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내가 알던 목소리보다 더 굵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한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항상 만나던 장소와도 전혀 다른 곳인데 어째서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을까.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겨주던 소중한 내 친구의 얼굴이 떠올라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눈시울을 붉히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몬…!"
화사한 청은발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 속에는 나와 같은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내 기억 속과 다르게 훌쩍 자라나 있었지만 나를 향한 환한 미소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당당하게 서 있음에도 살짝 붉어진 눈가가 시야에 들어와 작게 미소가 지어졌다.
키도 체격도 훨씬 커졌고, 얼굴도 앳된 티를 벗어 나보다 더 빠르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눈빛만큼은 여전히 어릴 때와 같아서 반가움을 가득 담은 채 시몬을 따라 활짝 웃었다.
"보고 싶었어, 다프네.”
“나도 보….”
갑자기 입이 붙어 버린 듯이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내가 감히 보고 싶었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내 두려움을 이겨 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연을 끊고 왔으면서 보고 싶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 아닐까?
나는 열린 입술을 다시 꾹 다물고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행동에 엄마가 다가와 어깨를 부드럽게 도닥여 주었다.
“이런 파티는 따분하기만 할 테니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랑 놀다 오렴.”
“하지만….”
나는 선뜻 자리를 뜨기 망설여져 엄마를 바라보았다.
"아카데미 시험 준비도 그렇고 요새 정신이 없었잖니? 너도 쉬어야지.”
다정한 격려의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이 활짝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조용한 곳으로 갈까?"
"응. 그러자.”
나는 시몬과 시선도 마주치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시몬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손깍지를 끼고는 부드럽게 나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서로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가는데 어린 시절과 다르게 청량함이 물씬 느껴졌다.
나는 소란스러운 연회장을 빠져나가 근처에 위치한 정원에 도착하기 전까지 힐끔힐끔 시몬을 훔쳐보았다.
'내가 열셋이니 시몬은 이제 열다섯 살이겠구나.’
고작 두 살 차이인데도 이렇게 성장하는 정도가 다르다니.
‘진짜 많이 자랐네..'
만약에 내가 계속 클레멘스에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겠지?
새삼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는지 와닿았다.
'내게 편지를 보낼 때 시몬은 무슨 마음이었을까?'
나는 이렇게 시몬과 함께 있어도 되는 걸까.
편지에 대한 답장도 간신히 했던 나에게 지금 이 상황은 아카데미시험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
시몬은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하는 걱정에 굳게 다물린 입은 쉽게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원에 도착하자 시몬이 벤치에 날 조심스럽게 앉혀 주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내 옆자리에 앉고서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어쩔 줄을 몰라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데 이내 밝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짜 많이 자랐네. 옛날에는 엄청 작았는데.”
“그렇게 작지도 않았어.”
“제 나이로 봐 주지 않아서 삐졌었잖아.”
“그때야… 너랑 아저씨 둘 다 그렇게 말을 하니까!”
나는 울컥하고 올라오는 억울함에 나도 모르게 그를 흘겨보았다.
“이제 어색함은 좀 풀렸어?”
시몬이 장난스럽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릴 때는 착했던 것 같은데 성격이 왜 이렇게 변했지?"
장난스러운 미소에 맞장구치며 말하자 시몬은 뭐가 재미있는지 킥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떡하지. 너무 기쁘다.”
내게 건네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기쁨과 설렘이 가득했다.
“편지 답장이 없어서 다시는 못볼 줄 알았어.”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잘못했기에 나는 말을 아꼈다.
다시 내가 조용해지자 시몬은 내 손을 꼭 붙잡은 채 자신의 속마음을 꺼냈다.
"네가 그렇게 편지만 남기고 떠났을 때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몰라.”
"으응.”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유독 네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갑자기 떠날 줄 누가 알았겠어?”
웃음이 서려 있지만 뼈가 실린 말이었다.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와 별개로 내 마음은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이었다.
어떤 말이든 변명일 뿐이고, 나는 시몬에게도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그래서 생각해 봤어. 왜 네가 그렇게까지 도망치듯 떠나야 했을까 하고.”
"......."
“난 말이야 다프네."
시몬이 말을 꺼내다가 멈추자 조용한 정원에는 풀벌레 소리만 들려왔다.
여름의 푸릇함을 담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도 들려 왔다.
나지막한 숨소리에 내가 시몬을 바라보지 않는 이상 그가 다음 말을 꺼내지 않을 거란 것을 짐작했다.
시몬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얼핏예상되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은 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시몬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시몬의 밝은 은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달빛을 눈에 가득 담아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색이었다.
"네가 프레이르의 딸이든 클로에의 딸이든 신경 안 써.”
“시몬….”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시몬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 악셀리우스에게 내 정체를 들켰을 때가 생각났다.
시몬도 온전한 나를 받아주려는 걸까?
"어째서?"
