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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97화 (96/185)

제97화.

“왜 그래?”

나스의 두 눈은 마치 지진이라도 단 듯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릎에 올려놓은 주먹을 꽉 쥐고서 부들부들 떠는 모습에 다시 물어봤다.

"혹시 초콜릿 싫어하니? 처음 만났을 때 잘 먹었던 걸 기억해서 준비해 봤는데….”

일부러 말을 흐리자 나스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맞아. 사실은 초콜릿 싫어해."

최대한 비장하게 말한 것 같으나 디저트에서 시선부터 떼면 훨씬 믿음직스러울 것 같은데.

“그래? 의외네. 사실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초콜릿 향이 났었는데. 내 착각인가 봐.”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앞에 있는 시원한 과일차를 한 모금 마셨다.

슬쩍 곁눈질로 쳐다보니 나스가 어쩔 줄 몰라 하다 무언가 결심하듯 눈을 질끈 감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말하려는 건가?'

하지만 나스의 입에서는 내 예상과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사, 사실은 초콜릿을 좋아하는데 숨기고 몰래 먹고 다녔지."

“뭐?”

“용병일 하다 보면 이런 일로 무시를 받는 일이 허다해서, 그래.

그래서 싫어한다고 말했던 거야.”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모습에 나는 마시던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 작은 소리에도 나스가 움찔하고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그때 풍성한 꼬리가 우리의 발밑에서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키키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귀여운 울음소리를 내며 나스에게 다가간 것이다.

키키는 머리를 갸웃갸웃 움직이면서 나스의 발 언저리에서 몸을 비비적거렸다.

우리의 대화는 키키가 끼어들면서 끊겨 버렸다.

나스는 한숨 돌렸다는 듯 어색한 표정을 지우고는 키키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어떻게 해서든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참 신기하네.”

“뭐가?”

어느새 평정을 찾은 듯 떨림 없는 나스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스며들어 있었다.

'과연 키키 테라피는 굉장하군.'

속으로 사소한 감탄을 하면서 별것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키키가 낯을 굉장히 많이 가리거든. 우리 가족들도 친해지려면 오래 걸렸었는데.”

"아…."

나스의 눈이 다시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겨우 찾은 안정이 흔들리는 모습에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

나는 나스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어 말했다.

"이걸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내게 라그나르라는 친구가 있어.”

"으, 응?"

나스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그 상태로 몸이 굳어 버렸다.

“처음에 그 친구랑 너무 닮아서 놀랐었어. 그런데 초콜릿을 좋아하는 것도, 키키랑 친한 것도 겹치네. 정말 신기하지 않아?”

키키를 쓰다듬는 손까지 멈춰 버려 키키가 항의하듯 달라붙었으나 미동이 없는 상태는 여전했다.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솔직히 내가 모든 기회를 줬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네가 라그나르가 아닌 이상 말도 안 된다고.'

동물의 직감은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다.

나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키키는 낯가림 없이 달려들었던 걸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오래간만에 보니까 반가웠던 거겠지.'

키키는 진작에 나스가 라그나르인 것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스, 나한테 할 말 없어?"

"......."

나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발끝만 응시했다.

망설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우리의 헤어진 가장 큰 원인은 이성을 잃고 라그나르에게 함부로 대한 내 잘못이 제일 컸다.

그러니 내가 오히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할 상황인데 뭐 저렇게 망설이고 있단 말인가.

답답함에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사실은….”

"사실은?”

내 시선은 나스의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스는 마른 침을 삼키며 애써 웃으며 말았다.

“워, 원래 좀 특이하게 동물들이 날 많이 좋아해!”

이 분위기 속에서 꺼내는 말이 고작 저런 변명이라니.

기대감으로 부풀었던 가슴이 한 순간에 가라앉았다.

“그래?"

"응. 그래서 키키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나 봐.”

하하하고 어색하게 웃는 웃음소리와 함께 다시 방에 정적이 찾아왔다.

내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아도 그는 그저 웃고 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짓는 미소에 나는 회심의 질문을 던졌다.

"너, 내가 다리를 다쳤던 건 어떻게 알고 있었어?"

“어?”

나스가 말을 더듬더듬 내뱉으려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먼저 말해 주기 전까지는 모른 척해야 했는데. 다리를 다쳤던 건 네 오빠들한테 들었어.”

“오빠들한테?”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듯이 짧게 말하고 넘어가기는 했었는데 역시 모른 척할 걸 그랬나 봐.”

나스가 시선을 회피하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하.”

결국, 참다못해 기가 찬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외에는 나한테 할 말 없어?”

“응.”

단조로운 대답과 함께 대화가 끝났다.

나는 치솟는 화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시금 과일차를 들이켰다.

'그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

어느덧 여름이 찾아왔고, 나는 아카데미 시험을 보기 위해 수도로 올라왔다.

오스왈드의 수도 앤시어는 지금껏 들렸던 도시들과 다르게 활기차고 생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나는 아카데미 시험을 무사히 마치고는 여유롭게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그동안 혹독하게 준비한 보람이 있는지 생각보다 더 잘 풀려서 기분이 좋았다.

'벌써 여름이네.'

시험과 다르게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는 존재했다.

나는 비장하게 디저트를 준비하였으나 허무하게 지나간 그 날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내 잘못으로 벌어졌던 일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커 사과부터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끝끝내 말하지 않는 나스의 고집에 서운함과 화가 뒤엉켰다.

