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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09화 (108/185)

제109화,

마리아가 멍한 눈빛으로 끝조차 보이지 않는 깊은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스…. 다프네 선배….”

마리아는 서글픈 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마치 진주같이 동그랗고 투명한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눈물 자국을 만들어 냈다.

마리아의 입에서 자조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스왈드에 오지 말걸.”

마리아는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반대하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입술을 앙 깨물었다.

콘란드는 던전은 굉장히 위험한 곳이라 하였다.

‘하지만 엄마의 의견은 달랐는걸..'

유니스는 어떤 위험이 닥쳐도 마리아의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엄마의 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었기에 아빠의 걱정이 너무 커서 유난을 떠는 것 같다고 속으로 웃기도 했었다.

'이번 일은 아빠가 맞고, 엄마가 틀렸어.’

사고를 친 카스토르를 찾아서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인가.

홀로 달려가다가 부상을 당했는지 움직이는 것도 어려워 보이는 카스토르,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인해서 저 아래로 추락해 버린 다프네 선배.

'그리고 다프네 선배를 구하러 떠난 나스도 같이… 저 어둠 속으로 사라졌어.'

마리아는 허망한 표정으로 푹 꺼진 땅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죽었겠지.”

마리아의 눈가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단지 던전을 탐험해 보고 싶었을 뿐 누군가가 죽는 이런 끔찍한 상황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무지함을 타박하던 다프네의 싸늘한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처음으로 상상해 보는 가까운 이의 죽음은 마리아가 받아들이기에 너무 무거운 감정이었다.

'모두가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필사적이었던 건데.'

다프네의 말이 맞았다.

던전은 재앙이고, 재난이었다.

이 모든 상황은 던전을 우습게 본 헤로니스 남매의 탓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지독한 자괴감과 깊은 슬픔이 마리아를 좀먹어 갔다.

언제나 즐거움과 행복이 가득했던 마리아가 겪기에는 너무나도 어두운 감정이었다.

마리아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고, 눈물만이 뚝뚝 흐르자 카스토르가 상처 입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마리아에게 다가왔다.

“누님….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카스토르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마리아는 휙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다정하게 웃어 주던 누이의 눈이 사납게 빛나자 카스토르의 어깨가 잘게 떨려 왔다.

“난 다치지 않았어.”

“다행입니다.”

“다행? 다행이라고 했어? 이것 봐, 카스토르, 저 깊은 구멍 아래로 다프네 선배랑 나스가 떨어졌어."

마리아는 눈물로 젖은 눈을 닦지도 않은 채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애써 화를 참는 듯 씩씩거리는 목소리에 카스토르가 어떤 말도 쉽게 꺼내지 못하고 품에서 손수 건을 꺼내 들었다.

카스토르가 마리아의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려 손을 뻗자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그 팔을 내쳤다.

가 힘을 그 팔내.

힘없이 날아간 손수건이 팔랑거리며 근처에 떨어졌다.

“누님?”

마리아의 거친 행동에 카스토르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카스토르, 너 때문에 일어난 비극보다 내가 우는 것이 중요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여자와 확실하게 경쟁을 하기 …”

“경쟁? 네 눈에는 이 끔찍한 상황이 보이지도 않아?"

마리아는 엉망이 된 주변을 가리키며 울부짖었다.

카스토르는 가끔 자존심을 세워 사고를 치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막 나가는 아이는 아니었다.

아니, 이 역시 마리아의 생각일 뿐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내가 말했잖아. 던전은 우리 생각보다 더위험한 곳이니까 조심하자고,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고 했었잖아!”

“저는 누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동생이 되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자꾸 그 여자가 제 앞을 가로막고 몬스터를 해치우고서 잘난 척을 하니까!”

“그래서 사람 목숨 보다 네 자존심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거야?”

마리아는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사랑하는 동생에게 소리를 질렀다.

마리아가 큰 소리로 화를 내자 카스토르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누님…. 울지 마세요. 다 누님을 위해서 그런 것인데. 그러니 부디 진정하시고….”

카스토르가 안절부절못하며 마리아를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러한 반응에 오히려 기가 찬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이 이상해. 달래 주려고 하는데 전혀 기쁘지 않아.'

오히려 저를 감싸주려는 이 상황이 우스울 정도로 끔찍했다.

“누님이 우시면 저도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픕니다. 혹 제가 책임을 물게 될까 걱정돼서 그러십니까?”

“그런 게 아니라.…!"

“그렇다면 여기 있는 증인들을 모두 없앨까요?”

“뭐…?”

카스토르의 표정에는 장난기라고는 섞여 있지 않았다.

그의 진지한 표정에 마리아는 마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지금에서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으나 갑작스럽게 떠오른 궁금증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가슴 한구석을 맴돌던 의문이었으나 감히 오래 떠올리지 못했던 의심….

“카스토르, 지금껏 나를 방해하거나… 혹은 싫어하는 사람들을 처리해 왔어?"

“누님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놈들을 어떻게 가만히 두겠습니까.”

죄책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어조에 다시 한번 마리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사람들은 언제나 마리아를 사랑하며 아껴 주었다.

