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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00화 (99/185)

제100화.

"어쩜, 아가씨. 너무 잘 어울리세요!”

경쾌한 하녀의 목소리에 로비에 있는 시선이 내게로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다들 지나가다 말고 나를 보자 민망함을 감추고는 빙긋 웃었다.

내 환한 미소에 모두가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하기 바빴다.

입바른 말이라도 칭찬은 기분이 좋았기에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한 계단씩 내려갈 때마다 부드러운 치맛단이 종아리를 간지럽혀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악셀리우스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클로에, 다프네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일지도 몰라. 갑자기 하늘로 훨훨 날아가 버리면 어떻게 하지.”

“참 쓸데없는 소리구나.”

엄마가 한심하다는 말투로 악셀리우스를 흘겨보았지만, 그의 표정에서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천사 안 할래요. 하늘로 날아가기 싫으니까.”

나름 재치 있게 답을 던지자 악셀리우스는 뭐가 그리 좋은지 입가에서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화사한 하늘빛 원피스는 여름 날씨에 걸맞은 얇은 소재로 바람이 불면 살랑살랑 흔들리는 치맛단이 참으로 어여뻤다.

"오늘은 햇볕이 뜨거울 텐데.”

엄마의 말에 하녀가 준비해 온 모자를 쓰고서야 외출 준비가 끝이 났다.

때마침 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 오더니 이 옷을 선물해 준 사람이 등장했다.

“역시. 오늘도 예쁘다, 다프네.”

자랑스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몬이였다.

“좋은 아침이야, 시몬.”

나는 고개를 돌려 시몬을 바라보며 함께 웃었다.

시몬은 내 원피스의 색과 비슷한 하늘색 셔츠에 바지를 입고 편한 복장으로 서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를 향한 모두의 눈이 기대감에 반짝이는 것이 보여 일부러 들으라는 듯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선물이 너무 과해. 매일 이렇게 선물해 줄 필요는 없는데.”

가벼운 타박에 시몬이 어깨를 으쓱하며 능글맞게 답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안 남은 소중한 친구에게 그동안 못 해 준 생일 선물을 주는 것으로 생각해 줘.”

시몬은 마치 연기를 하듯 과한 몸짓으로 내게 다가와 모자의 리본을 묶어 주며 말했다.

“라그나르가 없으니 내가 더 잘챙겨 줘야지. 그래야 라그나르도 편히 눈감을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훈훈한 분위기가 우리 사이를 맴돌았다.

엄마와 악셀리우스도 주변에 있는 고용인들의 눈빛도 참으로 따스했다.

마치 꽃이 주변을 떠다니듯 아름다운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잠시 유독 다른 감정이 가득 담긴 시선이 와 닿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그것을 느끼면서도 모른 척 일부러 더 환하게 웃었다.

“그럼 오늘도 오스왈드가 낯선 나를 위해 함께 외출해 주겠어?"

“소중한 친우와 함께인데 어디든가지.”

시몬이 내민 하얀 손을 망설임없이 꼭 붙잡았다.

그에 더욱 따가운 눈빛이 와 닿았으나 우리는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마차에 오르고서야 떠난 시선에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시선이 갈수록 살벌해지는 것 같은데. 내 뒤통수 무사한가.”

시몬이 자신의 머리를 만지면서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시몬이 장난이 아니라며 한숨을 덧붙였다.

“저렇게 티가 나는데 난 왜 처음에는 몰랐을까.”

“연기를 잘했나 보지.”

“우리처럼?"

"그래, 우리처럼.”

나와 시몬은 마주 보고서는 악동처럼 씨익 웃었다.

시몬이 말한 것은 라그나르를 자극하기 위한 질투 작전이었다.

'우리 둘만 있는 걸 죽어도 못보던 놈이니까 보란 듯이 매일 함께 외출하는 거지.'

그렇게 둘이서만 외출을 시작하게 된 지 벌써 사흘째이다.

