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모른 척하고 지나가기에는 늦은 것 같기에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마리아 양?”
“아이참, 편히 마리아라고 불러 달라니까요!”
"그래, 마리아. 나도 참. 정신이 없어서 네가 잘 지내는지 묻는 것도 잊고 있었네. 아카데미 생활은 어때?”
'귀찮아.'
마음속 생각과 달리 미소를 지으며 살갑게 묻자 마리아가 활짝 웃었다.
“너무 좋아요! 클레멘스와 다른 매력이 있어서 정말 즐겁고, 재미있지 뭐예요! 다들 친절하고요!"
마리아의 밝은 목소리에 주변에 있는 학생들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 또한 훈훈한 눈빛으로 마리아를 따라 웃어주었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네. 그것보다 굉장히 즐거워 보이던데 무슨 이야기 중이었니?"
다른 이들을 대화에 함께 참여시키고는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마리아가 주먹을 쥐어 손바닥을 내리치더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마리아의 눈이 마치 별처럼 반짝였다.
“던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클레멘스에서는 접근하기 어렵다 보니 던전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지 뭐예요”
“그렇구나. 모르는 걸 배워가면 정말 뿌듯하겠는걸.”
이런, 대화 주제를 잘못 골라 버렸네.
“참! 선배님이 던전 실습 관련에 대해서 잘 아신다고 해서 묻고 싶은 게 있었어요!”
마리아가 흥분을 숨기지 못하고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리를 떠나긴 어렵겠네.'
속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삼키고는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아. 맞아. 내가 던전 실습 관련 담당이기는 하지. 그래, 어떤게 궁금한데?”
“실습을 언제쯤 나갈 수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마리아는 아카데미에 온 목적이 정말 뚜렷했다.
“글쎄. 나도 아직 자세히는 몰라.
그도 그럴 것이 던전이 나타나야 실습 나갈 조를 꾸리게 되다 보니."
“그럼 나중에 저도 함께 참가할 수 있을까요? 제가 던전에 가고 싶어서 오스왈드로 교환학생으로 온 거거든요.”
마리아가 두 손을 간절하게 모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꼭 탐험해 보고 싶은데… 선배도 알고 있다시피 클레멘스에는 흔하지 않으니까요."
혀를 살짝 내밀며 가볍게 웃는 모습이 누가 보아도 참 사랑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참 껄끄러웠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입가에 핀 미소를 지우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마리아는 던전이 단순히 탐험의 장소라고 생각하나 보네.”
"네? 네!"
당당한 대답에 마음 한쪽이 싸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주변에 있는 학생들 표정이 이상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아쉽다는 어조로 덧붙였다.
“어쩌지. 그런 생각으로 던전에 가고자 한다면 마리아를 데려갈수는 없을 것 같아.”
"네? 왜요?”
마리아가 울상을 지으며 큰 목소리로 물었다.
'눈치가 꽤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서 천천히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오스왈드에서 던전은 커다란 자연 재해고, 제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는 재난이야.”
"......"
“하지만 그 재난을 극복하기에는 오스왈드의 기사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고.”
뭐, 내전이 종식했다면 충분할 수 있겠지만, 이 부분은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스왈드의 미래를 책임질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오스왈드를 지킬 의무를 일부 부여하는 거야.”
마리아의 표정에는 어느새 밝은 웃음이 사라진 상태였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던전으로 향해. 다치지 않기 위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오스왈드를 지키기 위해서.”
마리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이내 빨갛게 달아올랐다.
“우리는 던전이 나타나는 걸 원치 않아. 모두를 위해서 말이야.
하지만 마리아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네.”
마리아에게 진심으로 해 주고 싶은 말이어서 그런 걸까.
따끔한 타박의 말을 건네는 나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지어졌다.
“마리아가 던전을 가볍게 여기고 있는데 어떻게 데려가겠어?"
아무래도 모두에게 여기까지 말하지는 않았었나 보다.
주변에 있는 학생들이 난감한 기색으로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리아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다행이네.’
같은 아카데미 학생에게까지 쓴소리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는 자가 있다면 실망했을 테니까.
마리아는 입을 작게 벌리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눈가를 붉혔다.
“죄, 죄송해요. 제 생각이 너무 짧았던 것 같아요.”
마리아는 고개를 숙여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그리 어려운 일이었는데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진심을 다하는 여러분께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 사과는 내게만 향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학생들에게도 향한 것이었다.
모두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야. 잘 모르면 그럴 수 있지."
“그럼, 그럼. 아카데미에 오려는 이유가 모르는 걸 배우러 오는 거잖아.”
모두가 사과를 받아주고 보듬어주니 마리아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곱게 접힌 눈가에 매달린 눈물방울마저 참 어여쁘게 여겨지는 웃음이었다.
"모두들 고마워요! 저 조금 더 경각심을 가지고 던전을 대할게요!"
“그래. 그럼 됐지.”
나도 모두를 따라서 함께 웃어주었다.
다면 이리도 호의적인 분위기가 만약에 내가 마리아의 상황이었허락되었을까?
원작은 과연 나를 허락해 주었을까.
참으로 같잖은 생각에 씁쓸해지는 기분을 속으로 삼켜내었다.
