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화살은 거침없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물결처럼 춤을 추는 화살은 내가 원하는 가장 작은 원 중심에 박혔다.
'10점….'
나는 바로 다음 화살을 장전하여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내 손에서 떠난 화살이 다시 거 센소리와 함께 날아가더니 콰직소리를 내며 앞선 화살을 반으로 갈랐다.
“세상에나!”
누군가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소음에 예민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평소와 다르게 거슬리지 않았다.
그 어떤 때보다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어떻게 해서는 저 자리에 그대로 활을 꽂아 넣을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마침내 마지막 화살이 날아갔다.
마지막 화살 또한 두 번째 화살을 두 조각으로 갈라내었고, 과녁에 박힌 것은 단 하나의 화살이었다.
완벽한 30점을 이루어 냈다.
소란스러움이 가득했던 주변이 약속이라도 한 듯 고요해졌다.
모여 있는 모두가 놀란 듯 말을 아꼈다.
나는 비현실적인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뒤에서 웃음기 섞인 나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겼네. 저 녀석보다 완벽한 30점이야.”
그 한마디에 온몸을 감싼 긴장이 순식간에 풀렸다.
내가 몸을 휘청이자 플뢰르가 황급히 뛰어오더니 나를 부축했다.
“이기셨어요, 아가씨!"
기쁨에 찬 플뢰르의 목소리에 서서히 안도감이 차올랐다.
아담보다 더 완벽한 30점을 이루어 냈다.
'내가 지금 화살을 쪼갠 거야?'
귓가에 시끌벅적한 소리가 다시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저게 가능한 거야?"
"활을 막 배우기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커티스의 후계자도 활에 대해한 실력 하지 않나? 그보다 더 잘하는 것 같은데?"
"저 정도면 신궁 아니야?"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이곳에 있는 사람 중 제일 놀란 사람이 바로 나이지 않을까.
“어쩐지 눈이 너무 뜨거워."
내가 칭얼거리듯 말하자 플뢰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플뢰르 또한 긴장이 풀렸는지 이제야 웃음을 보이는 것 같았다.
“많이 뜨거워?”
내 말을 들었는지 내 쪽으로 다가온 나스가 눈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 주었다.
나스의 손은 마치 얼음장과 같이 차가워 뜨거운 눈가를 식혀 주기에 적절했다.
'다시 그 향기가 난다.'
나스가 다가오니 지난번에 맡았던 그 향기가 다시 풍겨왔다.
'이 향기는 나만 맡을 수 있는 걸까? 왜 갑자기 나는 거지?'
평상시에는 맡아 보지 못했던 그 향기에 의문이 샘솟았다.
그와 함께 나를 응원해 주던 나 스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훌륭합니다. 아가씨."
언제 왔는지 윈스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경꾼들이 많이 모였었는지 환호와 함께 박수 소리도 참으로 요란했다.
아마 지켜보는 모두가 내가 질줄 알았겠지?
당연히 질 것이라 생각한 내가 이기니 더욱 반응이 격렬한 듯했다.
무엇보다 화려한 퍼포먼스도 있었으니 더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의문은 잠시 뒤로 미루고 결투의 승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드디어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 * *
며칠이 지나고 내게 선물 하나가 들어왔다.
아주 고급스러운 포장지에 감싸진 커다란 상자는 어떤 물건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커티스 상단에서 보내 주셨습니다.”
윈스턴의 말에 나스가 한쪽 눈썹을 까딱 올리며 불쾌함을 표현했고, 플뢰르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놈들은 그런 창피를 당하고서도 또 이렇게.…!"
어찌나 화가 났는지 몰라도 플뢰르가 말을 버벅거렸다.
나는 함께 딸려온 편지를 보며 화가 난 두 사람을 진정시켜 주었다.
“커티스 상단의 새로운 후계자가 보내 준 선물이야."
“예?”
“새로운 후계자?"
나는 놀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놈이 후계자 자리를 포기한 겁니까?”
플뢰르의 목소리에는 불신이 담겨 있었다.
하긴. 그동안 본 아담의 모습이라면 무효라며 빽빽 소리를 지를 만도 했다.
“결투가 있기 전에 계약서를 보냈었거든. 서명해서 보내라고."
“아가씨, 그런 건 또 언제…."
플뢰르의 감탄 서린 목소리에 빙긋 웃었다.
"야비한 놈이니까 확실하게 해둬야 할 것 같았거든. 그래도 내가 한 건 아담의 동생에게 그 계약서를 보내 준 것밖에 없어.”
"그리고 그 계약서에는 아담 씨의 자필 서명이 확실하게 남아 있었고, 아가씨께서 결투에서도 승리하셨죠.”
이어지는 윈스턴의 설명에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잘 사용했나 봐. 그 보답으로 선물을 보낸 거래.”
적어도 아담보다는 똑똑한 후계 자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나는 천천히 포장을 뜯었다.
안에는 고급스럽고 튼튼한 활이 들어 있었다.
"고맙다고 편지를 보내 줘야겠어.”
“뭐가 예쁘다고.”
나스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플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스도 플뢰르도 고생 많았어.”
“저희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맘고생 했잖아.”
내 말에 플뢰르가 부정하지 못하고 뺨을 긁적였다.
솔직한 모습이 좋아 빙긋 웃고는 나스를 바라봤다.
“나스도 정말 고마워."
"내가 조금 생각해 봤는데.”
나스가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 채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프네는 활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뭐?”
“솔직히 질 줄 알았거든."
“그렇게 멋지게 믿겠다고 말했었으면서.”
내가 배신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나스가 시선을 피했다.
