다면서!”
"난 지워 준다는 말 한 적 없어.
죄송하다고 생각하면 사과하라고 했지.”
아담이 열이 받은 얼굴로 꽉 소리를 질렀다.
“이 거짓말쟁이!”
“처음부터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되는 일이었잖아?"
유치한 말싸움에 더는 어울려 줄시간 따위 없었다.
“나는 피해 보상에 대해서 확실하게 전달했어. 이제 장사 방해하지 말고 좀 가주겠니?"
아담은 화를 참지 못하고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이내 부하들을 이끌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이제 귀찮은 일은 없겠네요."
나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직원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 그렇겠네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커티스 상단에서 사람이 오면 내쪽으로 보내요.”
"예! 알겠습니다!”
직원은 경쾌한 목소리로 답하며 건너편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에서 머무르시면 됩니다!"
“고마워.”
친절한 안내에 미소를 짓고서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움직이자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비켜서 주었다.
덕분에 무사히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다.
"건방진 놈들이네요. 끝까지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들어오자마자 플뢰르가 혀를 차며 아담 무리를 욕했다.
“그래도 자존심이 꺾였으니 오늘과 같은 일은 더는 일어나지 않을 거야.”
“어쩐지 너무 빨리 조용해진다 싶더라니. 아가씨께서 직접 나셨군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윈스턴, 오래간만이야.”
“저 윈스턴 오래간만에 아가씨를 뵙습니다.”
“먼저 오스왈드에 입국했다더니.
이제야 만나게 되었네.”
“그러게 말입니다. 아가씨가 보고 싶어 혼쭐이 낫지 뭡니까.”
장난스러운 인사에 내가 미소를 짓자 그가 뒤에 있는 나스와 플뢰르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이곳에서 집사 겸 비서로 일을 돕게 된 윈스턴이라고 합니다.”
"아, 플뢰르라고 합니다.”
“나스입니다.”
윈스턴은 나스와 플뢰르를 번갈아 보더니 힘차게 악수를 했다.
* * *
나스와 플뢰르를 뒤로 한 채 위층에 있는 내 방으로 올라왔다.
단정한 가구들로 꾸며진 방 옆에는 집무실로 이용할 공간도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오래 있지도 않을 텐데 준비 많이 했네.”
“언제 어디서나 최고로 모셔야죠.”
윈스턴이 찡긋하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의 웃음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건너편에 있는 상가는 방해받는 일이 없자 손님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것이 보였다.
내가 조용히 밖을 바라보고 있자 잠자코 지켜보던 윈스턴이 입을 열었다.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다시 오브리로 가셔도 괜찮으셨을 텐데. 몬트에 머무시는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그냥. 새로운 도시에 와 보고 싶었어.”
“그렇군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뒤쪽에 있는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살랑이는 따뜻한 바람이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와 머리카락이 가볍게 휘날렸다.
그 기분 좋은 바람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 대상단 건은 어떨 것 같아?"
“요청은 했지만 클레멘스에서 허락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윈스턴의 아쉬운 목소리에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대상단이 된다면 황실에 납품하기가 더 쉬워질 테니까. 우선 조금 기다려 봐야지. 자본은 충분하니까 승인만 떨어지면 되는데.”
그 말을 마치고서 창밖을 보다가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 따로 건물 뒤쪽에 연무장을 만들어 놓았다면서?”
“요새 활을 배우신다고 들어서 준비해 놨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건물이 큰 덕분인지 준비된 연무장은 꽤나 넓었다.
“훌륭하네.”
활과 화살, 과녁 그리고 검술 연습에 쓰이는 인형 등 짧은 시간 안에 준비된 것 치고는 굉장히 훌륭했다.
나는 과녁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 활을 만지며 천천히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때 윈스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같이 온 호위 중 나스라는 사내말입니다….”
“아, 놀랐지? 너무 라그나르를 닮아서?”
내 목소리에 떨림이 없자 윈스턴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예. 정말 많이 닮았더군요."
“라그나르를 아는 사람들은 다들 놀라더라고."
윈스턴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나스 때문에 라그나르를 떠올려서 슬퍼할까 봐 걱정돼?"
"예. 조금… 아니 많이 걱정되네요.”
윈스턴다운 솔직한 말에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에는 조금 혼란스러웠는데 괜찮아. 언제까지 라그나르를 묻어둔 채 살 수도 없는 거잖아.”
걱정스러운 시선이 닿는 것을 느꼈으나 내색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나는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손을 내려다보다가 윈스턴을 향해 몸을 돌렸다.
“좋은 추억도 많았으니까 잊지 말아야지.”
“하지만…."
윈스턴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프네, 여기 있나?”
"나스? 무슨 일이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윈스턴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가면을 씌운 듯 익숙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제가 자리를 피해 드릴까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나스는 윈스턴을 한 번 보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이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윈스턴을 향해 말했다.
“잠시 둘이서 이야기 좀 할게.”
내 말에 윈스턴은 고개를 꾸벅이면서도 나스를 향한 의심스러운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떠나기 전 나는 하지 못한 말이 떠올라 그를 불러 세웠다.
“윈스턴.”
“예, 아가씨.”
"나 정말 괜찮아. 그러니까 엄마한테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줘.”
윈스턴이 멈칫하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 떼기는. 윈스턴이 당장 오브리에 안 가고 몬트로 온 거보면 뻔하지. 엄마가 내가 걱정된다고 윈스턴을 보낸 거잖아?"
“금방 알아차리셨네요."
“오빠들도 탑에 들어갔고, 호위가 있다고 해도 혼자 떠나는 걸 걱정하시는 것 같았어.”
내 말에 윈스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때문에 괜히 몬트에 온 것 아냐? 급한 일 있으면 엄마한테 가도 되는데.”
“상단주 님께서 얼른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몬트로 가라고 어찌나 성화였는지 모릅니다.”
윈스턴이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도 웃었다.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달려온 것이니 쉽게 내치지 말아 주세요."
“물론이지.”
“상단주 님께는 걱정하지 마시라고 확실하게 전하겠습니다.”
윈스턴은 다시 인사를 하고서 자리를 떠났다.
연무장은 다시 조용해졌고, 나스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지난번에….”
“지난번에?”
“화를 낸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뜬금없는 말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상처를 보고 화내더니 멋대로 상처 치료해 주고 간 날 말이야?”
"응. 그날."
“사과했잖아. 화 안 났어.”
"자꾸 시선을 피했잖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오빠들이 남기고 간 말 때문에 나도 모르게 조금 거리를 뒀었나 보다.
'나스를 신경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었지.'
나는 지난밤 내 대답에 놀란 두 사람의 표정을 떠올리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 그건 못하겠어.'
'뭐? 왜?'
'계속 신경 쓰이는 이유를 찾고 싶거든. 대신 상처 받지 않도록 노력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 대답에 오빠들이 나를 껴안고서 떠나기 싫다고 울었었지.
짧은 회상을 마치고서 나스에게 말했다.
“착각이겠지.”
“삐졌니?”
“아니.”
나스가 빠르고 단호하게 답하는 것에 피식 웃었다.
“좋아. 그럼 우리 화해한 거야."
내 대답에 나스가 멈칫하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