**
'과연, 주인공을 위해 굴러가는 세상답네.’
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새로 생긴 던전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일주일 전 마리아에게 충고한 것이 무색하게 원작의 흐름을 따라 새로운 던전이 아카데미 주변에 생겨났다.
주인공을 위해 생겨난 던전답게 학장님은 헤로니스 남매도 함께 던전으로 향하기를 원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일행이 네.’
일행도 마음에 안 드는데 추적추적 비까지 오는 것이 참으로 불쾌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나는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입구 주변을 서성이는 기사들과 아카데미 학생 무리를 바라보고서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오스왈드 기사 여섯 명과 나, 제 롬, 플뢰르, 마리아, 카스토르, 나 스.
'웃긴 조합이지.’
제롬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고, 플뢰르는 무표정을 유지하면서 불편함을 속으로 삼켰다.
나는 플뢰르와 멀지 않은 곳에서 묵묵히 서 있는 나스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마리아의 호위답게 참가하네.'
신경 쓰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요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그의 존재가 예민하게 다가왔다.
나스도 참가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키키를 두고 온 것도 마음에 걸렸다.
'키키가 함께라면 조금 더 쉬웠겠지만.’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던전을 향할 준비가 끝이났다.
"다행히도 헤로니스 영애가 물의 정령을 소환할 줄 안다지 뭡니까.
다칠 걱정은 덜고 힘차게 출발해 보도록 합시다!”
기사의 열정 넘치는 말에 마리아가 부끄럽다는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
카스토르가 따스한 눈빛으로 자신의 누나를 바라보았고, 나스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이 엉망진창인 조합의 결말이 제발 최악으로 치닫지만 않으면 좋겠다.
**
시작은 순조로웠다.
작고 약한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던전에 익숙한 기사들은 노련한 솜씨로 몬스터들을 손쉽게 처리했다.
나스와 플뢰르 그리고 카스토르 또한 선두에 서서 망설임 하나 없이 검을 휘둘렀다.
나와 제롬, 마리아는 후방에서 그들이 위험하다 싶을 때 조력해 주었다.
마법사인 제롬이 장거리 공격을 하거나 실드를 펼쳤고, 나는 활로 몬스터들의 기습적인 공격을 막아내었다.
돌발 상황을 대비하여 마리아는 주변에 물의 정령을 소환해 일행의 부상을 즉시 치료하였다.
걱정과 다르게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다.
꽤 괜찮을지도.
잠시 마음을 놓았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네놈! 건방지게 자꾸 내 앞에 끼어들지 말아라!”
카스토르가 갑자기 플뢰르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던전에서는 조용히 있어야 한다.
는 상식은 어디다 버리고 온 것인지.
그 상황을 지켜보던 나와 제롬이 미간을 찌푸리는데 플뢰르가 지지.
않고 카스토르의 말을 받아쳤다.
“제가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 공자님께서 실력이 부족하여 앞장서지 못하는 것이겠죠."
"뭐라고?"
“사실이지 않습니까? 수업 중에도 저와의 대련에서 이긴 적 없잖습니까.”
플뢰르의 담담한 목소리에 카스토르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그동안의 대련에서는 내가 봐준 것이지.”
“저보다 약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닌데 어찌 그렇게 자존심을 세우시나 모르겠네."
플뢰르는 그가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뭐라고?"
“혼잣말인데 들으셨습니까? 신경쓰지 마시죠.”
"하.”
플뢰르의 거침없는 발언에 카스토르가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불쾌함이 가득한 표정에도 플뢰르는 카스토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좋아. 그저 그런 대련이 아니라 실전만큼 실력을 평가하기 좋은 것이 없겠지.”
“카스토르.”
이상해지는 분위기에 마리아가 카스토르를 말리려고 했으나 화가 난 그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대결이다. 이곳에서 누가 몬스터를 더 많이 잡는지 겨뤄 보도록 하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아카데미 학생 중 제일 많이 잡는 건 제가 될 텐데요.”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어린애들이 싸우고 있는 데도 기사들은 보기 드문 광경이 재미있다는 듯 말리지는 못할망정 구경하기 바빴다.
타박한다고 한들 마리아처럼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한소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
“좋아! 이제부터 시작이다!"
카스토르가 모두를 제치고 선두로 던전 안쪽을 향해 뛰어갔다.
커다란 체격과 어울리지 않게 그는 재빨랐고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우리는 당황한 눈빛으로 카스토르를 바라보다가 황급히 뒤따랐다.
'아무리 타국의 사람이라 한들 던전의 위험성을 너무 얕보는데.'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에게 화살을 날려버리고 싶었으나 빌어먹게도 저 녀석을 우선 따라 잡는 것이 중요했다.
'저 녀석이 던전에서 길을 잃기라도 하면 최악의 상황이 될 뿐이야!'
하필 클레멘스 제국의 고귀한 귀족님이니 사건이 더 커질지 몰랐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구경하던 기사들도 심각한 표정으로 뛰는 것이다.
“젠장.”
열심히 그를 쫓던 중 빌어먹을 문제가 생겨 버렸다.
나와 같이 모두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나는 거친 숨을 내쉬고서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갈림길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