나스가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좋았으나 그것과 별개로 내 기분은 좋지 않았다.
'얄밉다.;
당분간은 바쁠 것 같아 잠시 보류하려 했는데 역시 그 의문을 먼저 풀어야겠다.
* * *
“아가씨. 쉬엄쉬엄 차를 마시면서 공부를 하시는 건 어떨까요?"
"고마워, 윈스턴.”
내 앞에 놓인 찻잔에 따뜻한 차가 가득 차올랐다.
늦은 시간까지 신경 써 주는 윈스턴에게 고마워 웃으며 바라보자 윈스턴 또한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있지, 윈스턴.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예, 우리 아가씨께서 어떤 게 궁금하실까요?”
“나스 말이야. 간식을 먹을 때 초콜릿 먹는 것 혹시 본 적 있어?"
내 물음에 윈스턴이 잠시 멈칫하더니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으음. 없었던 것 같군요.”
“그래?”
"예. 아! 보면 볼수록 라그나르도련님이 생각나다 보니 첫 만남때 초콜릿을 좋아하는지 물어본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나는 더 이야기해 달라며 윈스턴을 재촉했다.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아니 싫어한다고 분명하게 말했던 기억이 나네요.”
나스와 카페에서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분명히 초콜릿이 들어간 음료를 꽤 기분 좋게 마셨던 것 같은데.
'일부러 윈스턴에게 거짓말을 한 건가?'
“혹시 새로운 직원 중에 내가 다리를 다쳤던 걸 아는 사람이 있어?"
“회복하신지 근 1년이 지나셨으니… 최근에 들어온 직원들은 모를 겁니다.
“그렇구나.”
수상했다.
'그럼 나스는 내가 발을 다쳤던걸 어떻게 아는 걸까?'
도서관에서는 마땅히 용의 감옥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어 불안했었는데 새로운 단서에 눈을 반짝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 믿을 수 있는 것은 내 감뿐인 건가.
‘그런데 내 감 정도면 믿어도 되지 않나?'
모두가 감탄할 정도로 결투에서도 훌륭한 솜씨를 보여 줬었는데.
결투를 받아들인 것도 내 감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여겨서였고….
갑자기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샘솟았다.
'그래. 천재 소리를 듣게 해 준 육감인데. 믿을 만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나는 윈스턴에게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
다음 날, 나스와 플뢰르 두 사람을 모두 방으로 불러들였다.
“플뢰르, 내가 오늘은 시간이 안될 것 같아서 그런데 키키의 산책을 대신해 줄 수 있을까?"
“키키요?”
내 부탁에 플뢰르가 조심스럽게 키키가 누워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키키가 눈을 떴다.
동그랗고 까만 키키의 눈과 플뢰르의 붉은 눈이 마주쳤고, 키키는 관심 없다는 듯 휙 고개를 돌렸다.
엎드린 채 꼬리만 살랑살랑 흔드는 것이 움직일 의지가 없어 보였다.
"아가씨, 키키는 제가 싫은 것 같아요.”
“으음. 어쩐다.”
나는 일부러 안타깝다는 목소리를 내면서 가만히 서 있는 나스를 향해 물었다.
“그럼 나스가 키키의 산책 좀 도와줄래?"
“........”
나스는 잠시 멈칫하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자꾸 의심이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모른 척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나스가 나서자 키키가 즐거워하며 몸을 일으켰고, 이내 사이좋게 방을 빠져나갔다.
"어쩐지 씁쓸하네요. 저도 키키가 좋아해 주면 좋을 텐데.”
“원래 키키가 낯을 좀 잘 가려서 그래.”
“그런 것 치고 나스에게는 퍽 다정하던걸요.”
“네 눈에도 그렇게 보였구나.”
플뢰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서운해 보이는 모습에 위로의 말을 덧붙여 주었다.
“우리 엄마랑 오빠들도 쓰다듬는데 한 달 걸렸어.”
“진짜요?”
“응. 그리고 크세스보다는 플뢰르를 좋아해.”
“그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플뢰르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이 좀 나아진 듯해 보여서 이번에는 내가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플뢰르, 혹시 나스가 초콜릿을 먹는 걸 본 적이 있어?"
"아니요. 집사님께 초콜릿이 싫다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은 있습니다만….”
"그렇구나.”
수상함이 더욱 커져 갔다.
플뢰르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에 기분 좋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플뢰르, 내 심부름 좀 해 줄래?”
* * *
꽤 시간이 지난 후에 나스와 키키가 돌아왔다.
오늘의 산책도 신이 났는지 키키가 들어오자마자 벌러덩 눕는 것에 배를 열심히 문질러 주었다.
기분 좋은 울음소리에 나도 따라 웃는데 나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마워, 나스, 덕분에 마음 편히 일했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방에 가득 찬 냄새 때문인지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나스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고마운걸."
내 웃음에 나스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그, 그럼 나는 이만….”
"아니야. 내 부탁도 들어줬고 조금 쉬다 가는 건 어때.”
"어, 어?”
“마침 차를 마시려고 했거든.”
나는 나스의 손을 잡고서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로 이끌고 갔다.
나스의 발걸음이 평상시와 다르게 무거웠다.
그 이유가 짐작이 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오랜만에 같이 차를 마시.
고 싶어서 다과를 조금 준비해 뒀어.”
나스가 의자에 앉자 나 또한 마주 보는 곳에 앉아서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디저트도 많으니까 얼마든지 먹어.”
나스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보였으나 모른 척 활짝 웃었다.
테이블 위에는 초콜릿 디저트가 종류별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꼴깍하고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조용해진 방 안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