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01화 (100/185)

제101화.

시몬은 난감한 표정으로 괜히 눈을 도록도록 굴렸다.

"아,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더 먹을까.”

“괜히 말 돌리지 말고.”

끄응 하고 앓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몬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사실 약혼을 안 했어.”

“왜?”

“말하면 혼낼 것 같아서 말 못하겠어."

“장난하니?”

당장 말하라며 눈을 흘기자 시몬이 입을 삐죽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헤로니스 공녀랑 하기 싫다고 억지 부렸지.”

“그게 통했다고?"

시몬은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어릴 적부터 황실에서 금안을 강조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일 줄 알았다.

'기쁘기야 하지만.….'

내 소중한 친구가 내가 싫어하는 가문과 연관이 안 된다니 나야 좋았다.

좋기는 했지만 역시 걱정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괜찮은 거야?”

내 침울한 목소리에 시몬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활짝 웃었다.

“그럼. 내가 누군데?"

“…황실의 유일무이 황자?"

“그래. 걱정할 필요 없어. 애초에 공작가 자체가 마음에 안 들기도 했고.”

당당한 목소리는 마치 나를 위로 해 주기 위해 꺼낸 말 같았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것 같으니 나도 웃는 것이 낫겠지.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에게 나까지 마음의 짐을 얹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네가 더는 눈 색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야.”

“응?”

“금안이 아니어도 상관없으니 공녀와의 약혼을 무른 것 아니야?"

시몬이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면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아니, 그러니까.”

시몬이 한참 멍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깔끔하게 정돈된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흩트렸다.

“시몬?”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이는데 시몬이 열이라도 받은 듯 붉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 진짜 바보 같아.”

“혹시 더위라도 먹었어? 이만 돌아갈까?"

걱정되는 마음에 조심스레 묻자 시몬이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하지. 너무 부끄러워."

"?"

시몬이 자꾸 영문 모를 소리만 내뱉어 재촉하기를 그만두고 가만히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시몬은 붉어진 얼굴을 가까스로 가라앉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말 듣고서 깨달았어.”

“자꾸 혼자만 알아듣는 소리 할래?”

"나 정말 금안이 아니어도 괜찮은 것 같아. 나도, 내 비가 될 사람도!”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 목소리에는 기쁨이 서려 있었다.

"맞아. 눈 색이 어떻든 그냥 좋아하는 사람을 내 옆에 있게 하고 싶었던 거야. 눈 색은 그저 변명이었어.”

“시몬?"

시몬은 한참 혼자 중얼거리더니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역시. 너무 좋아, 다프네.”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런담.”

시몬이 좋다니 다행인 것 같기야 하지만.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기뻐 보이니 됐다.

***

기분 좋아 보이는 시몬 덕에 한참을 더 돌아다니다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씻고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려는데 키키가 뽀르르 걸어오더니 발언저리에서 귀엽게 삐용삐용 목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혼자 심심했어? 하지만 외출만 하려고 하면 키키 혼자 저택을 돌아다녔잖아.”

키키의 앞발을 잡고서 투덜거리다 억울해 보이는 표정이 귀여워 푸스스 웃고는 귀부터 꼬리까지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갑자기 툭 하고 가벼운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키키가 동시에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바닥쪽 문 틈새에 무언가가 껴 있는 것이 보였다.

키키가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 움직이더니 도도도 달려가 입으로 그걸 물었다.

키키가 가져다준 것은 투박하게 접힌 쪽지였다.

“뭐지?”

쪽지를 펼치니 악필로 무언가가 쓰여 있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내일 오후 여섯 시에 번화가 중심에 있는 아이린느 레스토랑에서 보자.

쪽지의 본문 아래 작게 '나스'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드디어!’

사흘 동안 열심히 돌아다닌 보람이 생겼다.

답답하기 짝이 없던 문제가 곧 해결될 것 같아 기뻐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나는 키키를 끌어안은 채 침대 위로 가볍게 몸을 던졌다.

“키키. 내일이면 드디어 내 오랜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기뻐.”

나스의 입에서 자신이 라그나르였다는 말이 나오면 얼마나 설레고 기쁠까.

아카데미에 수석으로 합격한 것보다 더 기쁠 것 같았다.

나는 입가에 지어지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키키와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밤에는 어쩐지 그리운 추억속의 꿈을 꿀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내 정체를 다프네에게 들켜서는 안 돼.”

나스, 아니 라그나르가 처음 다 프네를 마주하고서 다짐했던 말이다.

자신의 욕심으로 다가갔으나 마지막 선은 지키고 싶었다.

라그나르의 죽음은 분명 다프네에게 큰 상처로 남아 있을 테니까.

죄책감을 떠안을 각오를 하고 나서도 내내 후회하고 있겠지.

애써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으나 가끔 보이는 그리운 눈빛은 너무 안타까워 껴안아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자신은 여기 잘 살아 있다고, 그렇게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고.

자신이 다프네를 지켜 주겠다고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프네는 아니겠지.'

다프네는 착한 아이니 분명 죽은 줄 알았던 친구가 살아 돌아오면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용의 감옥 앞에서 했던 말처럼 다시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라그나르는 씁쓸한 웃음을 삼키며 홀로 있을 때 언제나 중얼거렸다.

“다프네에게 들켜서는 안 돼. 모두에게 들켜서는 안 돼."

그것은 자신의 현재 위치를 잊지 말라는 주문과 같았다.

