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반려?"
라그나르가 꺼낸 말에 되묻자 그가 입가에 가득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 어울리는 단어가 아닌 것 같은데.’
긍정의 답을 기다리는 듯 라그나르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을 바라보는 내 표정은 저절로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려라는 게 내가 아는 반려라는 뜻이 맞을까?'
만약 맞다면 우리 사이에서 성립 될 수 있는 단어가 아니잖아?
내가 고민에 빠져 한참이고 답이 없자 라그나르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져 갔다.
“안 받아 줄 거야…?"
“네가 이렇게 돌아와 준 것은 정말 기뻐.”
나는 라그나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왜 반려라는 단어를 꺼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역시 힘들지 않을까?”
"어째서?”
라그나르는 이해하지 못한 듯 다시금 되물었다.
그 와중에도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이 좋은지 내 손에 가볍게 머리를 기대며 묻는다.
나는 나스의 기대가 부담스러워져 빠르게 손을 내리고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답을 했다.
혹시 내가 착각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반려라는 뜻은 연인이나 그 이상이니….
“그거야 우리는 친구니까."
내 말에 라그나르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충격을 받은 듯 굳어 버린 라그나르의 얼굴에 우울함이 스몄다.
"네가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친구잖아.
보통 반려는 결혼할 때 쓰이고."
내 말이 끝나자 라그나르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횡설수설 말을 내뱉었다.
"내, 내가 너무 설명이 부족했지? 그러니까 드래곤과 인간은 반려의 인을 맺어서 서로의 생을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있는데…!”
황급히 덧붙이는 설명을 들어 줘야 할 것 같아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드래곤과 인간이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살기 위한 방법이야. 드래곤의 수명을 따라 살아가게 되기 때문에 더는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횡설수설 꺼낸 이야기는 급하게 한 설명치고는 이해가 잘되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그나르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맺혔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나를 지켜 준다는 게 이런 거였나.'
과연. 라그나르밖에 줄 수 없는 도움이기는 했다.
“그것도 너를 구해 준 드래곤이 알려 준 거야?”
라그나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와 내 이야기를 듣고 반려의 인을 맺으면 좋다고 알려 줬어.”
‘반려의 인이라…..'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만나러 오지 않았던 걸까?
'그런 것 없어도 됐는데.’
고작 그런 것 때문에 10년이나 떨어져 지냈다는 사실이 조금 억울해졌다.
“확실히 같은 종족이니 많은 것을 배웠겠네?”
“무식하게 배웠지.”
라그나르가 이를 악물며 지금껏 담아 놓은 설움을 털어 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도서관에 던져 놓더니 책 다 읽을 때까지 감금하고, 다 읽었더니 자기 한 대라도 때리면 도와준다고 하고."
“으음….”
라그나르가 구구절절 말을 하면 할수록 괴팍한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지간히 서러웠는지 아이가 고자질하듯 말하는 라그나르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쩐지 그 용과 친근한 사이가 된 것 같아 괜히 질투가 났지만, 티를 내지 않기로 했다.
“그뿐만이 아니야! 반려의 인을 맺는 방법을 찾으러 간다고 하더니 멋대로 용언을 걸어 놓아서!"
“용언?”
드래곤을 조사하면서 책에서 보았던 내용이다.
드래곤은 목소리에 마력을 담아 상대의 무의식에 최면을 걸 수 있다고 했었지.”
“내가 정체를 밝힐 수 없도록 잠든 사이에 용언을 걸고 나가서!”
라그나르가 울컥하고 화를 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눈을 아래로 깔았다.
“나스일 때 말하는 거야?"
“…변명같이 들리겠지만 나도 사실을 밝히고 싶었어.”
라그나르는 그때를 떠올리면 답답하다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제프의 용언 때문에 내 정체와 관련된 모든 것들에 감각이 무덤덤해졌어.”
“그래서 성격이 그랬던 거야?”
“그건…. 그냥 사춘기라고 생각해 줘.”
스스로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지 라그나르의 볼이 부끄러움에 벌겋게 물들었다.
창피해하는 모습에 더 놀려 주고 싶었으나 이곳에 마냥 있을 수는 없었다.
'모두가 걱정하고 있을 거야.'
확실하게 답을 해 주고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우선 알겠어. 자세한 건 나가서 마저 이야기하자.”
“반려가 되어 줄 거야?"
라그나르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니. 중요해.”
라그나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반려에 대하여 답해 주기 전에는 빠져가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내가 위로 시선을 돌리자 라그나르는 다급하게 내 손을 더욱 꼬옥잡았다.
다시 고개를 내려 라그나르를 바라보니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몸만 컸지 여전히 어린애구나.
대부라는 사람은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는 것은 알려주지 않았나 보지?'
10년 동안 그런 것 하나 가르치지 않고 뭐 했던 거람.
자그마치 10년인데.
나는 대답을 하기 전 다시 라그나르에게 물었다.
“그 반려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 줄래?”
말하기 무섭게 라그나르가 내 두 손을 마주 잡고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서로의 심장에 반려의 인을 맺으면 인간은 드래곤의 수명만큼 삶을 이어 가게 돼.”
덜덜 떨리는 손이 무색하게도 그의 표정은 한없이 진중했다.
