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06화 (105/185)

제106화.

갈림길의 등장에 우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누구도 말을 쉽게 못 꺼내는 상황에서 제롬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두 팀으로 나눌 수밖에 없겠지.”

내 말에 기사들 또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 내에서 팀이 분산되는 것이 반갑지 않은 상황이지만 어쩌겠는가.

제롬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짜증을 내려다 마리아의 우울한 표정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제롬.”

"알고 있어요. 카르트로 공자는 클레멘스제국의 귀한 공자님이니 어서 빨리 구하러 가야죠.”

제롬의 비꼬는 말에 마리아의 어깨가 더욱 축 내려갔지만 위로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스마저 저래도 되는 건가.'

나스는 호위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무뚝뚝하게 마리아의 뒤에 서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나스라면 카스토르를 금세 따라잡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일부러 안 잡았나?'

나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이대로 생각에 잠겨 있을 여유가 없었다.

"아카데미 쪽은 저와 마리아, 그녀의 호위가 한 팀, 플뢰르와 제 롬을 한 팀으로 나누겠습니다.”

기사들 또한 자기들끼리 의논하더니 세 명씩 팀을 나누었다.

나는 떠나기 전에 플뢰르에게 지시했다.

“그를 찾으면 바로 신호를 보내 주도록 해.”

"예, 아가씨. 조심하셔야 합니다.”

플뢰르는 귓불에 달린 붉은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제롬과 함께 왼쪽 길로 빠져나갔다.

우리 또한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바닥이 진득거리다 보니 속도가 더뎌졌다.

이러한 상황이 불편했는지 마리아는 점점 더 말을 잃어 갔다.

처음의 그 반짝이는 눈빛은 어디 갔는지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여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공녀님. 공자님은 무사하실 겁니다.”

보다 못한 기사 중 한 사람이 위로의 말을 던졌으나 마리아의 표정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리아가 말을 잃어 갈수록 우리 팀의 분위기는 점차 처지고 있었다.

불편해..

어색한 공기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무겁게 느껴지는 발걸음 때문인지 아니면 가라앉은 분위기 때문인지 몰라도 이대로 가다간 팀의사기가 완전히 저하되어 버릴지도 몰랐다.

“마리아."

“…네, 선배님.”

괴로움이 가득한 마리아의 목소리는 기어이 달달 떨리고 말았다.

정말 귀찮게도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다.

나는 크게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고는 입가에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예의상 물어보았다.

“괜찮은 거야?"

“…죄송해요. 제 동생 때문에 이렇게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되고."

자세히 보니 마리아의 얼굴은 미안함과 걱정보다는 화를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카스토르는 이곳에 온 뒤에 지금까지와 다르게 아카데미에 자기가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다고 속상해하고는 했어요."

사정을 이야기하다 보면 어두운 안색을 벗어던지지 않을까 싶어 조용히 들어 주기 시작했다.

"어디서든지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칭찬만 들었던 아이가 처음으로 동급생에게 패배를 겪게 돼서 충격이 컸나 봐요."

마리아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울망울망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해 달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저 제가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못 해서 모두에게 폐를 끼쳤네요.”

마리아가 회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정말 죄송해요.”

마리아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구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마리아. 지금 뭐 하는 거야. 네 동생의 잘못인데 왜 네가 사과를해?”

“네?”

내가 마리아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는데.

나는 입가에 지어진 비소를 숨기지 않고 불쾌한 감정을 아낌없이 보여 주며 말했다.

“자기 잘못은 자신이 책임지게 해야지."

"아. 그렇죠.”

마리아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기분이 나쁜 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더 분위기를 망쳤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마리아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저 이런 말 처음 들어 봐요. 사실 카스토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살가운 성격이 아닌지라 미안하다.

는 사과를 제가 대신 많이 하고 다녔거든요.”

“동생을 너무 오냐오냐 키웠네."

“선배의 말이 맞아요! 이번 일은 카스토르가 직접 사과할 수 있도록 누나인 제가 따끔하게 혼을 낼게요!"

“그래.”

마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자 그래야 딱딱하게 굳어 있던 분위기가 풀렸다.

나를 보면서 헤실헤실 웃는 것이 경계심이라고는 보이지 않아 나 또한 따라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마리아. 조금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이 좋은 분위기를 그냥 넘길 수야 없겠지.

마리아의 태도가 유해진 듯해 궁금한 점을 하나씩 풀어 나가기로 했다.

“오스왈드로 오는 데 집안의 반대는 없었어? 아무래도 타국이다.

보니 걱정이 더 크셨을 것 같은데.”

타국에 있는 이들은 마치 오스왈드를 시한폭탄처럼 생각하지 않던가.

"나도 어린 시절부터 들었거든.

헤로니스 가의 화목한 가정에 대해서 말이야.”

얼마나 화목한지 악녀로 몰아낸 전처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극을 보여 주기도 했었지.

“아! 아빠가 위험하다고 반대를 했지만, 엄마가 허락해 주셨어 어요!”

마리아는 내 물음의 숨은 의미를 파악하지는 못했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의 이야기가 나오자 마리아는 밝게 웃기 시작했다.

“제가 일주일 넘게 부모님을 설득하려고 하자 엄마가 이러다가 제가 가출이라도 할까 봐 무섭다고 차라리 교환학생으로 가라며 간신히 허락받고 왔어요!"

“그렇구나.”

내가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아는 신이 나 작은 입을 조잘조잘 움직이며 열심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이상하네.'

