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아담이 갑자기 나를 향해 장갑을 벗어 던졌다.
상대방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장갑을 던진다는 것은….
“나 아담 커티스는 다프네 베네디토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설마 했던 결투의 신청이었다.
아담은 당당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외쳤다.
“난 네게 당한 이 모욕을 쉽게 넘기지 않겠어.”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반성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결투는 어떻게 이루어지지?"
내 물음에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플뢰르가 기겁을 했다.
"아가씨!”
플뢰르가 나를 걱정하는 이유는 알았지만 그녀의 바람처럼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오스왈드에서는 결투에 강한 의미를 부여해.'
결투를 거절했다가는 차라리 지는 것이 훨씬 나을 정도로 나쁜 평가가 붙을 것이다.
'머리 좀 썼나 보네.'
내가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알고서 일부러 이렇게 결투신청을 한 것이겠지.
아담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스왈드는 사냥의 나라! 네가 근래 활을 연마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 종목 정도는 내가 맞춰 주겠어.”
아담의 설명은 간단했다.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질 거야. 그 안에 가장 높은 점수를 취득하면 이기는 거지.”
"단순히 그것뿐?"
“그래.”
답지 않게 선심 쓰듯 이야기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 결투를 통해서 어떻게든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결투에서 얻고 싶은 게 뭔데?”
“내가 이기면 정식으로 내게 무릎을 꿇고 사과해!"
아담은 어느새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고는 당당히 소리 질렀다.
첫 만남 때의 굴욕을 잊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혹시나 비기게 된다면 이번에도 내가 사과하도록 하지."
내가 이긴다는 생각은 아예 배제하고 있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말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를 배려하는 척 제안했지만, 분명 내가 아직 활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걸 듣고 이런 결투를 내 민 것이 분명했다.
아담이 조건을 말했으니 이번에는 내가 조건을 걸 차례였다.
"내가 이기면 넌 네 상단의 후계 자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해.”
“…뭐라고?"
의기양양하게 나를 바라보던 아담의 미소가 깨졌다.
아담의 입에서 쉽게 긍정이 나오지 않았다.
내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보며 그는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내게 불리한 결투인 걸 알고서도 제안한 것 아냐? 적어도 이 정도 조건이 되지 않는 이상 나도 수긍할 생각 없어.”
아담은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을 하더니 이내 나를 한 번 쑥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결투는 일주일 후 이루어진다. 정오에 광장에서 보도록 하지."
아담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자리를 떴다.
“일주일 뒤라….”
일정을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플뢰르에게 어깨가 붙잡혔다.
플뢰르는 억울함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가씨! 이렇게 불리한 결투를 받아들이시다니요!"
“하지만 오스왈드에서는 결투를 거절했다간 평생 불명예를 안게 되는걸.”
“아가씨는 활을 배우기 시작한지도 얼마 되지 않으셨잖아요!"
플뢰르의 말이 맞았다.
나는 기본기만 연습했을 뿐 실전에 써 본적은 없었다.
나는 걱정이 가득한 플뢰르를 보며 방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니 수락한 거야.”
이때까지만 해도 정말로 자신감이 넘쳤었다.
* * *
연무장에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스도, 윈스턴도, 플뢰르도 모두 멍하니 과녁을 바라보았다.
“처참하군요."
윈스턴이 긴 침묵을 깨트렸다.
이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이성을 찾는 속도가 둘보다 더 빨랐다.
"어떡하지….”
과녁에 박힌 화살들은 가장 잘 맞은 것이라고 해 봤자 가장자리의 1, 2점대 정도였다.
나는 바닥에 뒹구는 나머지 화살들을 보다가 이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에 들고 있는 활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활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 몸을 타고 흐르던 오싹한 전율이 떠올랐다.
마치 활과 한 몸이라도 된 듯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느낌이었단 말이다.
'크세스도 내 자세가 정말 좋다고 했었으니까….'
그래서 적어도 내가 천재는 못 되어도 수재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는데….
'그냥 내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거짓말을 해 준 건가.'
죄 없는 크세스에게 괜히 원망의 마음이 피어올랐다.
'아니지. 내 잘못이지.'
힘없이 떨어진 화살을 보고 나서야 내가 무슨 사고를 벌였는지 자각이 되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희망을 품고서 물어보는데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 사람의 반응에 이번에는 활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분명히 처음에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자만심이 너무 컸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나를 배려하여 종목을 골랐다 선언한 아담은 활솜씨만큼은 뛰어나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럼 그렇지 선심 쓰듯 활로 승부를 겨루자는 말이 의아했었다.
플뢰르는 그 말을 듣고 비열한 놈이라고 펄펄 뛰었으나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어차피 물은 이미 엎질러졌으니 여기서 포기할 수도 없겠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적어도 그때까지는 과녁을 맞히기라도 해야 했다.
***
요새 내 하루는 바빴다.
아침부터 상단에 들어오는 물건들을 체크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지 마을을 쉴 틈 없이 돌아다닌다.
일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좀 둘러보고, 저녁을 먹은 뒤에는 키키와 산책을 해 주어야 한다.
그 이후에는 입학시험 공부까지하다 보니 내가 활을 연습할 시간은 부족했다.
결국 나는 잠을 포기하기로 했다.
나스도 플뢰르도 대련을 마치고 모두가 깊게 잠든 늦은 새벽.
나는 모두의 눈을 피해서 홀로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누적된 피로에 눈이 무겁게 가라 앉기는 했으나 아담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졸음을 이겨 냈다.
“쉽지 않네."
벌써 사흘째인데도 불구하고 화살은 과녁의 끝자락에 겨우 맞을 정도였다.
