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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92화 (91/185)

제92화.

나스가 꺼낸 것은 작은 상자였다.

“화해 기념 선물."

아무렇지 않은 척 꺼낸 것 같지만 목소리가 밝아져 있었다.

화해해서 기분이 나아졌나 보다.

나는 나스의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선물 상자를 받았다.

“선물? 열어 봐도 돼?”

“응.”

나스가 흔쾌히 답을 하여서 상자를 열어 보았다.

예쁘게 포장된 상자 안에는 장갑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장갑이야.”

“장갑인 건 나도 알아."

검은색 장갑은 보통 장갑과 조금 달라 보였다.

'반짝이는 것 같은데?'

평범한 소재로 만들어진 게 아닌지 빛에 반사되었을 때 광물처럼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던전 부산물로 만든 걸까?'

장갑이 뚫릴 기세로 노려보다가 눈을 굴려 나스를 몰래 바라봤다.

나스는 괜히 다른 곳을 보면서 딴청 피우는 척을 하고 있었다.

'부끄러워하는 건가?'

나는 장갑을 만지작거리다가 나 스에게 물었다.

“지금 껴 볼까, 나중에 껴 볼까?”

“…지금.”

너무 작은 목소리여서 안 들릴 뻔했다.

역시 부끄러워하는 게 맞나 보다.

여우 인형을 선물해 줄 때는 여유 있게 인형극까지 했으면서 장갑 선물은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건지.

딱히 물어볼 생각은 없었기에 장갑을 천천히 껴 봤다.

'어라?'

조금 크지 않을까 싶었던 장갑이 내 손에 맞춰서 줄어들었다.

나는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면서 장갑을 살펴봤다.

'튼튼해 보여서 뻣뻣한 소재일줄 알았는데 꽤 유연하네.’

은은한 빛이 감도는 검은색 장갑은 튼튼하고 편안했다.

마음에 들어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는데 나스가 헛기침하며 시선을 끌었다.

"흠, 흠. 마음에 들어?"

"괜찮은 것 같아. 어디서 산 거야?”

"산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만든….”

나스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나는 깜짝 놀라 다시 물어보았다.

“보기와 다르게 손재주가 좋구나. 그럼 이 장갑의 재료는 뭔데?

던전의 부산물?”

"뭐… 그렇지.”

나스가 뿌듯한 표정으로 한껏 어깨를 으쓱 올렸다.

노상 무표정한 그에게선 좀처럼 볼 수 없는 감정 표현이었다.

나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네가 활을 배우는 게 싫어.”

"뭐?"

나스의 시선은 장갑을 낀 내 손으로 향해 있었다.

“무기를 잡을 일도 없으면 좋겠고, 험한 일도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선물은 왜 준 거야?"

의아해질 찰나 그가 바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런 것 때문에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늘따라 나스가 왜 이럴까.

나스의 진지한 표정에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네가 하고 싶다는 걸 막고 싶지도 않아.”

나스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리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응원할게.”

지금껏 보았던 무뚝뚝한 표정이 아닌 생기가 담긴 미소에 나는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눈을 깜빡였다.

나스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사라져, 평소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 장갑이면 활을 다룰 때 다치지 않을 거야.”

“그래…. 고마워.”

꿈이라도 꾼 기분이었으나 나스의 환한 미소는 잔상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저렇게 웃으니까 더 라그나르를 닮은 것 같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장갑을 쓸어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어쩌지. 나는 화해 기념으로 줄선물이 없는데.”

“다치지만 마. 그거면 돼.”

나스다운 깔끔한 대답이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매일 다치고 다니는 줄 알겠군.'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고마운 마음에 빙긋 웃었다.

"다치면? 어떻게 할 건데?”

무슨 대답이 나올지 기대되어 빤히 쳐다보자 나스가 조용히 읊조렸다.

“…속상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너무 슬퍼보여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으니 나스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봄바람에 흩날린 하늘색 머리카락 사이로 붉어진 귓가가 보였다.

나는 완전히 사라진 나스를 확인하고서 중얼거렸다.

“진짜 부끄러움이 많은 친구네."

* * *

몬트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활기찬 낮도 좋았지만 고요함으로 물든 밤의 거리도 꽤나 마음에 들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서 그 앞에 앉아 커티스 상단에서 온 정식 사과 문을 읽었다.

“형식적이네.”

아들의 철없는 행동에 대해서는 따끔하게 꾸짖었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게끔 잘 타이르겠다는 내용에 그저 피식 웃었다.

“그래도 피해 보상은 확실하게 받았으니까.”

보상을 확인한 뒤 마도구에 기록된 내용을 지워 주니 안심하고 돌아간 직원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웠다.

“직접 오지도 않았으면서 앞으로 좋은 사이가 되면 좋겠다니. 웃기지도 않지.”

앞으로 좋은 파트너가 되자는 추신을 비웃으며 사과문을 한쪽에 던져 놓았다.

얽히기 싫으니까 더는 귀찮게나 안 했으면 좋겠다.

“밤바람이 좋네.”

약간 서늘한 밤바람에 졸음을 쫓아내려는데 아직 잠들지 않았었는지 키키가 힘차게 내 책상 위로 뛰어 올라갔다.

“키키. 책상 어지르면 안 된다고 했지.”

벌써 다 컸으면서 아직도 어린이라고 꾸짖으려는데 키키가 입에 무언가를 물고 다시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책상 위에 장난감 둔 적 없었는데?”