유니스의 추측은 어느 정도 들어 맞는 내용이었다.

오스왈드로 가고 싶다는 마리아의 말에 공작 부부는 계속 반대를 하게 되고, 결국 참다못한 마리아가 동생을 데리고 가출 하니까.

그러고는 평민으로 위장하여 편입 시험을 통과해 입학하는 것으로 원작의 내용은 진행되었다.

'오스왈드 아카데미에 온 것을 보면 원작의 순서와 다르지 않지만 세세한 설정이 바뀌었네.'

"엄마가 아빠를 간신히 설득시켜서 가능한 일이었죠! 그렇게 모든게 잘될 줄 알았는데 오스왈드 국경을 넘어서고 나서 산적을 만난 것 있죠!”

“산적을 만났어?"

"네! 함정에 걸려서 마차 바퀴가 빠졌는데 그 틈을 노려서 산적들이 우리 마차를 둘러싸지 뭐예요!

정정당당하지 못하고 야비한 놈들!”

마리아가 씩씩거리며 분노를 아낌없이 표출해 내었다.

그러더니 힐긋 눈을 굴리고는 옆쪽에 있는 나스를 바라보았다.

“그때 여기 있는 나스가 우리를 구해 줬어요.”

"......."

자신이 대화의 주제가 되어 감에도 나스는 마리아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울망한 눈빛을 보낼 뿐.

적어도 나와 마리아를 향하는 시선이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수 있는 정도였다.

'아니. 오히려 마리아를 신경 쓰는 모습은 본 적이 없네.'

딱딱한 무표정에 상처 입을 법도한데 마리아는 나스가 아닌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목적지가 겹친다는 것을 알고서 은혜를 갚기로 했어요!”

“갚다니?”

"오스왈드 아카데미에 꼭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임시로 우리 호위로 등록을 해 주었죠!"

마리아의 말을 듣고 나스를 향해 시선을 던지니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스는 우리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내키지 않아 했지만 그래도 선배를 만난다는 것을 고대하고 있었어요.”

마리아의 부드러운 미성에는 묘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나스는 진심으로 다프네 선배를 그리워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선배! 어째서 나스에게 화가 난 건지 모르겠지만…!”

마리아가 무언가 결심한 듯 말을 꺼내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마리아를 서늘한 눈빛으로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마리아. 지금 들은 말은 못 들은 척 넘어갈 수 없겠어. 호위가 아닌 사람을 호위인 척 아카데미에 들였다니.”

“하, 하지만! 나스와 선배를 만나게 해 주고 싶었어요! 도움을 받았으니 저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

“원치 않아. 그러니 그만 신경써 주면 좋겠어.”

내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저절로 차가워질 수밖에 없었다.

따스한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냉정한 말에도 마리아는 포기하지 않으려는 듯 입을 달싹였다.

'끈질기네.'

자기가 도대체 뭐라고 나와 나스사이를 화해시키겠다고 이리 열정적으로 나선단 말인가.

마리아라는 사람 자체와 별로 연관되고 싶지 않기에 나 또한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땅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앞서 걷던 기사들이 갑작스러운 지진에 허둥지둥 검을 빼어 들었다.

‘어쩐지. 던전치고 너무 조용하다 싶었지!’

아무래도 어디선가 몬스터가 튀어나올 모양이었다.

다시금 땅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왼쪽의 벽이 쩌적 소리를 내며 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꺅! 맙소사! 카스토르!"

금이 간 벽이 무너져내려 금세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그 사이로 날아온 카스토르가 반대쪽 벽에 부딪혔다.

마리아가 기겁하며 카스토르에게 달려가는데 부서진 벽에서 무언가가 거침없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마리아!"

“헉!”

다행이라 해야 할지.

나스가 황급히 마리아를 제 품으로 잡아당겼고, 날아오는 것들을 거침없이 베어 내었다.

나스의 검은 마치 가볍게 춤을 추듯 빠르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리아는 멍하니 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고, 고마워요.”

나스의 품에 안긴 마리아가 고개를 내밀며 자신이 서 있던 곳에 가득 쌓인 몬스터의 사체들을 보며 헉 소리를 내뱉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마리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이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다행이야.'

이러한 상황에서 마리아까지 다치거나 실종되면 그 책임을 누가지게 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아마 저 건너편에 나머지 일행들이 몬스터와 싸우고 있을지도.'

그렇다면 플뢰르와 제롬이 위험했다.

'젠장.'

안 그래도 날씨가 궂은 탓에 짜증이 나더라니.

나는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는 오른쪽 다리를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비와 스트레스가 합쳐지니 다친 다리가 내 뜻처럼 움직여 주지도 않았다.

'이럴 때 후유증이…!'

아무튼, 헤로니스 사람들은 내게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

나는 속으로 짜증을 삼키고서는 우선 뒤로 물러나고자 했다.

하지만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순간 아래에서 쩌적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았고, 그 상태로 시간이 멈춘 듯 몸이 굳어 고개만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내 발과 닿은 지면은 마치 제멋대로 그은 낙서처럼 여기저기가 갈라져 있었다.

'주인공이 등장했으니 다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걸까.'

두려움에 몸이 떨려 오면서도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어쩔 수 없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눈가에 맺힌 눈물들이 방울방울 허공에 흩날렸고, 나는 도움의 손길조차 뻗지 못한 채 입가에 지어진 비소를 흘려 냈다.

“정말 제멋대로인 세상이야.”

곧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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