“어린 시절의 우리가 원했던 것처럼 평생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거야. 이 방법이라면 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확실히 어린 시절에는 그런 평화로운 일상이 가득하기를 바랐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달싹이다 곧 말문을 열었다.
* * *
세간에서는 마리아 헤로니스를 이렇게 부르고는 했다.
'아름다운 사랑 속에서 피어난 공작가의 꽃.’
마리아는 사랑받는 것이 익숙했고, 사랑을 베푸는 것 또한 익숙했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향하는 적의를 빠르게 눈치채고는 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그 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다정하게 대하면 언젠가 마음을 열어 주는걸!'
누군가가 마리아의 단순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들으면 멍청하다고 혀를 찰 법도 했지만, 마리아에게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마리아가 다정히 정을 베풀면 그 정은 배가 되어 돌아오고는 했으니까.
이 세상에서 마리아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고, 끝까지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는 했다.
마치 신께서 보살피는 존재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싶을 정도로 마리아는 사랑을 그득 받고 자라났다.
그렇기에 나스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쯤 쉽게 알 수가 있었다.
'신기한 사람.'
그는 마리아가 곤란한 상황에 운명처럼 나타나, 어쩔 수 없다는 듯 무심히 산적들을 해치웠다.
그러곤 마리아의 도움을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결국은 받았다.
그의 이상한 태도에 참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카스토르는 이동하는 내내 웃음기 하나 없는 나스의 무뚝뚝한 표정이 질린다 말하였으나 마리아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나스는 볼 때면 이상하게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했는데 왜 긴장을 한 걸까?
친구를 만나러 간다기보다는 마치 비장하게 마음을 굳히고서 청혼하러 가는 새신랑의 모습과 더 가까웠다.
자꾸 보이는 그 이상한 모습에 점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리아가 아무리 열심히 말을 걸어도, 친근하게 대해도 나 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지금껏 만났던 사람들과 다르게 언제나 싸늘한 눈빛으로 마리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새로웠고, 신기했다.
나스를 웃게 할 사람이 누구일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아카데미에서 드디어 궁금하던 나스의 소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다프네 베네디토라고 해.'
다프네의 하얀 머리칼이 햇빛에 반사되어 마치 별을 부숴 넣은 듯 반짝거렸다.
가녀린 체구임에도 위엄이 느껴지는 반듯한 자세, 기품 있는 몸짓, 그리고 마치 태양을 담아 놓은 듯 환한 금안을 마주친 그 순간 마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예쁘다.'
다프네는 아름다웠고, 다정했으며, 처음 보는 마리아에게도 그 누구보다 친절히 대했다.
'친해지고 싶어!'
다프네와도 친해지고 싶었고, 나 스와도 함께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으며 나스를 소개해 보았는데….
소용이 없었다.
마리아는 그날 처음으로 나스의 다양한 표정을 보게 되었다.
무뚝뚝하던 나스가 저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하는데도 다프네는 오히려 그를 모르는 사람 취급했다.
어쩐지 그 모습에 가슴이 지끈하고 아팠던 것 같다.
나스가 다프네를 신경 쓰기 시작하자 마리아의 속이 상했다.
‘지금 나를 따라 호위로 온 건데, 시선은 온통 다프네 선배님에게만….’
뾰로통하고 속상한 마음이 드니 더더욱 신경이 쓰이는 게 분명했다.
뚫어지게 쳐다보아도 나스는 마리아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았고, 결국 마리아는 나스를 따라서 다 프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딸꾹질을 내뱉을 뻔했다.
'화났나 봐.'
다프네의 싸늘한 표정에 마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첫인상은 예쁘고 친절했지만, 화가 나면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카스토르의 행동에 대해 사과를 할 때도 다프네가 이제 참다못해 화를 버럭 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프네는 그러지 않았다.
카스토르의 잘못을 네가 사과할 필요 없다며 바르게 짚어 준 것까지 그녀의 태도는 완벽했다.
그럼에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프네는 마리아를 위로하고 있었으나 단지 사실을 짚었을 뿐 마리아에 대한 호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아쉽게도 마리아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질 수가 없었다.
땅이 갑자기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발밑에서 갈라지는 땅을 보며 마리아는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이대로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하지? 카스토르도 못 찾고 죽어버리면….’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의 손길이마리아를 혼란에서 꺼내 주었다.
“나스…!”
“방해되니까 뒤로 빠져 있어.”
나스는 한마디 말을 던지고는 재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또 나스가 구해 줬다.'
마리아가 서 있던 자리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만약 나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시자 가슴 한구석이 다른 의미로 콩콩 요동치기 시작했다.
'설마 나 나스에게 반한 걸까?'
순간 심장이 떨렸던 그 감각을 떠올리며 마리아는 왼쪽 가슴 언저리에 손을 얹어 보았다.
'친구들이 말하는 좋아한다는 감정이 이런 것 같아. 자꾸 그 사람이 신경 쓰이고, 좋은 것만 해 주고 싶고, 그 사람이 행복하게 웃는 걸 보고 싶고.'
짧은 만남이었고, 대화도 일방적으로 마리아가 조잘거리는 것에 가까웠기에 이러한 짝사랑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자각했다.
삭막한 던전 속임에도 주변에 꽃가루가 떠다니는 듯 황홀한 기분에 마리아는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