시몬, 너는 내가 반역죄를 저지른 프레이르의 딸인 게 상관없으면 안 되는 거잖아.
숨겨온 비밀이 밝혀졌다는 사실에 긴장감에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쳤다.
떨리는 목소리에 시몬은 당연하다는 듯 신뢰를 담아 활짝 웃었다.
“넌 누군가의 딸이 아니라 내 소중한 첫 친구인 다프네인걸.”
"아….”
결국, 참지 못하고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아, 어떡해.”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나는 차마 우는 얼굴을 시몬에게 보여 줄수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려 했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너무 기쁜데, 왜 울고 그래. 속상하게.”
하지만 시몬이 손수건을 꺼내 들어내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더 빨랐다.
"울지 마. 난 네가 우는 것보다 웃는 걸 더 보고 싶단 말이야.”
솔직한 말과 함께 미안함과 고마움이 커서 울음이 차마 멈춰지지 않았다.
장소가 이렇다 보니 큰 소리를 내면서 울 수는 없었기에 훌쩍이는 소리만 더욱 커져갔다.
시몬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다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내 귓가에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보다 덩치만 조금 커졌지 우리는 아직 어린애에 불과했나 보다.
우리는 같이 눈물을 터트리며 너무나 반가운 재회의 순간을 만끽했다.
* * *
“눈이랑 코 빨간 것 좀 봐."
“다프네 너도 마찬가지거든."
둘 다 울음을 멈췄을 때 모양새는 참 우스웠다.
서로 빨갛게 부어오른 눈과 코를 보며 킥킥 웃고 나니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쩐 일로 온 거야?"
"베네디토가 오스왈드의 대상단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올린 문서를 우연히 봤어."
“설마 네가 허가해 준 거야?"
화들짝 놀라 물어보니 시몬이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바마마께서 허락한 거지. 오스왈드와의 교류를 늘릴 기회라고 생각하셨나 봐."
그러면서도 장난스럽게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물론 내가 적극적으로 추천하기는 했어.”
뿌듯한 목소리에 우리는 다시 해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잘 지내고 있었지?"
“물론이지. 다프네도 잘 지낸 거지?"
“그럼. 나 다리도 다 나았어.”
내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다리를 보여 주니 시몬이 그 누구보다 기쁘다는 듯 활짝 웃었다.
“정말 다행이다!”
슬픔보다 기쁨을 함께 축하해 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라고 하는말.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 가득한 시몬의 목소리에 마음이 저절로 따스해졌다.
오래간만에 행복으로 충만한 이 기분을 더 오래 유지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부드러운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직 꺼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었으니까.
“사실 말이야.”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지금껏 시몬에게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라그나르는 나 때문에… 그렇게 됐어.”
“라그나르….”
간신히 되찾은 밝은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리운 이름을 몇 번 되새기던 시몬은 힘겹게 웃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눈물이 다시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시몬도 라그나르의 친구니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괴로웠던 그 날의 기억을 꺼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그나르가 나를 위해 스스로 용의 감옥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는 말을 꺼냈을 때 시몬의 표정은 마치 악몽을 꾼 것처럼 처참했다.
한참의 정적 뒤에 시몬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 탓을 못 하겠어. 그렇다고 라그나르에게도 잘했다고 말하지도 못하겠고….”
시몬은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마저 말을 이었다.
“오히려 친구들이 그렇게 괴로운 상황에 있었는데도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내가 가장 원망스러워.”
마치 절망에 빠져 버린 듯 가라 앉은 목소리에 나는 시몬의 손에 내 손을 겹쳐 올렸다.
“시몬. 그렇지 않아. 네가 잘못한건 없어.”
“내가 너희에게 조금 더 힘이 되어 줬어야 했는데.”
후회로 가득한 목소리에 다시 코끝이 찡하고 아려왔다.
그러나 마냥 슬퍼하기에는 아직 꺼내야 할 말이 더 남아 있었다.
'나스에 대해서도 말해야겠지.'
시몬은 나만큼 라그나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모두가 아니라고 했지만 나와 같이 나스의 정체에 대해서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
'시몬마저 나스가 라그나르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다시 생각해 봐야겠지만..'
하지만 슬픔도 잠시 시몬은 굳은 결심을 한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라그나르의 몫까지 내가 널 지켜주고 싶어."
“시몬 사실은….”
“네가 앞으로도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내가 너를 지켜줄 테니까.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시몬과 나의 말이 맞물리는 것과 함께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꺼내던 말을 동시에 멈춘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 있었네, 다프네. 상단주님이 이만 돌아갈 시간이라고 하던데.”
이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반가운 목소리였다.
백 번의 말보다는 직접 한번 보는 것이 나을 테니까.
어느새 드리운 구름 뒤로 달빛이 감추어 주변이 어두워졌다.
그와 함께 나스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어둠에 물든 듯 검게 보였다.
시몬은 이보다 더 놀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스를 가리키고는 말했다.
“라그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