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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02화 (101/185)

제102화.

라그나르의 목소리에 요제프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이다."

여유롭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라그나르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간 나 없이도 잘 지낸 것 같고"

“잘 지낸 것처럼 보여?"

“딱 보아도 다친 곳 하나 없어 보이는데.”

라그나르의 화가 담긴 목소리에도 요제프의 반응은 태평했다.

'참아야 한다.'

라그나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짜증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일을 크게 벌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라그나르는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형클였다.

“됐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내 몸이 이상한 것 같아. 아니 이상해졌어.”

라그나르는 마치 할아버지에게 투덜거리는 손자처럼 자신이 지금껏 겪은 이상한 느낌에 대해서 주절주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소중한 사람들이었는데 봐도 크게 감응이 없고, 표정도 제멋대로 지어지고."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안 나와.”

"네 정체에 관한 것 말이냐?”

요제프의 물음에 라그나르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요제프가 별것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그건 내가 네게 용언을 걸어 놔서다.”

"뭐?"

라그나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 요제프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내가 갑자기 외출하면 이리저리 날뛰는 네 성격에 가만히 레어에 있겠느냐?"

오히려 타박이 어린 목소리에 라그나르는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그를 노려보았다.

"네 정체를 어떻게서든 숨기고, 그에 관한 모든 것에 무덤덤하게 반응하도록 용언을 걸고 갔으니 그럴 테지.”

“요제프!”

가만히 듣고 있던 라그나르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도 잠시 요제프의 눈이 살벌하게 빛이 났다.

엄청난 기운이 라그나르를 짓눌렀다.

“으윽.”

고룡의 기운은 이제 갓 헤츨링을 벗어난 라그나르에게는 지독히도 무겁고 두려운 것이었다.

강렬한 기백에 짓눌리면서도 라그나르는 눈에 힘을 풀지 않고 필사적으로 요제프를 노려보았다.

식은땀이 흐르고 안색이 새하얗게 질릴 때쯤 요제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기운을 거두었다.

“기어코 네 반려를 찾아서 정체를 밝히고 싶었냐? 내가 그리 경고를 하고 갔는데도?"

“…만난 건 우연이었어."

“사실은 반려의 인을 맺는 것보다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게 맞는 것 같구나.”

라그나르가 변명처럼 말을 덧붙이자 요제프는 한심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고개를 절레절레저었다.

“애초에 요제프가 반려를 맺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굳이 외출할 일 없었던 것 아닌가?"

라그나르가 그 나이 먹도록 연애도 못 해 보고 뭐 했냐며 중얼거렸다.

라그나르의 투정을 들어주던 요제프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 참 어이가 없구나. 누가 연애를 못 해 봤단 말이냐.”

“누구겠어.”

“해 봤다.”

"거짓말.”

라그나르의 목소리가 더더욱 부루퉁해졌고, 요제프는 더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느끼며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고작 반려의 인 때문에 내가 레어에 너 같은 꼬맹이를 홀로 두고 외출했을 것 같으냐?"

요제프는 머리를 짚고선 답답함에 저절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복잡한 듯 골이 생길 정도로 찌푸린 미간은 펴질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마. 너 혹시 형이 있나?"

요제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라그나르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동안 기억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한 사내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러한 라그나르의 반응에 요제프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

“음?”

요제프는 겨우겨우 자신을 한 대때리고 잠든 라그나르를 보며 피식 웃었다.

맞은 뺨이 스치기만 해도 고통스러울 만큼 붉게 달아올라 있었음에도 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나쁘지 않단 말이야.”

요제프는 거칠게 기침을 쏟아 내면서도 입가에 가득 미소를 지었다.

“내가 죽기 전까지 잘 돌봐 주고 싶은데 말이지.”

요제프의 작은 중얼거림이 넓은 레어에 울렸지만 기절하듯 잠에 빠진 라그나르는 들을 수가 없었다.

“어디 상태가 어떤지 볼까.”

요제프는 다친 라그나르의 상태를 살펴보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를 치료해 주려고 했다.

'겸사겸사 지난번에 확인 못 한 드래곤 하트의 상태도 살펴봐 줄까.'

하지만 곧 요제프의 입가에서 미소가 빠르게 사라졌다.

“이건….”

요제프가 심각한 표정으로 라그나르의 가슴에서 손을 떼어 냈다.

"드래곤 하트에 이상한 기운이 얽혀 있구나.”

아주 사악하고 또 악독한 기운이었다.

요제프는 이것의 정체를 알고서 복잡한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주에 걸려 있다라.”

단순한 저주라면 이리 착잡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제프 정도의 고룡이라면 어지 간한 저주는 대부분 해주가 가능하니 감기보다 더 가볍게 넘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라그나르에게 걸려있는 저주는 달랐다.

"드래곤 피로 내린 저주야."

드래곤은 신이 사랑하는 생명체 이기에 드래곤을 이루는 모든 것은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중 가장 강력한 것들을 뽑자면 첫 번째는 드래곤 하트요, 두 번째는 드래곤의 피라 말할 수가 있었다.

반려의 인 또한 드래곤 하트가 멀쩡해야 맺을 수 있는 것인데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런 경우라면 해주도 저주의 시전자가 아니면 할 수 없지.”

그렇다면 과연 이 어린 헤츨링에게 저주를 건 자는 누구일까.

* * *

어린 헤츨링이라 하면 보통은 가족들이 지켜 주는 것이 대부분.

요제프는 라그나르의 가족에 대해서 알아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라그나르는 기억조차 못 하니.

내가 나서는 것이 맞겠지.'

같은 종족의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요제프는 떠나기 전 라그나르에게 가볍게 용언을 걸었다.