근거 없는 자만심에 대한 대가라 생각하니 입안이 썼다.
'다리가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찌르르 올라오는 고통에 무의식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다쳤던 다리 때문인지 자꾸 자세가 무너지는 것 같은데….’
한숨을 내쉬는 그때 뒤에서 익숙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해?"
아이처럼 토라진 목소리가 평소의 낮은 음성과는 너무 달라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나스가 자신의 감긴 눈을 비비며 몽롱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시간까지 연습하는 거야?"
나스는 겨우 잠을 쫓아냈는지 내 옆으로 다가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졸리지 않아?"
“잠은 일주일 뒤에 충분히 잘 수 있어.”
“시간이 부족하다고 잠을 줄이는 버릇을 들이면 어떻게 해.”
나스가 걱정을 하는 것은 이해했지만 조마조마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럴 수도 있지.'
나는 나스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다시 자세를 잡으려 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나스가 한숨을 내쉬더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잠시만 실례할게.”
나스가 내 손위에 자신의 손을 얹어 자세를 잡아 주기 시작했다.
‘차갑네.'
맞닿은 손이 너무 차가워 흠칫 놀랐으나 나스는 멈추지 않았다.
“자세가 흐트러졌어. 오른쪽 발에 너무 힘이 들어갔잖아."
새벽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아직도 잠에 취해서 그런지.
귓가에 닿는 나스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웃음기가 넘쳐났다.
“집중해야지, 다프네.”
"아, 응.”
재촉하는 목소리에 정신을 다잡고서 나도 모르게 잔뜩 긴장하고 있던 오른쪽 발의 힘을 풀었다.
“좋아. 조금 균형이 잡힌 것 같아.
그럼 이제 앞에 있는 목표를 맞추겠다는 생각으로 시선을 고정해.”
마치 주문이라도 되는 듯 그 말을 속으로 되새기며 정면을 응시했다.
그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각과 흥분이 내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활을 손에 쥐었을 때의 그 짜릿한 느낌.
'무슨 향기지?’
밤공기만 서늘하게 맴돌던 주변에 갑작스레 스며든 묘한 향기가 내 코를 간지럽혔다.
마치 몸속의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나스의 말과 함께 힘을 주어 팽팽하게 잡아당긴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추진력을 얻어 멀리 날아갔고, 곧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과녁에 박혔다.
“8점….”
고작 실격과 1, 2점을 드나드는 것이 전부였는데.
나는 활짝 웃으며 휙 옆을 돌아보았다.
“8점이야. 8점!”
“그래. 8점이네.”
내 환한 웃음을 따라서 나스도 활짝 웃었다.
어느새 졸음은 가셨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의지가 차올랐다.
나스는 다시금 내 자세를 봐주기 시작했다.
가까이 맞닿을수록 평소에는 맡아 보지 못한 달콤한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이건….’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었으나 결국이 향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 * *
일주일이 지났고, 드디어 결투가 이루어질 아침이 밝았다.
나는 꼼꼼하게 스트레칭을 한 후 나스와 플뢰르와 함께 약속된 시간에 광장으로 향했다.
"도망치지 않고 왔네?"
도착하자마자 들리는 얄미운 목소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한대로만 가면 나쁘지만은 않을 거야.'
광장 중심에 두 개의 과녁이 준비된 것이 보였다.
그어진 선 옆에 놓인 각각의 테이블 위에는 화살이 세 개씩 놓여 있었다.
광장이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꽤나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떨려 오는 긴장감에 손에 저절로 식은땀이 고였다.
아담은 자신이 먼저 시범을 보여 주겠다며 활을 들었다.
“잘 보라고.”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아담이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화살은 정중앙에서 조금 빗겨 갔지만 10점의 범위 안에 박혔다.
아담은 마치 과시하듯 좌중을 둘러보며 의기양양하게 마지막 화살을 잡았다.
그가 힘 있게 시위를 당겼다 손을 놓자 마지막 화살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날아가 과녁의 중심에 정확하게 박혔다.
“총 30 점입니다!”
심판이 외친 점수에 멍하니 과녁을 바라보았다.
아담의 활솜씨가 쓸 만하다던 소문은 과장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과녁 가운데에 세 개의 화살이 나란히 박혀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 결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모든 화살이 정중앙에 맞아 아담보다 완벽한 30점을 만들어야 했다.
아담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실력을 가졌으면서 결투를 신청하다니. 플뢰르 말처럼 정말 비열한 놈이구나.'
내가 멀뚱히 서 있자 아담이 비죽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뭐야? 기권이야?"
얄미운 말에 고개를 돌려 복잡한 시선으로 과녁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어오르면서 긴장감이 더더욱 올라갔다.
그때 나스가 다가와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래? 긴장됐어?”
"어?"
"몸의 균형을 잘 잡으면 자세는 괜찮을 거야. 다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만 신경 쓰면 돼.”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나스를 응시했다.
“믿을게. 이기고 돌아와."
믿을게.
그 말이 어쩐지 주문이라도 되는 듯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해 보자.'
나스도 나를 믿는데 나도 스스로를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맞추면 돼.'
과녁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두려워하지 말고,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어쩐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마치 처음 활을 잡았을 때의 그 자신감과 같았다.
나스와 함께 연습했을 때 느꼈던 그 짜릿한 감각을 되새겨 보았다.
'목표물을 맞히는 거야, 다프네.'
과녁에 집중한 두 눈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이곳을 향해 쏘면 된다는 듯 내 시야에는 과녁의 가장 작은 원밖에 보이지 않았다.
휘잉-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