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아래로 추락함과 동시에 천장에서 바위가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내가 땅 아래로 꺼지자 마리아의 비명 소리와 기사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나는 희망을 가지고서 손을 위로 뻗어 보았지만, 당연히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나와 함께 떨어지는 부서진 돌 조각들뿐.
'단순히 추락사로 끝나지는 않겠구나.'
추락사에 압사까지라니.
내 시신은 찾을 수 있으려나.
떨어지는 짧은 순간 온갖 생각이다 들었던 것 같다.
결국, 다가올 고통이 무서워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자마자 보이는 어둠이 마치 내게 더는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여 주는 것 같았으나 눈을 뜨고 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죽을 생각은 없었는데.'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들이 많이 남았는데 이렇게 죽는 걸까.
신이 허락한 내 수명은 여기까지인 걸까.
신은 참으로도 내게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너무하지.’
진짜 주인공이 나타나자 다시금 내 운명을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푸흐흐, 웃음소리가 내 눈물과 함께 허공에 흩날렸다.
나의 죽음조차 주인공의 발판에 불과하다는 것이 소름 끼치고 역겨웠다.
“라그나로, 너는 어땠어? 내가 신을 원망하는 것처럼 너도 나를 원망했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있는 힘껏 웃음을 터트렸다.
입은 웃고 있으나 눈물 또한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보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한 모습이었으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지진이 계속 울리고 커다란 굉음이 들려오니 내 웃음소리쯤이야 저 위에 살아 있는 이들에게 닿지 않을 테니까.
답답한 마음을 담아서 소리를 지르니 눈가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원망하지 않았어.”
그때.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무언가가 내 허리를 감싸는 느낌과 함께 서늘한 온기가 가까워졌다.
“나는 널 원망하지 않았어, 다프네.”
환청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주변의 소음이 들려오지 않기 시작했다.
땅이 무너져 추락할 때 덜컹하고 떨어진 심장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을 알려주듯 거칠게 뛰고 있었다.
“다프네.”
귓가에 선명하게 울리고 있는 다정한 음성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이런 어두운 던전과 어울리지 않는 밝은 하늘색 머리카락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갑자기 하늘색에 검은빛이 물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검게 바뀐 머리카락은 마치 본연의 색을 되찾은 듯 찬란하게 반짝였다.
푸른 눈이 깜빡이더니 이내 내가 그리워하던 색으로 물든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겨우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돼."
"어, 어떻게 네가…? 어떻게. 거짓말이야. 이게 무슨….”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데 나 스, 아니 라그나르가 환히 웃었다.
“보고 싶었어.”
"아, 아.”
그 짧은 한마디에 나는 이것이 꿈이 아닐까 싶었다.
혹시 죽고 나서 보게 되는 환영일까.
아니면 지독한 고통 속에서 떠올린 죽기 전의 마지막 소망일까.
그 어떤 것이든 몰아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라그나르."
“다프네.”
당황에 섞인 목소리가 제대로 와 닿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마음속에 꾹꾹 눌러 왔던 감정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동안 너를 떠올리며 몰래 눈물을 훔치던 때와는 달랐다.
꿈이든 환영이든 혹은 지독한 저주는 네게 꼭 말해야 했다.
“내가 너를 그곳으로 몰아내서 미안해, 죽는 게 무서워서 친구를 렇게 흩날려 너의 행복을 앗아 가서 미안해!”
버려서 미안해. 우리의 추억을 그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마음속에 굳게 잠가 두었던 비밀 상자가 열린 듯 내뱉는 말들은 마치 댐이 무너지는 것처럼 거침 없었다.
“모두가 걱정할까 봐 괜찮은 척을 했어! 네 죽음으로 생긴 기회니까 더욱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버텨 왔어!"
선명하고도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눈가에 고인 눈물 때문에 흐릿하게 보일 만도 하건만 어떻게 저렇게 아름답게 빛이 날 수 있는 걸까.
그 어떤 화려한 보석을 가져와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가져와도 반짝이는 저 보랏빛 눈보다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감히 비교조차 하지 못하겠지.
꿈에서나 그리던 저 아름다운 색을 마주한 순간 내 마지막 진심이 터져 나왔다.
"보고 싶었어, 라그나르."
“나도. 나도 너무 보고 싶었어, 다프네.”
횡설수설했지만 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꺼내었다.
그럼에도 라그나르의 인영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지도 못하고 경련이라도 난 듯 거칠게 흔들리는 손으로 라그나르의 뺨을 감쌌다.
"마, 만져져.”
“당연하지.”
"어떻게 하면 좋아.”
내 손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체온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라그나르가 내 손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꿈이 아니야.”
“아아. 신이시여.”
조금 전까지는 내게 이러한 시련을 준 신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는데, 사람의 마음은 변덕스럽다더니 나는 어느새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던지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난 거야? 죽지 않았었어? 처음부터 살아 있던 거야?
나스인 모습도 너였어?"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 라그나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질문이 너무 많아서 답하기 곤란한 걸까?
“말하자면 길지만.”