그래서 마리아도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언제나 웃음이 가득하고 즐거움이 가득한 그녀에게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틈새도 없었다.

마리아를 둘러싼 세상은 그녀에게 그런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사랑 속에서 자란 귀한 꽃에 어두움과 부정적인 감정은 어울리지 않다고, 언제나 행복하고 즐겁게 자라나라고 말이다.

과연 이것이 정말 사랑인 걸까?

아니, 이게 어떻게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모두들 어두운 길은 볼 필요가 없다는 듯 밝은 길로만 자신을 안내해 준다.

이런 사소한 것에 관심 가질 필요 없다는 듯 울지 말고 웃으라는 것이 문득 너는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요처럼 느껴졌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자각하자 마리아가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쥐며 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누님. 고작 저들이 죽었다고 해서 누님이 슬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두 사람 다 평민이고 제가 잘 해결할 테니…."

“그게 무슨 소리지?"

헤로니스 남매의 대화에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목소리에 마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부서진 벽 너머에서 걸어오는 짙은 붉은색의 머리칼이 보였다.

머리색만큼 강렬한 붉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마리아는 죄책감에 플뢰르를 계속 마주할 자신이 없어졌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어."

금방이라도 억눌린 분노가 터져 버릴 것 같은 목소리에 마리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일행 중 다프네 양과 나스 군이 저 아래로 떨어졌다.”

마리아도 카스토르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자 뒤에서 지켜보던 기사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플뢰르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는 것은 금방이었다.

“…미안해요. 다, 다 우리 때문이에요.”

마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자 그 옆의 카스토르가 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제 누이의 눈물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카스토르의 행동에 결국 플뢰르는 참지 못하고 폭발해 버렸다.

플뢰르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다가가 카스토르의 멱살을 잡아챘다.

"이게 무슨 짓이지? 놓아라!”

플뢰르는 카스토르의 멱살을 잡은 채 발버둥 치는 그를 질질 끌고 갔다.

뻥 뚫린 커다란 구멍 앞에 도착하자 카스토르가 있는 힘껏 저항하기 시작했다.

"왜? 죽기는 무섭나?"

“이거 놓으라 했을 텐데!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카스토르의 발끝이 아슬아슬하게 구멍의 경계에 멈춰 섰다.

끝자락에 매달린 카스토르의 발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지금껏 어떤 던전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왜냐고?

지금껏 너 같은 새끼는 한 명도 없었으니까!”

“지금 뭐라고…!"

신랄한 비난에 카스토르의 얼굴이 모욕을 입었다는 듯 붉게 달아올랐다.

“검을 좀 휘두를 줄 안다고 해서 네가 무엇이라도 된 줄 아느냐!"

아랫사람을 가르치듯 거만한 어조에 플뢰르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놈은 정말 쓰레기구나."

“뭐?”

플뢰르는 가차 없이 카스토르를 평가하곤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그를 한쪽으로 던져 놓았다.

플뢰르의 눈은 당장이라도 그를 저 아래로 던져 버릴 듯 이글거렸으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다만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카스토르의 얼굴로 던져 버렸다.

“이게 뭐 하는….”

“네가 그토록 원하던 결투 신청이다.”

플뢰르는 장갑을 벗은 손으로 헝클어진 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와 함께 나오는 거친 숨에 플뢰르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분노를 참고 있는지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숭고한 이유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네 놈이 검을 드는 이유는 고작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가?”

플뢰르의 목소리는 가까스로 분노를 참고 있는 것을 보여 주듯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카스토르가 얼굴을 붉힌 채 무어라 항변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플뢰르의 각오가 담긴 사납고 무거운 눈빛에 어깨가 짓눌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그 엄청난 기백에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움츠러들었고, 차마 말리지도 못하고 두 사람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내 검은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서 움직인다. 그리고 조금 전네 놈의 멍청한 짓 때문에 나는 검을 휘두를 이유도, 내 삶의 이유도 잃어버렸다.”

플뢰르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눈물마저 메마른 듯 지독한 상실감으로 충혈돼 있었다.

“검을 들어라. 너를 죽인 뒤 나 또한 자결하여 아가씨 곁을 따라 갈 테니.”

플뢰르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미, 미친 거야?”

카스토르의 목소리가 두려움에 달달 떨려 왔다.

“네가 수업 중에 내게 보인 모욕은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플뢰르의 날카로운 검 끝이 카스토르에게 향했다.

“당장 검을 들어라.”

카스토르는 겁에 질려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플뢰르의 기백에 짓눌린 그는 검은커녕 멀쩡히 일어나기도 어려웠다.

"나, 나는 싫다!"

“이 와중에도 남은 것은 그 자존심뿐인가? 그것을 빼면 네게 남는 것은 있나?"

플뢰르는 한심하다는 시선을 아끼지 않은 채 검을 들어 올렸다.

“좋아, 네가 검을 들기 싫다면 내가 들게 해 주마."

플뢰르가 다시 검을 움직이려는 그때 커다란 구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뜀박질 소리?’

혹시 몬스터인가 싶어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그때 구멍에서 무언가가 튀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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