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94화 (93/185)

제94화.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반해 버렸다는 거야!”

맙소사. 진짜 반한 거였어?

끔찍한 소리에 당장이라도 귀를 씻고 싶어졌다.

내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아담은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그러니까 친하게 지내자고."

말을 내뱉고서 씨익 웃는데 자기가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표정 관리가 힘드네.'

당장이라도 미간을 와그작 찌푸릴 것 같은데 간신히 참았다.

"아, 이건 화해 선물이야. 북부의 광산에서 캐 온 보석으로 만든 목걸이지.”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자기 혼자 열심히 떠들다 이제는 품속에서 고급스러운 상자를 꺼내서 건네주려 했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목걸이는 예뻤지만 내게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고, 탐이 나지도 않았다.

“이걸 주는 의미가 뭐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말이야."

"너는 부끄러움이라는 걸 모르는 놈이구나.”

“칭찬해 주는 거야?"

말이 안 통하는 놈이었구나.

이제 더는 못 참겠다.

나는 표정을 구기며 기분이 나쁜 것을 숨기지 않았다.

“받을 이유도 없고, 받고 싶지도 않아.”

“왜? 그냥 선물하는 건데.”

“네가 내게 줄 수 있는 선물은 날 귀찮게 하지 않는 거 하나뿐이야.”

그 말과 함께 아담의 옆을 지나갔다.

아담이 나를 잡으려고 손을 뻗는 듯싶었으나 휙 피해서 재빠르게 지나쳤다.

'지난번에 꽤 창피를 당했을 텐데 왜 저러는 거야.'

아무리 멍청한 놈이라고 해도 한 상단의 후계자인데?

'반하기는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 게 뻔하지.'

아무래도 커티스 상단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 *

그 후로도 이상한 나날이 반복되었다.

내가 외출이라도 하면 어디서 들었는지 아담이 나타나서 선물 공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일부러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말이다.

“오늘은 널 닮은 예쁜 장미꽃을 준비했어. 받아 줄래?”

“싫어.”

나는 분홍색 장미꽃다발을 옆으로 밀고서는 그대로 지나쳤다.

뒤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기분만 나쁠 뿐이었다.

"가서 베어 버릴까?"

“됐어. 내버려 둬.”

나스가 뒤쪽에 있는 아담을 향해 살벌한 눈빛을 던졌다.

곧 다급하게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시선이 줄어드는 게 느껴져 조금 편해졌다.

“왜 저러는지 알아?"

“알지.”

나는 윈스턴이 가져다준 상단의 정보를 떠올리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연년생인 남동생이 있더라고."

“그게 왜?”

나스의 물음에 천천히 설명을 해주었다.

"나 때문에 멍청하다는 이미지가 생겼나 봐. 후계자가 되었다고 해도 얼간이처럼 굴었다간 언제든지대체할 수 있는 애가 있으니 불안해서 저러는 거겠지.”

“지금 하는 짓이 얼간이 같은데."

쌀쌀맞은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마냥 그렇지도 않아. 나랑 사이가 좋아지면 다시 이미지를 복구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친한 척하려는 거라고.

말을 덧붙였는데 나스의 기운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럼 너를 이용하려고 저렇게 껄떡댄다는 거야?”

“껄떡….”

직설적인 표현에 조금 놀랐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활활 불타오르는 눈빛에는 짜증이 어려있었다.

“계속 두려고?”

“슬슬 참기 힘들기는 해.”

하지만 아직 경비대에 신고할 만큼 선을 넘지 않아서 곤란했다.

경비대가 남녀 간의 애정과 관련된 일이라며 관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아이들 간의 문제라며 더더욱 가볍게 여길 수도 있으니까.'

내 말을 들은 나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죽일까.”

“뭐라고?"

그의 목소리가 워낙 작아서 다시 물었는데 나스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너와 저놈에 대해 자꾸 소문도 나던데.”

“확실히 그렇지. 누가 일부러 퍼트리는 듯이 말이야."

커티스 상단 후계자와 베네디토상단 후계자가 화해하고 사이가 좋아졌다는 말이 이 도시에 알음알음 퍼져 나가고 있었다.

분명 아담이 뒤에서 허튼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겠지.

어떻게든 그때의 비굴한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차피 아카데미 입학을 하게 되면 이곳을 떠나니까. 소문이야 금방 가라앉을 거야.”

이런 일에는 무시하는 것이 답이라며 담담히 말을 하는데 나스가 한참이고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나스는 입술을 살짝 내밀고서는 뾰로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네가 그런 소문에 잠시라도 얽혀 있는 게 싫어.”

뾰로통한 말투와 퉁명스러운 표정이 조금은 귀여웠으나 나스를 감싼 기운은 꽤나 살벌했다.

어찌나 불만이 가득한지 금방이라도 사람 하나 때려눕힐 기세였다.

오죽하면 지나가던 사람이 슬금슬금 피하는 게 보였다.

으음.

확실히 플뢰르도 윈스턴도 보고만 있지 말라고 하긴 했지.

'물론 나도 소문에 얽히는 게 싫기는 해.'

그래도 곧 떠날 곳이니 더는 일을 크게 키우진 않으려 했는데.