라그나르의 커다란 손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내 눈가를 문질렀다.
굳은살 하나 박혀 있지 않은 부드러운 손가락이 내 눈가를 쓸었다.
뜨거운 눈가가 시원해졌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말하지 않으면 소중한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더라고.”
라그나르는 이리저리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더니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기엔 상황이 너무 심각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오해가 더욱 쌓일 테니까."
라그나르의 말처럼 주변의 상황은 처참했다.
어디로 떨어진 건지는 몰라도 주변은 어두웠고, 우리를 감싼 실드위에는 부서진 바위나 돌들이 쌓여 있었다.
탈출하기 급급한 상황임에도 라그나르는 두 팔로 나를 꼭 감싸안았다.
나는 어느새 그의 가슴에 폭 파묻혀 버렸다.
"내가 드래곤이래.”
마치 밥은 먹었냐고 묻는 듯 아주 담담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용의 감옥에서 기절했다 깨어났더니 그 주인을 만났어. 그자가 나를 감옥에서 꺼내 주었고, 내 종족이 무엇인지도 알려 줬어."
갑작스러운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팽팽 돌아가는 머릿속이 혼란스럽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결론만 던져 놓는 나스의 설명은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용의 감옥에 들어가는 것 따위 두렵지 않았어. 죽는 것 또한 두렵지 않았어."
"라그나르.…."
“내게 네가 괴롭고 슬퍼하는 것보다 무서운 건 없으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새삶을 얻을 수 있었던 걸까.
라그나르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나스일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라그나 르의 미소였다.
나스라는 또 다른 라그나르의 이미지가 떠오른 순간 가까스로 지어지던 미소를 지웠다.
‘그렇다면 결국…. 라그나르와 마리아는 어떻게 해서든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건가.'
원작은 결국 두 사람을 운명처럼 엮어 주었고, 주인공들의 앞날에 필요 없는 나라는 존재를 지우고자 했던 걸까.
라그나르가 돌아온 것이 너무 기뻤지만 기쁨을 느낄 틈도 없이 불안함에 거칠게 뛰는 가슴이 괴로웠다.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슬퍼.’
소중한 사람을 드디어 품에 안았는데 이조차 다시 언제 깨어질지 몰라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니.
'내가 이겨낼 수 있을까?'
이미 한 번 실패하여 라그나르를 벼랑 끝으로 몰아간 적이 있었는데 나는….
밀려오는 불안감과 두려움에 두 눈이 거칠게 떨려 왔다.
내가 한참이고 말이 없자 라그나르는 그대로 나를 안아 들었다.
“라그나르?”
당황이 섞인 내 목소리에도 라그나르는 나를 내려 주지 않았다.
"너의 이야기를 듣고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 봤어.”
라그나르가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나를 앉혀 주었다.
라그나르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올려 다보았다.
“라, 라그나르.”
당황한 내 목소리에도 라그나르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다시 나타나면 다프네, 너는 또 언제 죽을지 걱정할 테니까. 나타나도 되는 걸까 하고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
"그, 그렇지 않아!”
재빠르게 외쳤지만, 바들바들 떨려 오는 목소리는 신뢰를 주기 부족했다.
그럼에도 라그나르는 웃었다.
지금 이 행복한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환히 웃었다.
“오랜 고민의 시간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어. 난 네 옆에 있고 싶다는 것.”
"네가 나를 보기 싫다고 해도, 끔찍하다고 여겨도, 혐오하게 된다고 해도, 제발 꺼져 달라고 울며불며 애원해도.”
“라라.…."
오래간만에 불린 애칭에 라그나르는 그 어떤 때보다 황홀하게 웃었다.
“난 절대로 널 떠나지 않을 거야.”
이곳이 던전이라는 것도 잊게 해줄 만큼 달콤한 눈빛이었다.
“그 누구보다 네가 제일 소중하니까.”
"......"
라그나르의 말에 용의 감옥을 사이에 두고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미래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죽고 싶지 않다고 간절하게 외치던 나.
횡설수설 이어지는 말에도 나를 위해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 너.
그럼에도 나를 끝까지 믿어 주고, 기어이 보러 와 준 네가 지금 내 앞에 있다.
'꿈이 아니다.'
라그나르가 내 오른쪽 다리를 살짝 들어 올리더니 내 무릎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바지 위였는데도 어쩐지 뜨거운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라그나르의 입술이 무릎을 타고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종아리 위를 흘러가듯 부드러운 입술이 이내 발목을 지났고, 떨어지면서 드러난 발등 위에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
어쩐지 낯간지러워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맨살에 닿는 입술이 간지러워 몸을 움츠리는데 라그나르가 발등에 입을 맞춘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다프네. 네가 알던 이야기는 모두 끝났어.”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부끄러워하는 것도 잊은 채 라그나르와 두 눈을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은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으니까.
“난 지금부터 네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바쳐 너를 지켜 낼 거야."
“라그나르….”
떨리는 내 목소리에 라그나르는 오히려 안심하라는 듯 더욱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나의 반려가 되어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