키키는 재빠른 몸짓으로 자신의 바구니로 몸을 던져 가져간 물건을 몰래 숨기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가져갔는데 숨기는 게 의미가 있니?”

귀여운 반항에 웃으면서 이불을 거두었다.

"장갑은 또 언제 본 거람.”

이불 속에는 나스가 선물해 준 검은색 장갑이 들어 있었는데 가져가려는 찰나 키키가 나를 와앙하고 물어 버렸다.

“키키.”

으르릉~

“언니한테 으르릉 하는 거야? 언니 속상해지려고 해."

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키키가 눈을 굴려 눈치를 보더니 천천히 힘을 풀었다.

간신히 손에 들어온 장갑에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키키가 낑낑거리며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키키. 자꾸 이러면 다른 장난감들이 서운해한다?"

나는 삑삑 소리가 나는 당근 인형을 흔들었다.

하지만 키키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휙 저었다.

이럴 때 보면 정말로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다.

‘키키가 이렇게 좋아하다니. 대체 뭘로 만든 거지?'

나는 불만스럽게 꼬리를 탁탁 튕기는 키키의 턱을 쓰다듬어 주었다.

금세 고롱고롱 소리를 내는 것이 귀여워 웃으면서도 머리 한쪽에서는 자꾸 한 사람이 떠올랐다.

“키키는 플뢰르가 좋아?"

키키가 눈을 깜빡였다.

음, 플뢰르는 보통인가 보군.

“크세스는 좋아?”

키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크세스는 조금 마음에 안 드는구나.

“윈스턴은 좋아?”

키키의 딱딱한 표정이 조금 풀렸다.

윈스턴은 어린 시절에 얼굴을 많이 봐서 익숙해졌나.

“그럼 나스는 좋아?”

나스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키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스를 찾듯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모습이 귀여워 그 자리에서 품에 끌어안았다.

땅바닥에 앉는다고 잔소리할 사람도 없으니 괜찮겠지.

키키를 품에 끌어안고 막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물었다.

"나스가 왜 좋아?"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물었다.

키키의 보드라운 털을 마음껏 쓰다듬는 것은 덤이었다.

키키는 그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키키가 귀여워서 계속 쓰다듬는데 이내 귀찮아졌는지 꼬리로 내 손을 밀고는 자신의 바구니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몸을 동그랗게 말아 잠을 자기 시작했다.

‘버려졌네..'

나는 고롱고롱 숨소리를 내며 잠든 키키를 바라보다가 손을 펼쳐 보았다.

지금껏 활을 배우면서 손에 상처를 달고 살았는데 나스가 선물해 준 장갑을 끼고 나서부터는 상처가 생기지를 않았다.

'신기하지.’

확실히 그동안은 손에 물집이 잡혀 펜을 쥐기도 힘들었으니까 좋은 일이기는 하다만.

'재료가 뭔지 알려 주지 않으려는 게 수상하단 말이지. 마법을 썼나?'

키키가 좋아하는 것을 보니 위험한 소재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 것 같았는데 자꾸 비밀이라고 하고.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좋으려나.'

그렇게 생각을 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상품으로 판매하면 좋을 것 같았는데.'

오스왈드는 험난한 산맥도 많다.

보니 꽤 많은 이들이 사냥을 취미로 삼고 있었다.

이런 보호구는 인기가 많을 것이 분명한데 팔지 못한다는 게 못내아쉬웠다.

하지만 몇 번을 더 물어보았는데도 굳게 잠긴 나스의 입은 열리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장갑을 선물받는 건 두 번째네.'

첫 번째는 라그나르, 두 번째는 나스.

'우연이겠지만 신기하네.'

나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장갑을 빤히 바라보다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어차피 잠도 안 오니까 연습이나 조금 더 하고 잘까.”

나는 혀를 빼꼼 내민 채 잠든 키키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고는 이불을 덮어 주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크세스에게 배우기로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가 아직 병원의 치료가 더 필요하다 보니 현재로써는 기초를 겨우 배운 처지였다.

지금은 체력을 기르고, 기본적인 자세를 연습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어렵달까.

꾸준한 연습이 필요한데 시간도 잘 나지 않았다.

'플뢰르가 밤에는 푹 자야 한다고 신신당부하기는 했지만….'

나는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책들을 늦은 시간까지 읽는 거나, 연습하고 잠드는 거나 어차피 늦게 자는 것은 똑같지 않을까?

'지금 시간이면 플뢰르도 자니까 괜찮겠지?'

생각보다 낮에 하는 일이 많아서 시간을 내기 힘드니 밤에 연습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스스로 합리화를 마친 뒤 장갑을 챙기고는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왔다.

"1층에 두 사람의 방이 있으니까 조용히 빠져나가야지.”

나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와 연무장으로 살금살금 발을 옮겼다.

그런데 연무장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자리에 멈춰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는데 이번에는 확실한 단어가 들렸다.

“이 자식이!”

플뢰르의 목소리였다.

곧이어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플뢰르의 화가 난 목소리 뒤로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나스!”

하지만 이어진 플뢰르의 다급한 목소리에 상대가 누군지 금방 알수 있었다.

'설마 침입자라도 들어온 건가?'

갑자기 습격을 당했다면 설마 커티스 상단인가?

'어쩐지. 너무 순순히 사과한다.

싶었어!'

몰아치는 걱정과 함께 나는 연무장 쪽을 향해 빠르게 뛰어가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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