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과거와 똑같은 하늘색 머리칼이 예전과 다르게 많이 짧아져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나스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선이 굵어져 있었고, 키도 많이 자랐는지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듯했다.
다부진 어깨와 넓게 벌어진 가슴, 마치 조각상을 데려다 놓은 듯 완벽한 비율을 가진 미남의 등장에 주변이 다시 술렁거렸다.
남자고 여자고 가리지 않고 얼굴을 붉히는 것이 참 멋있고, 훌륭히 자라났다 칭찬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누구세요?”
내 말에 나스의 웃음기 어린 표정이 사라졌다.
나는 바람에 흘러내린 머리를 귀뒤로 넘기며 예의를 갖춰 미소를 지었다.
“클레멘스 제국의 사람인가요?
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궁금하네요."
내 말이 끝나자 마리아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나와 나스를 번갈아 보았다.
“나스! 아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어?”
마리아의 물음에도 나스는 답하지 못하고 울망울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듯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려 마리아를 향해 물었다.
“혹시 같이 온 교환학생이니?"
“아, 아니요! 교환학생이 아니라 우리의 호위로 함께 온 나스라고 해요!"
“오스왈드 아카데미는 재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출입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작게 중얼거리자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렉시우스가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클레멘스 제국에서 오신 귀하신 분들이다. 당연히 호위가 필요한 것 아닌가?"
“그것도 그렇네요.”
다만 궁금한 것은 그렇게 홀연히 떠나 버린 나스가 어째서 마리아의 호위로 함께 왔냐는 것이지만.
'아니지. 궁금해할 필요가 있나.'
라그나르의 자리에 나스가 대신한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였으나 관심을 쏟고 싶지 않았다.
'나스는 그저 나스야. 라그나르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으니 더는 신경 쓰지 말자.'
무엇보다 이 자리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우선 마리아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는지 알아보는 게 좋겠지.'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랑 다른 부분이 있다면 확실하게 알아두는 것이 좋을 테니까.
“그럼 모두들 좋은 시간 보내시기를.”
나는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제롬과 함께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끝까지 나스의 미련 있는 눈빛이 따라붙었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떠나려는 그때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걱정이 한가득 담긴 사내의 목소리에 마리아의 고운 미간이 활짝폈다.
그 모습이 마치 꽃이 개화하는 것 같이 아름다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볼을 붉히는 모습도 보였다.
‘렉시우스, 자존심 높은 저 녀석도 금세 빠져 버리는구나.'
예상은 했다만 이것이 주인공 효과인 걸까.
“카스토르!”
"괜찮으십니까? 이놈들은 뭡니까? 왜 누님을 다 둘러싸고 있는 거죠?”
카스토르는 사나운 눈빛으로 주변을 경계하듯 마리아의 앞에 섰다.
마치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와도 같은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다.
'닮았네.’
어린 시절 몰래 보았던 공작의 외모와 참으로도 닮아 있었다.
어두운 남색 머리는 마치 밤하늘을 담아놓은 듯 우아했으며, 마리 아의 색과 비슷한 금안은 찬란해 보였다.
“아니야! 사이좋게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어! 다들 정말 좋은 분들인 것 같아!"
마리아는 카스토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그의 등 뒤에서 빠져나와 옆에 나란히 섰다.
사나운 육식 동물과 차분한 초식 동물이 함께 있는 것이 안 어울리는 듯했다.
그래도 남매는 남매인지 닮았다는 느낌도 들기는 하였다.
“그렇습니까?”
마리아의 말에 카스토르가 순식간에 경계를 풀고 부드럽게 웃었다.
헤로니스 공작과 똑 닮은 모습에 절로 기분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프네 아가씨. 이곳에서 뭐 하고 계셔요?”
"아, 플뢰르."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플뢰르가 환히 웃으면서 다가오다 멈칫 굳어 버렸다.
“나스?”
아무리 자라났다고 한들 몇 년 전의 모습이 제 남아 있었기에 바로 알아본 듯했다.
나스의 표정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는 순간 내가 입을 열었다.
“플뢰르, 저 사람을 아니?"
"예?"
“나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내 이름을 알고 있지 뭐야.”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나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내 기억 속에는 없는 사람인데.
네가 아는 걸 보니 아무래도 상단의 사람이었나 보구나.”
내 말의 의도를 바로 눈치챈 플뢰르가 부드럽게 받아쳤다.
"아. 잠시 상단의 호위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아마 아가씨께서 보신 적은 없었을 겁니다.”
나스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마리아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애석하게도 모르는 사이라서.
안내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게. 여기서 좋은 추억을 많이 쌓기를 바라고.”
"아, 네!”
편히 말해 달라는 것이 사실이었는지 마리아는 조금도 기분이 상한 기색 없이 환히 웃었다.
옆에 있는 카스토르가 나의 하대가 불쾌한지 인상을 찌푸렸으나 마리아가 옆구리를 찌르니 표정을 바로 풀었다.
'원작에서도 가출한 누나를 따라서 온다더니 정말 많이 아끼나 보네.'
마리아와 카스토르와의 첫 만남은 이 정도면 되었다.
“그럼 이만."
그 말과 함께 나는 제롬과 플뢰르를 데리고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조용한 복도를 거닐다 무리에서 멀어지자 제롬이 의아함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의 이름을 다 외우고 있으면서 상단의 직원이었던 사람을 모른다고요?"
“응. 내가 모르는 사람이야."
"거짓말이죠, 선배님?"
