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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03화 (102/185)

제103화.

추운 겨울답지 않게 오늘은 참으로 화창한 날씨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거세게 때렸는데 오늘따라 잠잠했다.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에도 겨울 답지 않은 온기가 맴돌고 있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창문을 열고는 책상 위에 있는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 어쩐지 황궁이 소란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시몬의 편지를 소리 내어 꼼꼼히 읽어 본 나는 펜을 들고 천천히 답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한 그날, 약속 장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와 시몬은 한참이고 나스를 기다렸지만 레스토랑이 문을 닫을 때까지도 나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엄마는 우리에게 나스가 떠났다고 말해 주었다.

대부가 직접 찾아와서 나스를 데려갔다고 말이다.

믿기지 않아 나스가 머무는 방으로 가 보았지만 싸늘한 공기만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그날 이후 나와 시몬은 실망감에 잠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허무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결국 시몬이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가왔고, 시몬은 우울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우리가 틀렸었나 봐.”

실망이 가득한 목소리에 그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를 하겠다는 말로 시몬을 배웅해 주었다.

우리가 확실한 근거 없이 나스를 라그나르라고 확신했던 것일까.

나스는 라그나르가 아니라 정말로 나스였던 것인데.

나스는 그저 저크시스에서 만난 내가 계속 신경 쓰여서 옆에 있고 싶어 하고, 질투를 했던 것일까.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우울해지는 마음을 붙잡고 아카데미에 입학을 한 지도 벌써 5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벌써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있다니. 시간도 참 빠르지.'

밀랍을 녹여 편지 봉투를 잘 밀봉하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곧 문이 열렸고, 푸들처럼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를 가진 남학생이 들어왔다.

“좋은 오후에요. 선배님.”

“좋은 오후야, 제롬.”

간단하게 인사를 마치자 제롬이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학생 회장님은 어디 계신가요?

학장님께서 찾으셔서요."

“또 땡땡이를 쳤겠지."

깔끔하게 넘긴 붉은 머리와 함께 얄미운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고귀한 공자님께서 언제 일하는 것 봤니.”

내 말에 제롬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 공자님께서 내게 일을 미루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선배님이 다 해 주셔서 그렇죠.

부회장인데 어떻게 회장일까지 하려고 하세요.”

적당히 하면서 넘기라는 걱정 어린 말에 나는 푸스스 웃었다.

“기대도 안 했으니 괜찮아."

내 대답에 제롬은 삐죽 입술을 내밀며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문이 열려 있어 창문을 타고 찬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에 헝클어진 흰 머리칼을 정리하려 나는 거울 앞에 섰다.

“평민인 내가 학생회에 몸을 담고 있으니 얼마나 짜증이 날까.”

글렌 공자가 옷차림이나 신경 쓰라고 비아냥거리며 가져왔던 전신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안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굵게 웨이브진 하얀 머리칼이 허리께까지 흘러 내려와 있었다.

나는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린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리고는 빙긋 웃어 보았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자 무심해 보이던 표정이 곧 부드러운 인상으로 바뀌었다.

“회장은 선배가 평민이 아니어도 싫어했을 것 같은데요.”

"하긴. 베네디토가 황궁에 물건을 납품하는 상단으로 결정되었으니 기존에 납품해 오던 글렌 공작가는 자연스레 뺏긴 셈이잖아.”

“그런데 그게 선배 잘못은 아니잖아요.”

제롬이 가볍게 내 편을 들어 주어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회장은 나 때문에 매번 패배감을 느끼잖아. 이 정도는 이해해 주지 뭐.”

“패배감이요? 아, 매번 수석 자리 뺏기는 거요?”

“뺏기다니. 못 올라오는 거지."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학생회실을 빠져나갔다.

조용한 복도에 우리의 발걸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회장도 참. 저라면 그럴 시간에 선배랑 함께 스터디를 하겠어요."

공작가의 공자님은 차마 생각하지.

“현명한 대답이네. 고귀한 글렌못할 정도로 말이지. 뭐, 알아도 자존심 때문에 하지 않겠지만.”

내 비꼬는 말에 제롬이 웃음을 터트렸다.

“회장이 바보인 거죠. 누가 봐도 선배가 열심히 노력하는 걸 아는데 그걸 무시하니 매번 지는 거라 고요.”

“제롬이 알아주니 기쁘네."

내 말에 제롬은 뭐가 재미있는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제롬은 디미트리 후작가의 차남이었고, 글렌과 마찬가지로 고귀한 귀족이었지만 나를 진심으로 따라 주는 귀한 후배였다.

가끔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제롬과 친해졌는지 묻고는 했다.

'신분을 신경 쓰지 않는 좋은 후배니까.’

그럴 때마다 이렇게 답하고는 했지만 사실 대귀족인 제롬과 평범한 상인인 내가 이렇게 친해지게 된 계기가 있긴 했다.

우리 둘 다 글렌 공작가의 렉시우스 글렌을 싫어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멍청한 공자가 또 무슨 사고를 치고 다녔으면 학장님이 부르는 건지.”

제롬의 무례한 말을 흘려 들으며 나는 지난 아카데미 생활을 떠올렸다.

