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조용한 정원에 다시 한번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간절한 목소리로 다시금 나스를 향해 말했다.
“라그나르 맞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에도 나 스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시몬은 답답하다는 듯 다시금 나 스를 재촉하였다.
“라그나르!”
“…저는 라그나르가 아닙니다.”
"뭐?"
짙은 어둠에 가려져 나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스의 대답에 시몬이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보란 듯이 얼굴을 구겼다.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네가 라그나르가 아니면 도대체 누군데!"
시몬은 울컥하고 올라오는 화를 참지 않고 나스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제 이름은 나스입니다.”
나스의 딱딱한 대답에 시몬은 망설이지 않고 살벌하게 그의 멱살을 추어올렸다.
“뭐 이 새끼야?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우리랑 장난하자는 거야?"
분명 사나운 목소리였으나 조급함이 느껴졌다.
시몬은 한참이고 나스의 멱살을 잡고 흔들다가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힘없이 떨구어진 고개가 안타까 워 내게도 슬픔이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장난 하나도 재미없어.”
“정말로 아닙니다.”
망설임 따위 하나 없는 말투에 시몬이 고개를 번쩍 들고서 다시 나스를 노려보았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드러나 보란 듯이 다시 그 빛을 환히 내뿜기 시작했다.
그림자로 물들어 있던 나스의 머리카락이 마법처럼 하늘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몬은 그저 멍하니 나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달라.”
몇몇밖에 모르는 라그나르의 비밀을 언급하며 시몬은 멱살을 잡은 손을 놓더니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하하하."
영혼 없는 웃음소리와 함께 시몬이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탈한 미소와 다르게 시몬의 반짝이는 은안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시몬은 마치 보라는 듯 뒤로 물러나더니 손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어깨에 묻은 고개 덕에 살랑이는 청은발이 내 뺨을 간지럽혔다.
“저 새끼를 어떻게 하면 좋지.”
험한 욕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역시 보자마자 바로 알아차릴 줄 알았다.
시몬이 나보다 좀 더 나았다.
***
수도에 저택을 샀다는 말을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좋아 깜짝 놀랐다.
“지금껏 너무 소박하게 살아왔지. 대상단에도 올랐으니 이 정도 집에서 살아야 하지 않겠니?”
엄마의 자부심이 넘치는 목소리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중심가에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아 조용하면서도 편의를 보기 좋은 곳.
'다시 말해 땅값이 제일 비싼 곳 이네.’
저택의 외관에 감탄한 것도 잠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타난 실내에 나는 깜짝 놀라 튀어나오는 감탄을 막을 수 없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 로비가 보였고, 그 위로 상아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계단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계단 근처에는 윈스턴과 처음 보는 하인과 하녀들이 고개를 숙인 채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상상 그 이상이네.'
나는 곳곳에 장식된 고급스러운 장식물과 미술품 등을 보다가 옆에 있는 시몬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재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다프네 네가 곧 아카데미 입학도 하잖니. 집은 학교랑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해.”
“어차피 기숙사 생활하는걸요."
“주말이나 방학에는 나올 수 있잖니. 설마 한 번도 안 나오려는 건 아니지?”
엄마의 목소리에 섭섭함이 느껴져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통학하고 싶은걸요.”
그래도 아카데미 규칙은 따라야 하겠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머무르실 곳도 착실히 준비해 놓았으니 편히 쉬다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네. 참, 준비한 선물이 하나 더 있는데 혹시 받았나?"
"아니요. 허가서면 충분하였는데 말이죠.”
또 무얼 준비해 오셨냐는 궁금증이 담긴 목소리에 시몬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봐. 다른 선물을 마저 들고 오도록.”
시몬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저택의 문이 열렸다.
여름의 화사한 빛을 모두 가져간 듯 빛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받듯 문을 연 사내는 당당하게 발걸음을 움직여 안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체구에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살짝 곱슬거리는 은발과 함께 빙긋 지어진 미소가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선물이라고 하기에 들어오는 사람의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았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존재자체가 선물이었으니까.
“악셀리우스!”
엄마의 입에서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오래간만이야, 클로에!"
악셀리우스는 입가에 지어진 웃음을 참지 못한 채 엄마에게 다가가 망설임 없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주변에서 꺄악 하는 고용인들의 귀여운 감탄 소리가 들렸다.
물론 나 또한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엄마는 어쩔 줄 몰라 하다 이내 악셀리우스를 마저 껴안았다.
악셀리우스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린 것을 보니 또 눈물이 터질 것 같은 모양이었다.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
"나, 나도 그래.”
오랜만에 만난 연인이라도 된 듯 클로에와 악셀리우스는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두 사람도 참 평탄한 연애를 못하네.’
생각해 보면 악셀리우스가 변방에 나가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하지 못했고, 그 후 돌아왔더니 이번에는 엄마가 클레멘스를 훌쩍 떠나 버렸으니.