시몬은 매일매일 내게 커다란 선물 상자를 하나씩 안겨 주었다.

밀린 생일 선물이라면서 준 것은 모두 화사한 색의 옷이었는데 별 생각 없이 입고 나갔다가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언제나 시몬은 내게 선물한 옷들과 색을 맞춰서 입고 나왔다.

커플룩처럼 보이는 비슷한 옷차림은 누가 봐도 시몬의 의도가 보였다.

악셀리우스가 둘 다 너무 잘 어울린다며 호들갑을 떨어서 저택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보게 되었고.

당연히 그중에는 나스도 있었다.

충격받은 시선이 뒤통수에서 떨어지지 않아 얼마나 신경 쓰이던지.

그런 하루하루가 벌써 사흘째 반복이 되니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이 외출에 적응한 듯 조심해서 다녀오란 말과 함께 웃으며 배웅을 해 주었다.

나스만 빼고,

나스는 연기하던 것도 집어치울 생각인지 그 이후로도 뒤따라오는 시선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두들 나스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내게까지와 닿았으니 그가 얼마나 심란해 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오늘도 따라올까?"

"며칠 동안 미련 있는 놈처럼 계속 주변을 어슬렁거렸으니 그러겠지?"

"하긴.”

나는 시몬의 에스코트와 함께 마차에서 내리고는 번화가 거리를 거닐기 시작했다.

'즐겁네.’

분명히 몰래 뒤따라오는 호위들이 있겠지만 친구와 함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놀러 다니는 것은 오랜만인지라.

지금 이 순간이 나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계획 중 하나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혹시 이렇게 둘만 다니는 게 불편해?"

내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는지 시몬의 목소리가 한껏 조심스러웠다.

살살 내 눈치를 보는 것에 일부러 더 과장하듯 웃어 보였다.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옆에 있어서 너무 좋은걸. 오히려… 네가 떠나고 나면 너무 외로울 것 같아서 그게 걱정이네."

시몬이 오스왈드에 체류하는 기간은 일주일이었고, 벌써 나흘이 지나갔다.

이제 사흘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러한 일상도 곧 사라진다는 뜻이겠지.

'그 전에 나스가 입을 열까?'

여러모로 걱정이 들 때쯤 시몬이 갑자기 멈춰 서더니 내 두 손을 꽉 붙들고는 말했다.

"네가 아카데미 입학하고서도 계속 편지를 주고받으면 되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린 계속 친구잖아.”

자신만만한 미소에는 한 치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렇네. 멀리 있다고 내가 혼자인 것도 아닌데.”

시몬을 따라 환히 웃으며 불안해졌던 마음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시몬은 정말 믿음직한 친구야.”

“과찬이야.”

우리가 서로 마주 보고 맞잡은 손을 흔들며 사이좋게 걷기 시작하자 다시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역시 라그나로, 실망시키지 않고 따라왔군.”

마치 사고를 치기 전 눈빛을 빛내는 아이처럼 시몬의 얼굴에 장난기가 맴돌았다.

그 표정이 어찌나 사악해 보이는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시몬. 너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아.”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네."

시몬은 잘못한 것 하나 없다는듯이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나도 말리지 않고 더 어울려 줄 생각이다.

* *

우리는 일부러 라그나르를 따돌려 조용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번화가 중심의 천사 동상이 있는 분수대 근처 벤치에 앉았다.

분수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배경이 되어 평화로운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그 광경이 어쩐지 눈이 부신 것 같아 가만히 바라보는데 옆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시몬이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아니, 저기 뛰어노는 애들이 마치 우리 어릴 때 같아서."

남자애 두 명과 여자애 한 명이 덥지도 않은지 투닥거리며 싸우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얼굴에 가득한 미소는 마치 한여름의 해바라기처럼 활짝피어나 있어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찬 느낌이 들었다.

"보고 있자니 그리워져서."