'왜 솔직하게 밝히지 않지? 혹시 말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걸까?'

홀로 앓아야 할 문제다 보니 밖으로 표현도 못 하고 그저 기분만 꽁해졌다.

무엇보다 그 이후로 나스가 눈에 띄게 자리를 많이 비우기 시작했다.

말로는 대부를 찾아다니느라 바쁜 거라 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어 보이니 나를 피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자연스럽게 들 수밖에 없었다.

"에휴.”

나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가씨! 시험은 무사히 잘 보고 오셨나요?”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스와 플뢰르가 아카데미 건물 근처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물론이지."

자신감이 넘치는 대답에 플뢰르가 활짝 웃었다.

마치 꽃이 피어나듯 환한 미소에 주변의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스도 살짝 미소를 짓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 묘한 거리감에 다시 서운함이 차올랐지만 시간이 급했기에 두 사람을 이끈 채 빠르게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 * *

평소에는 간단하게 블라우스와 스커트만 입었다면, 오늘의 의상은 조금 달랐다.

"어떠니? 좀 괜찮은 것 같아?"

"네! 그 누구보다 예쁘신걸요!"

플뢰르의 확신에 찬 어조에 나는 빙긋 웃었다.

확실히 거울 속에 비치는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화사한 드레스와 예쁘게 정돈한 머리 덕분인지 평소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오래간만에 엄마를 보게 되니까 가슴이 막 두근거리네."

“확실히 몇 달 만이니까요.”

그동안 편지와 아티팩트를 통해서만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 보는 건 거의 3개월만이었다.

'그리고 3개월이 넘어갔는데도 답장은 없고….'

연락할 때마다 시몬의 답장이 왔는지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안타까운 목소리였다.

'시몬… 막상 내 답장을 받으니 화가 난 걸까?’

서운한 마음이 커져서 그런지 몰라도 마음에 안 드는 상황에 괜히 더 뾰로통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엄마를 보는 건 좋지만 상인연합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해야 하는 게 조금 마음에 안 드네.”

엄마까지 앤시어로 올라온 이유는 상인연합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귀찮아.'

예쁘게 차려입은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거울을 바라보는 내 얼굴은 차갑기 짝이 없었다.

'다가오려다가도 무서워서 도망가겠는걸.’

속으로 별생각을 다 하던 중 플뢰르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가씨,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대상단은 보통 상단이랑 다른 건가요?"

“아. 확실히 오스왈드에만 있는 특이한 기준이기는 하지.”

플뢰르가 조심스럽게 물어본 만큼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오스왈드의 상인연합은 다른 곳과 다르게 체계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로 만들어졌거든.”

“위계적이요?"

“오직 다섯 상단에게만 대상단의 자격이 주어지고 있어. 그 대상단들이 상인연합을 지휘하는 핵심이라고 보면 돼.”

“핵심이요?”

“쉽게 말해 연합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된다는 말이야. 그러다 보니 유명세와 자본은 필수 조건이지.”

플뢰르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황실에서 5년마다 황실에 납품할 상단을 고르게 되는데 대상단이어야만 후보 자격이 주어져.”

“그럼 어떻게서든 그 자리를 쟁취해야겠네요?”

플뢰르의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한 자리가 비어 있기는 하지만…. 외국 상단은 자국 황실의 허가가 있어야 해서 더 어렵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나스는?”

"먼저 연회장으로 떠났습니다."

“엄마가 데리고 갔겠구나.”

나는 아쉬운 목소리를 애써 숨기며 제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플뢰르와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

확실히 연합에서 직접 주최하는 파티여서 그런지 연회장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오스왈드에서 이렇게 화려한 곳을 보는 건 처음이네.’

나는 긴장된 마음을 다잡으며 엄마의 옆에 섰다.

오랜만에 엄마를 만난 기쁨을 나눌 틈도 없이 파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반갑게 인사도 하지 못했다.

“긴장되니?"

"조금요. 이런 곳은 처음이잖아요. 사람도 생각보다 더 많고요."

“곧 긴장이 풀릴 거란다. 오늘 너무 놀라면 안 된다?”

“네?”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는데 갑자기 목소리 확장 마법이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파티의 주최자처럼 보이는 노인이 단상 위에 자리해 모두를 주목시키고 있었다.

"모두들 반갑습니다. 지오바나 대상단의 할리스 지오바나라고 합니다.”

좌중이 조용해졌고, 그에 할리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상인 연합에서 주관한 파티 참석에 감사드리며,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로 본론부터 말씀드리 죠.”

그의 미소와 함께 이어진 말에와 말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드디어 비어 있던 마지막 대상단의 자리가 채워졌습니다.”

'대상단이라고?' 벌써 대상단이 정해졌다니.

‘어쩌면 좋아..'

나는 당혹감에 옆에 있는 엄마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게 엄마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가득했다.

'설마?'

지금 내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걸까?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고, 엄마에게 묻기 위해 입을 열려는 그 순간 할리스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부터 클레멘스 제국의 베네 디토 상단을 대상단으로 승격합니다!”

'말도 안 돼!' 과연 모두가 나와 같은 반응인지 여기저기서 충격에 빠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엄마. 어떻게…?”

클레멘스에서 허가해 줬다고?

믿기지 않는 상황에 멍해져 엄마를 바라보기만 하는데 그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운 추억 속에서나 들었던 목소리였다.

“안녕, 다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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