'만약에 저주가 가족들과 관련이 있다면 이름도 정체도 숨기는 것이 나을 거다.'

라그나르는 요제프가 사라진 것을 알면 분노를 터트리다가도 다 프네라는 아이에게로 가 제 정체를 밝힐지도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그렇게 요제프는 먼 여행길에 올랐다.

클레멘스 제국을 제외한 다른 왕국들을 빠르게 둘러보았지만 소득은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은 곳은 오스왈드 제국이었다.

운이 좋다 해야 할지 오스왈드제국에는 요제프보다는 못해도 나이를 꽤 먹은 드래곤이 살아 있었다.

같은 동족을 만난 것이 반가운지 자신을 사라라고 소개한 레드드래곤은 즐겁게 대화에 응했다.

“혹시 이 근처에 다른 드래곤은 없나?”

“먼 과거라면 많았지. 옛날에는 이 근처에 굉장히 매력적인 블랙드래곤도 살고 있었다고."

사라는 자신의 옛 기억을 짚어 보더니 안타까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죽었나 보지?”

“죽기야 죽었지. 다만 신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죽은 것이 문제이려나.”

드래곤은 신의 사랑을 받는 생명체이기에 죽음을 맞게 되면 먼지가 되어 자연에 스며들고 이내 신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신의 품이 아닌 이 땅에서 죽었다는 소리는 평범한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말이었다.

요제프는 피곤한 눈가를 주무르며 물었다.

“시체가 남았나?"

“그래.”

사라의 침통한 목소리에 요제프는 자신의 여행이 곧 끝날 것 같다고 직감했다.

"다들 그러더라. 저주에 쓰여 신의 품에 돌아가지 못해 이 땅에서 더럽게 썩어간 것이라고.”

“저주라…. 본인이 건 저주인가?"

"글쎄. 그놈은 무언가를 위해 저주를 걸 만큼 악독한 녀석은 아니었어. 다 죽어 가던 녀석이었으니 누군가가 저주에 그를 이용한 거겠지. 불쌍한 시어볼드 녀석.”

시어볼드.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역시 라그나르 녀석의 부모 이야기가 맞았다.

“그 드래곤은 자식이 없었나?"

요제프의 물음에 사라는 다시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아냐. 있었어. 첫째는 인간과 혼혈이었고, 둘째 녀석은 이제 갓 알에서 깨어난 헤츨링이었지.”

사라는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맞아. 그래서 시어볼드가 죽고 그 혼혈 녀석이 어떻게 완벽한 드래곤을 키울 수 있겠냐며 주변에서 떠들곤 했었지."

"혼혈이라고?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 아니, 혹시 이름이라도 알고 있다면..."

"몰라. 누가 혼혈한테 관심을줘?”

사라의 목소리에 짜증과 귀찮음이 어렸다.

드래곤 사회에서 혼혈은 온전히 인정받기 힘든 존재다 보니 그녀의 반응도 이해가 되었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슬슬 이 대화의 끝을 느끼며 요제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제프는 사라에게 인사를 하고선 그녀가 말해 준 시어볼드의 시체가 남아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아주 깊은 동굴에 커다란 드래곤의 뼈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을 보며 요제프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 보았다.

'이 드래곤은 저주에 이용당한 것이 맞다. 하지만 사라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블랙 드래곤 녀석은 자식을 꽤 아낀다 하였고.'

정확한 물증은 없었으나 심증에 의하면 범인은 딱 한 사람이었다.

'혼혈이?'

감히 인간의 피가 섞인 혼혈이 순수한 드래곤을 이용해 다른 순혈에게도 저주를 내렸다라.

'아들이 아비의 피를 이용해 동생에게 저주를 걸었다라….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이야기인지.'

드래곤도 아닌 혼혈 녀석은 기운도 옅은데 도대체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요제프는 지끈하고 아파지는 머리를 붙잡으며 지금이 멍청한 대자에게 돌아갈 때라는 것을 느꼈다.

* * *

요제프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라그나르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형이 내게 저주를 내렸다고.…?"

“심증뿐이지만.”

덜덜 떨리는 목소리 뒤로 라그나 르가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안나는 걸 수도 있다. 우선 최대한네 형을 찾아보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야 해."

요제프 또한 힘겨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신의 품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하루빨리 레어로 돌아가서…."

요제프의 뒷말이 차마 이어지지 못했다.

라그나르가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더니 끔찍한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으으으윽!"

“라그나르? 라그나르!"

라그나르는 갑작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요제프의 부름에 답하고 싶어도 입에서 나오는 것은 고통에 찬 신음뿐이었다.

라그나르가 받아들일 수조차 없는 어두운 감정들이 그를 갉아먹는 것이 느껴졌다.

고통에 찬 울음소리, 원망, 분노, 증오, 배신감.

그 모든 감정을 담은 무언가가 제게 쏟아지던 것을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며 받아들여야 했던 아주 어린 날의 기억.

그리고 눈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황홀한 미소에 넋을 잃고 무의식적으로 쳐다보자 기억이 더욱 선명해지더니 그와 함께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형….'

머릿속에 봉인되어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 것도 잠시 라그나르는 이내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춥디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오스왈드 아카데미의 한 강의실은 마치 봄볕이 들듯 화사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색 머리칼이 쇄골 언저리에 맴돌고 있었고, 부드러운 금안이 보기 좋게 사르르 접혔다.

많은 학생들 앞에서 긴장되지도 않는지 화사한 분위기를 만든 장본인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반갑습니다. 클레멘스제국에서 교환 학생으로 온 마리아 헤로니스라고 합니다!"

청아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오스왈드 아카데미에 흔치 않은 교환 학생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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