나지막하게 울리는 시몬의 목소리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 축제에서 저렇게 뛰어놀았었지.’

물론 나는 라그나르에게 업힌 채 함께 논 것이지만.

고작 몇 년 전인데도 추억에 젖어서 기분이 묘해졌다.

우리 사이로 적막이 흐르고 이내 시몬이 착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라그나르는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걸까?”

시몬답지 않은 자신감 없는 목소리에 나 역시 같은 마음이 되어 울상을 지었다.

"나는 곧 떠나는데 그때까지 정체를 안 밝힌다면 정말 화가 날 것 같아.”

아드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시몬의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는 얼핏 분노가 서려 있었다.

“주먹 한 대로 용서해 주려고 했지만 이제 그걸로 못 참을 것 같은데.”

오늘 날씨는 한여름이 분명한데 유독 시몬의 근처에만 차갑게 냉기가 서리는 것 같았다.

싸늘하게 가라앉는 표정에 나는 시몬의 손을 잡았다.

답답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기에 위로하듯 그 위를 가볍게 도닥여주었다.

내 위로를 느꼈는지 시몬이 이내 싸늘한 표정을 지우고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짜증을 내뱉었다.

“어렸을 때 멍청하다고 놀리는 게 아니었어. 진짜 이렇게 멍청해질 줄 누가 알았겠어.”

“혹시 밝히지 못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있기는!”

시몬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다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떨구었다.

“아.”

"저런. 그러니 얼른 먹지."

이건 이미 다 먹은 자의 여유였다.

시몬이 울상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라그나르 때문이야.”

"맞아. 라그나르 때문이네."

시몬을 위로하며 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었다.

“손에 다 묻었잖아.”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던 손을 끌고 오자 그가 멈칫 굳더니 천천히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일부러 손가락 하나하나 천천히 닦아 주는데 시몬이 가까이 오더니 작게 소곤거렸다.

“가까이 왔어?"

"응. 뒤에 있어.”

우리는 동시에 눈을 마주치고서는 활짝 웃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즐거워 죽겠다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다프네는 정말 친절하고, 다정해. 역시 소중한 내 친구밖에 없다니까.”

“하나밖에 없는 친구인데 이 정도야 해 줄 수 있지. 전혀 귀찮지 않은걸.”

손을 다 닦아 주고서 고개를 들려는데 갑작스럽게 시몬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시몬?"

“잠시만. 리본이 풀리려고 하네.”

'누가 봐도 튼튼히 잘 묶여 있는데?' 속마음과 다르게 나는 아무런 말없이 시몬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시몬이 내 모자의 리본을 풀더니 천천히 다시 묶어 주기 시작했다.

뒤에서 더욱 따가운 눈빛이 느껴졌지만, 시몬의 손은 멈추지를 않았다.

사락사락 리본이 움직이는 소리가 듣기 좋아 미소를 짓는데 시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시몬? 혹시 어디 아파?"

“…아프긴.”

시몬이 천천히 멀어지더니 과하게 웃으며 말했다.

“라그나르가 있었다면 화냈을지도 모르겠다! 와, 없어서 다행이 네!”

“그러게. 둘이 싸우면 놓고 혼자 자리를 떠났을지도 모르겠어."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어느새 우리를 지켜보던 따가운 시선은 사라졌다.

“갔어?"

“갔나 봐."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놀리는 건 재미있지만 이제 그만하고 싶어.”

"나도. 오랜만인데 같이 놀다가 가면 좀 좋나?"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그런데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야?”

“정말 오래간만의 휴가니까."

“그동안 못 쉬었어?”

“자꾸 공작이 귀찮게 시비를 걸어서…. 아차.”

시몬이 말하다 말고 자신의 입을 막았다.

“공작? 설마 헤로니스 공작이?"

시몬의 난감해 보이는 표정이 보였으나 이해가 가지 않기에 쉽게 넘어갈 수 없어 물었다.

"어째서? 공녀와 약혼한 것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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