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93화 (92/185)

제93화.

“무슨 일이야!"

"......."

검을 맞대고 있던 나스와 플뢰르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라.”

나 또한 당황스러워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침입자는 보이지도 않았고, 그저 둘이서 검을 맞대고서 대련을 하는 모양새였다.

'…내가 너무 예민했나.'

어색한 웃음을 내쉬며 슬쩍 손을 올려 흔들었다.

“좋은 밤이야.”

손을 흔들자 두 사람이 천천히 검을 내려놓았다.

"아가씨. 이렇게 늦은 시간인데 아직도 주무시지 않고….”

“잠이 안 와서.”

자연스럽게 장갑을 뒤로 숨겼다.

“혹시 연습하러 나오신 건 아니죠?”

"아니지.”

당연히 아니라며 고개를 저으니 미심쩍은 눈빛이 쉽게 떠나지 않았다.

“그보다 늦은 시간에 둘이서 뭐하고 있는 거야?"

시곗바늘은 벌써 자정을 넘어갔는데 대련이라니.

내 물음에 플뢰르의 눈이 뾰족해졌다.

그러고는 살벌하게 나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스 이놈이 아가씨 외출에 자기가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우지 뭡니까!”

“응?”

플뢰르가 씩씩거리며 화를 숨기지 못했다.

"아가씨의 호위는 저인데 무조건 자기가 따라다니겠다고 우긴다니까요?”

그 말에 나스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고자질하지 마라.”

"너야말로 나한테 시비 걸지 마!"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더니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평상시에 대련해 달라고 청할 때는 그렇게 무시를 하더니. 뭐?

너를 이겨야 혼자 호위를 해도 된다고?”

플뢰르가 콧방귀를 끼며 나스를 비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네가 강하다면 이런 말을 들을 이유도 없을 텐데.”

나스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뱉은 말은 진심으로 보였다.

으르렁거리며 노려보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여서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이딴 놈이랑 친해질 생각 없습니다!”

“안 친해.”

곧바로 돌아오는 부정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안 친하기는.'

동시에 입을 연 것이 짜증 났는지 다시 서로를 노려보는 것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쩐지 라라와 시몬이 있을 때가 생각나네.’

두 사람도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으르렁거리면서 싸웠는데.

'그 둘처럼 곧 친해질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씩씩거리는 두 사람을 위해서 좋은 방안을 내놓았다.

“굳이 싸우지 말고 둘이 번갈아 가면서 외출하면 되지.”

“하지만!"

“이제부터 바빠져서 매일 외출할 예정이거든.”

플뢰르가 억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울망울망한 눈빛에 마음이 저절로 약해질 뻔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나스가 매일 밤 플뢰르의 대련 상대가 되어 줘."

“뭐?”

나스가 당황한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서 눈을 크게 떴다.

나스의 찌푸려진 미간과 다르게 플뢰르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플뢰르도 수련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여유가 있으면 좋을 것 같고.”

플뢰르는 언제 서운해했냐는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나스도 플뢰르와의 대련이 도움될 것 같은데.”

"내가 왜…!"

나스가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시는 거잖아.

싫으면 그냥 그만두든가."

플뢰르가 피식 웃으면서 나스의 속을 살살 긁기 시작했다.

"나야말로 네가 거절하면 좋은 일이지. 언제나 아가씨 옆에서 호위하는 사람은 나뿐인 거니까."

“대련이 뭐라고.”

나스의 짜증이 가득한 말에 플뢰르는 웃었다.

“너와 대련할수록 나는 더 강해질 수 있을 것 같거든. 내가 더 강해져야 아가씨를 지키지 않겠어?"

"네가 지키지 않아도 내가….”

“어차피 1년 단기 계약이라면서.

그 후에는 떠날 것 아냐?”

플뢰르의 물음에 나스가 말하던 것을 멈추고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네.”

내가 플뢰르의 말에 동조하니 이번에는 서운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알겠어. 대련하면 되잖아."

그러다 이내 어깨를 늘어트리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터벅터벅억지로 움직였다.

'답지 않게 기운 없는 모습이네.'

나스는 힘겹게 발걸음을 움직이다가 연무장을 빠져나가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잘 자, 다프네.”

서운한 와중에도 인사는 하는 모습에 나 또한 잘 자라고 인사를 해 주었다.

나스는 내 인사를 듣자 망설임없이 빠져나갔다.

곧 문이 닫혔고, 플뢰르는 어이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녀석 눈에는 제가 보이지 않나 봅니다. 재수 없는 놈 같으니라고.”

음, 딱히 부정은 못 하겠다.

* * *

그 후로 며칠 동안은 굉장히 평화로웠다.