나는 타국의 사람이자, 평민이고, 소문과 평판을 신경 써야 하는 상인의 딸이었다.

그렇기에 아카데미에서 더욱 빛이 날 수 있도록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성적, 성격, 인품, 주변의 관계, 배려, 겸손 등 다양한 것을 모두 갖추어야만 아카데미 내에서 당당히 서 있을 수 있을 테니까.

렉시우스는 내 평판의 모든 것이 꾸며진 모습이라며 치를 떨고 싫어했지만 그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내게 쉽게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다.

신분의 문제로 학생 회장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매번 실망을 안겨 주는 렉시우스 덕에 실질적인 회장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기도 했다.

“글쎄. 과연 사고를 쳐서일까.”

“선배는 짐작 가는 게 있어요?"

제롬이 동그랗게 눈을 뜨며 묻는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보다 어린 나이임에도 성숙한 외모를 갖고 있던 제롬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제 나이처럼 보였다.

“오늘따라 아카데미가 소란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그냥 날씨가 좋아서 그런 것 아닌가?"

아니, 아닐 거다.

오스왈드의 겨울은 굉장히 춥고, 혹독하기로 악명높았다.

그런데 이런 화창한 날씨라니?

마치 날씨가 새로운 사람을 반겨주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기에 짐작할 수 있었다.

'왔나 보구나, 마리아.'

어린 시절에 들었던 해맑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 같은 환청이 들려왔다.

아마 나도 모르게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어! 저기 회장이다. 와, 이런 곳에서 땡땡이를 치고 있었네.”

갑자기 제롬이 한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높은 목소리에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고, 나도 그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많은 이들이 한 아이를 중심에 두고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학생들의 중심에 선 소녀는 세상의 모든 빛을 품은 듯 활짝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흑단과도 같이 아름다운 검은 머리칼이 쇄골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고, 사랑스러운 외모와 함께 선 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린 시절의 해맑은 미소를 고스란히 간직한 마리아였다.

그녀의 옆에는 렉시우스가 있었다.

렉시우스는 우리를 보자마자 불쾌한 표정을 지었고,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마리아헤로니스라고 해요! 오늘 클레멘스에서 교환 학생으로 왔어요!"

‘교환학생?' 나는 머릿속에 있는 원작의 기억과 비교하며 이상함을 느꼈다.

'부모님의 반대가 있어서 가출을 하고, 분명 편입생으로 입학했었는데.

혹시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던 걸까?'

'아니야. 분명 평민의 신분으로 아카데미에 들어왔었는데.'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렸지만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제롬이 곧바로 가볍게 인사를 꺼내었다.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제롬 앱하르트 입니다.”

나 또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다프네 베네디토라고 합니다.”

“아! 베네디토?"

마리아는 베네디토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어쩜! 클레멘스 제국의 상단 아니에요?”

"네, 맞아요. 공녀님."

“공녀님이라니요! 제가 어디까지나 후배인걸요!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공녀님께서는 열여덟이지 않습니까? 저와 나이가 같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학년 아래니까요! 이곳에 있는 동안은 편히 말해 주세요!”

마리아의 목소리는 활기차지만 단호했기에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짧게 답했다.

그리고 곧 시선을 돌려 렉시우스를 바라보았다.

“회장, 학장님께서 찾으신다고 들었어요.”

“왜? 평소처럼 네가 가면 될 일아닌가?”

“회장 자리도 제게 주고 싶다면야 저야 고맙게 받죠.”

입가를 가리고 가볍게 웃자 주변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다들 렉시우스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그 와중에 정말로 신분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제롬의 웃음소리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렉시우스의 얼굴에 화가 맴돌더니 곧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아! 아카데미 안내를 부탁하려고 부르시는 거 아닐까요? 오전에 그러셨거든요!”

마리아가 렉시우스 앞에 끼어들더니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안 그래도 아카데미가 정말 궁금했는데! 혹시 안내해 주실 수 있을까요?"

마리아가 귀엽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하고 움직였다.

'의외로 눈치가 있네.'

재빨리 끼어드는 모습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보다는 회장이 아카데미를 훨씬 더 잘 알고 있는지라. 저쪽이 더 나을 거야.”

“저쪽?"

렉시우스가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지만 나는 웃음을 잃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땡땡이를 열심히 치니 내가 모르는 구석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귀찮은 일에 시간을 쓸 만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니 괜찮겠지.

하지만 이런 내 거절에도 마리아는 안절부절못하더니 우리 뒤를 보며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

“사실은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내게?”

"네! 나스! 여기야!"

갑작스럽게 나온 이름에 내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나스…?'

마치 내 시간만 멈춘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만 온몸의 신경이 내 뒤쪽으로 향했고, 곧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웃음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안녕, 다프네. 오래간만이지.”

예전의 목소리보다 더 성숙해졌으나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목소리가 맞았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내 예상과 다르게 환하게 웃고 있는 하늘빛 머리칼의 남자가 보였다.

나스는 참으로 즐거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따스한 겨울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 머릿속에 찬바람이 부는 것은 금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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