신경이 쓰인다는 이유로 주변에 맴돌던 것도 그리고 오스왈드까지 함께 따라간 것도 모두 라그나르의 욕심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보다가 떠나자. 괜찮아 보이면 떠나자.'

정말로 아주 조금 욕심을 냈을 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각자의 탑으로 떠나는 날.

다프네와의 눈물 어린 상봉 뒤로 두 사람이 자신에게 던지는 경계가 가득한 날카로운 시선이 무덤덤하게 느껴졌다.

'왜 괜찮은 거지?'

처음에는 다른 사람인 척하려고 일부러 말을 아꼈다.

억지로 읽었던 책 중 로맨스 소설도 간간이 끼어 있었는데 그곳에 나온 남자 주인공들이 다 그러더라.

말을 아끼고, 차갑게 시선을 던지고, 비밀이 많은 그 모습이 멋지게 보였기에 그렇게 하면 정체는 확실하게 숨길 수 있을 줄 알았다.

확실히 지금껏 의심은 받았어도 들키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니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자신을 경계하더라도 속상한 티를 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두 사람한테 미움받아도 괜찮다.

고? 나 정말 괜찮은 건가?'

스스로 그럴 리가 없다고 질문을 던져 보았는데 마음은 불안하게 요동치지도 않고 평화로웠다.

그때부터 이상함이 느껴졌다.

어느 날 다프네가 자신을 위해 디저트를 준비했을 때 정체를 숨기는 것은 여기서 끝일 것이라 생각했다.

'창피하다.'

꼴깍하고 침을 넘기는 소리도 부끄러웠고, 여기까지 와서 끝까지 부정하는 것도 우스웠기에 이제는 진짜 밝힐 때라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준비한 것을 보면 내가 나타나도 괜찮다고 생각한 거겠지…?'

마음속의 불안이 자꾸 안 된다고 속삭였지만 그래도 꾹꾹 담아 온 비밀을 털어 내려고 했다.

'내가 라그나르야.’

이 한마디를 내뱉고 싶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라그나르의 입은 제 의지대로 열리지 않았다.

마치 허락된 말이 그저 아니라는 대답밖에 없다는 듯이.

답답함에 억울한 표정을 짓고 싶어도 표정도 제멋대로 어색히 시선을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다프네의 실망이 가득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오히려 답답한 것은 라그나르 본인이었다.

역시 무언가 이상한 게 맞았다.

도대체 자신의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혹시 요제프가 벌인 짓일까?'

지금껏 다프네의 옆을 떠나고 싶지 않아 뭉그적거리던 것이 후회가 되었다.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계속해서 자리를 비우면 피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요제프를 찾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빌어먹을 고룡은 끝끝내 나타나지 않아 허탕 칠 뿐이었지만.

그리고 시간이 흘러 수도로 올라온 날 저녁.

'시몬이네.'

자신의 또 다른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바로 자신을 알아보자 속에서 울컥하고 감정이 차올랐다.

밝히고 싶다.

하지만 밝힐 수 없겠지..

라그나르가 예상한 것처럼 입에서는 부정의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시몬이 낮게 욕을 지껄이는 것이 들렸으나 오히려 미치도록 답답한 사람은 라그나르 자신이었다!

“젠장.”

그 후 둘은 보란 듯이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드레스 코드를 맞추듯 옷 색도 함께 맞춰서 사이좋게 손을 잡고 외출을 한다.

'오른쪽은 내 자리인데.'

라그나르가 없으니 시몬이 당당하게 다프네의 오른손을 차지하였다.

라그나르는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다.

'이제 입이 열릴 때도 되지 않았나.'

라그나르는 자신이야말로 답답하고 억울하다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마음속에만 메아리치는 고백은 그 누구도 들을 수가 없었다.

사흘째 되는 날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용암이 들끓듯 뜨거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나도 리본 잘 묶어 줄 수 있는데.’

그러다 문득 시몬과 눈이 마주쳤다.

시몬은 라그나르를 보며 피식하고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에 속에 덩어리진 울분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펑 하고 터져 버렸다.

그래. 말할 수 없다면 편지로 써서 보내면 된다.

속에서 차오른 분노가 너무 커서인지 글씨도 마구 휘갈겨졌다.

예쁘게 써서 보내고 싶은데 속상함과 울분에 떨린 손이 개발새발글씨를 날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말로 할 수 없다면 글로 전하면 되겠지.'

요제프의 당부고 뭐고 라그나르는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셋이 모인 자리에서 당당하게 종이에 써서 밝히리라.

물론 분노한 시몬에게 몇 대 맞을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 사정을 써서 보여 주면 두 사람 다 이해해 줄 것이다.

드디어 정체를 밝힐 수 있다는 생각에 두근두근 뛰는 심장이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서 약속 시각보다 이른 시간에 예약한 레스토랑에 향했다.

비밀을 보장해 주듯 주변이 가로막힌 룸에 들어와 달달 떨며 불안한 마음으로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라그나르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온 건가. 빨리 왔네.'

긴장되는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등장한 사람은 다프네와 시몬이 아니었다.

하늘빛 머리가 조명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사고뭉치를 바라보는 시선에 오히려 라그나르는 가까스로 참고 있던 또 다른 설움이 터져 나왔다.

라그나르는 짜증이 가득 담긴 소리로 사내를 불렀다.

“요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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