평소라면 장난기 섞인 제롬의 말투에 미소를 지으며 편히 답을 했겠지.
하지만 반갑지 않은 얼굴들을 봐서 그런지 입가에 미소가 쉽게 지어지지 않았다.
'다른 의미로 스트레스네..'
나는 찌릿하고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답을 기다리는 제롬을 향해 말했다.
“거짓말이든 아니든 모르는 사람인 건 변치 않을 텐데요."
내 말에 제롬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투덜거렸다.
"알겠어요. 불편하면 더는 안 캐물을 테니 존대 좀 저리 치워줘요. 난 선배님이 그렇게 말하면 소름이 돋더라.”
“그 정도인가?”
아이 같이 투덜거리는 모습에 가볍게 미소를 짓자 제롬이 따라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면 다 나랑 같은 대답을 할 걸요."
그 말에 옆에 있던 플뢰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시당할 일은 없겠네.”
"아카데미에서 누가 부회장을 무시해요?”
“있잖아. 글렌 공자님과 공녀님.”
“그 둘이야 그냥 베네디토를 싫어하는 거고요."
제롬이 답답한지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는 껄렁거리는 자세로 걷기 시작했다.
“솔직히 부회장 부족한 게 어디 있어요? 외모도 아름답고, 성적도 좋고, 성격이 모나지도 않았고,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당당하고, 평등하게 대하고."
갑자기 나온 칭찬에 풉하고 웃는데 제롬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부회장임에도 불구하고 회장일까지 완벽하게 해 내면서 겸손하기까지.”
“던전 실습에 대해서도 칭찬이자자하지요. 다친 사람은 있어도 죽는 사람은 없다고 검술부 교수님들의 신뢰도 높답니다.”
제롬의 말에 지지 않겠다는 듯 플뢰르까지 입을 열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봤자 평민인걸."
"베네디토잖아요? 평소 귀족들이 왜 선배님 눈치를 보겠어요? 베네 디토에게 밉보였다가 혼자 유행에 뒤처질까 봐 걱정이 가득한데.”
제롬이 답하는 말에 그저 가볍게 웃었다.
제롬은 본디 평가가 박한 귀족가 자제이기에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노력한 보람이 있네.'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짓다가 다시 떠오른 세 사람의 얼굴에 기분이 다시 가라앉았다.
“갑자기 교환학생으로 온 이유가 뭘까.”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제롬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필 오스왈드라는 게 걸리네요. 솔직히 반란군이 지고 있는 상황이라 한들 아직 내전이 한창이고, 근방에 던전도 꽤 자주 출몰하는 편이라 위험한데.”
내가 궁금한 것은 어째서 가출이 아닌 교환학생으로 왔다는 점이지만 제롬의 궁금증도 이해가 갔다.
'귀한 공녀님이 설마 던전을 탐험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찾아온 것이라고 누가 생각하겠어.'
“글쎄. 왜 그럴까.”
나는 그저 조용히 미소 지었다.
* * *
플뢰르가 수련이 있어 홀로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복잡한 마음에 평소보다 늦게 나온지라 주변이 벌써 어둑해져 있었다.
완전히 해가 지기 전 도착할 수 있도록 발걸음을 빨리 움직이는데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다프네….”
"......."
나스는 우울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다.
슬픔이 가득한 얼굴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 푸른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잠시만. 사실 그때 그렇게 떠나게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어.”
내가 알고 있는 나스의 성격과다르게 꺼내는 말에는 조바심이 가득했다.
나는 시선을 돌려 나스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마다 사정이 있을 수 있는 거니 이해해.”
“그럼 왜 나를 모른 척하는 거야…?”
나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 운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그때와 다르게 네가 신경 쓰이지 않으니까.”
"......."
“난 어차피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오스왈드를 떠날 거야. 너는 아니잖니?"
"나는…!”
나스가 황급히 입을 열었으나 이번에는 고개를 저으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네가 누구랑 있는 나와 상관도 없고, 어릴 적 짧은 연이었을 뿐, 더는 내게 이어갈 이유가 없잖아.”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나는 말이지.”
나스가 답답한 듯 자신의 가슴을 내리쳤다.
“난 여전히 네가 신경 쓰이고…!”
“네가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것은 알겠어. 하지만 여기까지 해 줬으면 해.”
나는 차분하게 나스가 이해할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을 꺼내었다.
“애초에 네가 이렇게 아는 척을 하는 것도 불편하니까.”
비록 우리의 착각이었다 한들 네 존재는 우리에게 희망이나 다름없었는데.
다시는 그런 멍청한 짓을 반복할 수 없었다.
"너에게도 미안하게 생각해. 멋대로 착각한 내 잘못이니까. 그러니 여기까지가 맞아.”
나스의 입이 작게 달싹였지만 나는 더는 들을 생각이 없기에 멈춘발걸음을 옮겼다.
뒤따라오는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마리아는 이곳이 타국임을 잊은 듯 어디서든지 적응을 잘 하였고, 누구에게나 인기가 많았다.
그 환한 미소를 보면 모두가 가슴을 붙잡고서 황홀한 표정을 짓는 것이 참 웃긴 광경이었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려나.'
여느 날처럼 학생회 일을 마친 뒤 기숙사로 돌아가려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마리아가 모두와 함께 꺄르르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던 것이다.
마주친다 한들 달갑지 않기에 조용히 지나가려 하는데 마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금안과 마주치니 느낌이 조금 이상했다.
'조금 불쾌할지도.'
하지만 나와 다르게 마리아는 밝게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다프네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