나스는 약속을 지켜 저녁을 먹고 매번 플뢰르와 대련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라는 듯 자신이 호위하는 날이면 이른 아침부터 내 방 앞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나는 플뢰르와 함께 거리를 걸으며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며칠 만에 활짝 핀 얼굴이 보기 좋았다.

“플뢰르, 나스랑 대련하는 게 그렇게 좋아?”

"네! 제 실력이 향상되는 느낌이 확실하게 들어요!”

플뢰르는 눈을 반짝이면서 기쁜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둘이 좀 친해졌어?"

"아니요. 그놈이랑 친해진다는 게 가능은 한 건가요?"

“어…."

너무 단호한 대답이었다.

플뢰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나스에 대한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실력은 있지만 재수 없는 놈입니다. 심지어 가끔씩 갑자기 자리를 비우기도 하니 수상하기까지한 놈이죠.”

자리를 비우는 건 대부를 찾는 일 때문일 텐데.

“평가가 박하네.”

그녀가 진심으로 질색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푸스스 웃는데 플뢰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굉장히 무례한 질문인 것은 알지만… 혹시 아가씨께서는 나스가 마음에 드시나요?"

“응?”

“애정을 품고 계신다거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걷던 것도 멈춘 채 검지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나스를? 그럴 리가 없잖아.”

곧바로 나온 대답에 플뢰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성격이 더러운 놈이라 아가씨께 굉장히 아깝습니다.”

나를 좋게 봐주는 것은 고맙다만 나스의 성격이 그렇게까지 더럽지는 않은 것 같은데.

‘여기서 그 말을 하면 쓸데없는 오해를 더하겠지..'

나는 말을 아끼면서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요즈음은 계속 상단에 출근해 일했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조금 달랐다.

“오늘은 서점에 가 보려고."

“서점이요?"

“응. 곧 아카데미 입학시험이 있잖아.”

내 말에 플뢰르가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왈드의 아카데미는 여름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가을에 입학한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이왕이면 좋은 성적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

밝은 내 목소리에 플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는 똑똑하시니 분명 수석으로 입학하실 겁니다. 비록 아카데미에 입학하시면 자주는 못 보겠지만….”

플뢰르가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스왈드의 아카데미는 학부생을 제외한 호위나 하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했기에 아쉬움이 더 큰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플뢰르도 같이 입학해야 하는데.”

"예? 저도요?”

생각해 보니 당사자인 플뢰르에게는 아직 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플뢰르는 처음 듣는다는 듯이 입을 살짝 벌렸다.

“일반 학부생 시험 한 달 뒤에 특수 학부생들 시험이 있거든. 평가 항목은 오직 실기.”

"아…. 아카데미에 들어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해서…. 제가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요?"

“플뢰르가 아니면 누가 검술 학부에 입학해. 난 당연히 같이 입학할 줄 알았는데. 혹시 싫어?"

내 말에 플뢰르가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어디서든지 아가씨를 지킬 수 있다니 기쁘기만 한걸요!”

“그렇지? 나도 기뻐.”

플뢰르는 한참이고 입가에 지어진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우리는 곧 서점에 도착하였고, 주인의 안내에 따라서 입학시험추천 교재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겠는걸.”

추천 교재를 둘러보면서 내린 결론은 난이도가 그렇게 높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왕이면 최고 성적으로 입학하고 싶단 말이지.”

외국인에 평민 신분, 심지어 같은 업계에서 꽤 눈총을 받는 상단이니 부족한 부분이 없어야 했다.

'우리를 깎아내릴 여지를 주면 안 되니까.'

나는 추천 교재라고 쓰여 있는 것들을 모두 구매하기로 하고는 천천히 서점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입학시험 시즌이 다가와서 그런지 서점 안에 사람이 적은 편은 아니었다.

과연 평민들도 입학이 가능한 곳이라더니 꽤 학구열이 높은 곳인가 보다.

나는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둘러보며 혹시 읽을 만한 것들이 있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뒤에서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아담 커티스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녕, 오래간만이지?"

“우리가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너무 까칠하게 굴지 말고, 나 정말 많이 반성했다니까? 아버지께도 많이 혼났어.”

플뢰르가 책을 구매하러 계산대에 간 틈을 노려서 찾아오다니.

‘귀찮은데 상대해 주어야 하나.'

“따로 편지를 보냈는데 못 봤어?”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을 사이도 아니지.”

옆 책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그가 내 앞을 갑자기 막았다.

“뭐야?”

“그날은 진짜 창피하고 화가 났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잘못했더라고.”

“그래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친해지고 싶어서 말이야.”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아담은 내게 한 발짝다가왔다.

'미친놈인가.'

그 수모를 당했는데 친해지고 싶다고?

나한테 반한 게 아닌 이상, 아니 반했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내 눈빛이 예사롭지 않자 그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날 그렇게 대한 여자는 처음이거든. 너 진짜 매력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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