나는 나스의 반응을 보고서 생각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 * *

그 후로 며칠이 지났다.

요 며칠간 상단에 들러서 일을 도와주고, 활도 열심히 연습하고, 입학시험 공부까지 하느라 하품이자주 나왔다.

나는 나오려는 하품을 참으며 오래간만에 보는 도서관의 외관에 미소를 지었다.

'신전 이후로 이렇게 큰 도서관은 처음이네.’

몬트에 커다란 도서관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바쁘다 보니 이제야와 본 것이 너무 아쉬웠다.

나는 옆에 따라붙은 플뢰르에게 말했다.

“어차피 도서관은 사람도 적고,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으니까 오늘은 너도 읽고 싶은 책을 가져와서 같이 읽자.”

"예? 하지만 또 커티스 녀석이 찾아올 수 있잖습니까."

서점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담이 접근했다는 얘기를 듣고 플뢰르는 더욱 철통 경호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 안 올걸?"

“정말요?"

“응. 커티스 상단에 다시 정식으로 항의를 넣었거든."

“효과가 있을까요?”

"응. 후계자의 자질에 대해서 논하는 항의문을 써서 보냈거든. 사고뭉치에다 남에게 아무렇지 않게 성희롱하는 놈을 계속 후계자로 둘 거냐고.”

플뢰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단속 안 하면 경비대에 신고할 거라고 덧붙였고."

“하지만 경비대가 나서 줄까요?”

"신고당한 것만으로도 불명예가 얹어질 테니까 상단 이미지가 안좋아질 거야. 그러니 알아서 통제시키겠지.”

내 예상대로 며칠 동안 아담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갈 것이다.

아니, 지나갈 줄 알았다.

"아가씨. 저놈 또 오는데요."

“뭐?”

도서관에 들어가기도 전에 보기 싫은 인물을 마주쳐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담은 씩씩거리며 내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야!”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는 것이 이젠 이미지 관리는 때려치우기로 했나 보다.

“무슨 일이야?"

평온하게 답하자 그가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 때문에 일주일이나 근신하다가 이제야 나왔다!"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듯 고개를 까닥이자 아담이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너 사람 마음이 우습냐?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했잖아! 선물도 주고 그랬잖아!”

"내가 언제 달라고 그랬니?”

“사람이 이렇게 성의를 보였으면 적당히 하고 받아 줘야지!"

플뢰르가 눈빛을 싸악 굳히며 내 앞을 막아섰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모양새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도서관이 외곽에 있어 점심시간인 지금 이 근처를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서 플뢰르의 뒤에서 나왔다.

“아가씨.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냐. 마지막으로 대화할 기회는 줘야지.”

“뭐? 기회?”

단어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또 씩씩거리는 모습에 나는 입가를 부드럽게 끌어 올려 웃었다.

싱그럽게 지어진 미소에 아담이 얼빠진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또 이렇게 소란을 피워도 되는 거야?"

“뭐?”

"평판이 너무 지저분하다고 동생에게 자리 뺏기면 어떻게 하려고?”

내 말에 그가 화를 내는 것도 잊고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들어 보니까 동생이랑 사이도 안 좋다는 것 같던데. 아, 어머니 가 다르다고 했던가?"

"너…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너무 유명한 소문이라 모른 척하기도 힘들던걸?"

내 웃음에 아담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너… 너 내 동생이랑 한편이냐?

처음부터 내 동생이랑 짜고 날 괴롭히는 거였지!”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날 괴롭히는 건 너인데.”

아담의 뒤에 서 있는 호위의 표정 또한 주인을 따라가듯 창백해졌다.

“그때 일은 사과했잖아!”

“그러니까 사과하고 끝냈어야지.

귀찮은 소문을 널리 퍼트리면 내가 그대로 응해 줄 것 같았니?"

내 물음에 다시금 호위의 표정이 굳었다.

역시 아담이 일부러 퍼트린 소문이 맞았나 보다.

호위는 이만 물러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지 아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성희롱으로 신고당했다는 소문까지 얹어지고 싶지 않으면 인제그만 사라져 주면 안 될까?"

마지막이니 예의 있게 상대해 주고 싶었는데 그렇기에는 아담의 태도가 영 아니었다.

어찌나 분해 보이는지 이를 악물고서 나를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톡 하고 건드리면 뻥 하고 터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도련님,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슬슬 사람도 몰려올 것 같고….”

호위가 아담을 달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담은 오히려 화를 냈다.

“이, 이 독한 계집애! 내 살다 살다 너처럼 독한 계집애는 처음 본다!”

아담이 욕지거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괜히 남의 나라 와서 남의 밥줄이나 건드리고!!"

틀린 말은 아니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순순히 수긍하자 아담은 더 열을 받았는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주 독하고 못됐어! 네 나라로 빨리 돌아가 버려!”

소리를 지르니 기운이 빠졌는지 그가 거친 기침을 토해 냈다.

“그런데 말이야.”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드디어 입을 여니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난 너처럼 멍청한 것보다는 나처럼 독한 게 나을 것 같아.”

"뭐, 뭐?”

"너 같은 게 상단의 후계자라니.

네 부하들이 불쌍할 지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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