'나 때문이지만.’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안타까운 연인 바라보듯이 하는데 악셀리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맙소사. 여기 있는 아가씨가 정말로 다프네인 거야?"
“오래간만이에요, 아저씨.”
“세상에나. 벌써 다 큰 숙녀가 되어 버렸구나.”
악셀리우스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톡 하고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게 또 악셀리우스다워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벌써 열셋이나 되었는걸요.”
“아이는 눈 깜짝할 새 자라난다더니.”
악셀리우스가 내게로 다가오려다가 멈칫했다.
악셀리우스의 표정은 온갖 감정이 요동치는 듯 복잡해 보였다.
"내가 네게 다가가도 될지 모르겠구나.”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이 마음 착한 아저씨는 우리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는지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제자리만 맴돌았다.
“저도 오래간만에 봐서 기쁜걸요.”
하지만 내 말에도 악셀리우스는 조심스러웠다.
헤어지기 직전의 사건들 때문에, 날 대하기가 더욱 조심스러운 듯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악셀리우스를 향해 걸어갔다.
내가 먼저 다가가자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악셀리우스를 와락껴안았다.
그러자 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곧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저택의 로비에 침묵이 쌓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기쁜 선물이야, 시몬. 고마워.”
“천만의 말씀.”
오래간만의 재회는 정말 상상치도 못한 선물이어서 나도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 * *
“주방장이 간식을 준비해 가져왔습니다.”
"저런. 수고가 많군.”
테이블 위로 케이크와 쿠키가 놓였다.
나스는 들고 온 디저트를 내려놓고서도 나가지 못하고 엉거주춤 우리의 곁에 서 있었다.
“친우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해서 말이네. 누가 들으면 곤란한지라. 그대는 이만 나가 줬으면 좋겠군.”
“하지만 저는 지금 다프네의 호위고….”
"내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지.
그리고 모시는 상사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보기 좋지만은 않군.”
부드러운 타박과 함께 시몬은 앞에 놓인 시원한 차를 들이켰다.
"아무리 내전 때문에 힘든 상황이라 해도 오스왈드의 수도야.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밖에서 다프네의 이미지가 어떻겠나.”
"하긴. 시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네.”
나는 밝게 웃으며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어차피 내 호위보다는 상단의 호위잖아? 이제 외출할 일도 적을테니 엄마에게 가 봐.”
“하지만….”
“내 호위는 플뢰르면 충분한걸."
연무장에서 수련하고 있을 플뢰르가 들으면 좋아할 말이었지만 일부러 나스 앞에서 꺼내 들었다.
나스는 움찔하고 몸을 떨더니 힘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달칵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발걸음 소리마저 멀어져 들리지 않게 되자 시몬이 짜증 섞인 목소리를 꺼내었다.
“이해가 안 되네. 분명 라그나르맞는 것 같은데 왜 다른 사람인척 연기를 하지?"
"글쎄. 처음 봤을 때부터 작정하고 속여서 나도 잘 모르겠네.”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이유라도 있나? 아니 있다 해도 우리에게 그럴 필요가 있나."
시몬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시몬은 나스가 라그나르라고 확신하는 거야? 그저 닮은 사람일수도 있잖아.”
“황태자인 나를 보고 저렇게 무덤덤한 놈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
당당한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황태자면 그 정도 자신감을 가져도 될 만했기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에 찬 목소리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숨길 것이라면 제대로 숨기던가. 일부러 이렇게 간식을 가져오면서 우리 사이에 끼려고 아등바등하는 게 딱 보이잖아."
“네 말 들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라그나르가 아니었다면 굳이 이러지는 않았겠지.”
확실히 시몬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시몬이 오고 나서부터 나스의 태도가 이상하게 변해서 플뢰르도
'저놈이 더위를 먹은 것 같군요.'
라고 혀를 차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그러니까 더 화가 나는 거야.
둘만 있겠다고 하면 미친 듯이 요동치는 눈깔이나 어떻게 했으면 좋겠네.”
라그나르 한정으로 나오는 시몬의 험한 말투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굳이 굳이 숨긴다면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내 물음에 시몬이 앞에 놓인 쿠키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게 가장 그럴싸한 대답이기는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판을 깔아 줬는데도 답을 하지 못한 것 보면 확실히 이쪽에 가깝지 않으냐는 생각을 했었으니까.
시몬은 곧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겠지. 그리고 나는 이쪽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하지만 난 말할 기회를 굉장히 많이 줬는걸.”
일부러 자리까지 마련했었는데.
내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불만을 내뱉자 시몬이 문을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혀를 찼다.
“그걸 놓쳤으니까 저렇게 낑낑거리며 우리 주변을 맴도는 거겠지.
어렸을 때도 그랬지. 둘만 어울리는 걸 가만히 지켜보지 못하는 성미를 가졌었잖아.”
'그건 시몬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나는 눈치를 보며 이 말을 아꼈다.
그때 시몬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그래. 그 방법이 있었는데!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