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지진도 끝이 났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라그나르. 원래 드래곤들은 이렇게 잘 뛰어?"
라그나르는 나를 업어도 힘이 들지 않는지 거침없이 벽을 타고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
라그나르는 토라진 듯 얼른 답을 하지 않았다.
“다들 잘 뛰나 보네.”
“…다른 녀석들보다 내가 더 잘될걸?”
“요제프라는 드래곤보다도?"
“으음….”
“거짓말이었네. 라그나르는 거짓말쟁이구나.”
라그나르의 반응에 작게 웃으며 그의 등에 편히 얼굴을 기대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했던 대답 때문에 더더욱 이런 부루퉁한 반응을 보이는 듯싶었다.
나는 결국 반려가 되어 달라는 라그나르의 청을 수락하지 않았다.
마치 영생과 같이 느껴질 정도로긴 생명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겠으나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고마워.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어..'
깔끔한 거절에 라그나르는 이유를 물었다.
확실히 고생고생해서 들고 온 방법을 수락해 주지 않는다면 억울할 법도 하겠지.
'하지만 그건 우리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잖아. 난 네 연인 이 아닌 친구인걸.'
'친구….'
라그나르는 계속해서 그 단어를 읊조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쉽게 수긍하는지라 조금 찝찝하였으나 그래도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을 수 없었기에 우리는 재빠르게 움직이기로 했다.
'수긍하는 것과 별개로 토라진 것 같기는 하단 말이지.'
라그나르가 싫어서 거절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위쪽에서 소란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플뢰르의 화가 난 목소리에 더는 생각을 이어 갈 수가 없었고, 구멍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카스토르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플뢰르?”
"아, 아가씨?"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라그나르의 등을 툭툭 치고서 바닥으로 내려와 플뢰르에게 다가갔다.
“왜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니.”
"아가씨께서 ….”
“죽은 줄 알고 무서웠어?”
내 말에 플뢰르의 눈가에 빠르게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아래 타고 흐르는 눈물이 보여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플뢰르를 끌어 안아 주었다.
“걱정시켜서 미안."
"아니, 아닙니다. 제가 지키지 못해서….”
나를 생각하는 플뢰르의 마음이 고마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잠시 훌쩍이는 소리가 울리더니 그것도 금방 그쳐 버렸다.
“이제 괜찮습니다.”
붉어진 눈가가 안쓰러웠으나 더는 위로해 주지 않는 것이 그녀에게도 더 나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라그나르를 번갈아 보는 사람들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다들 무사하신가요?"
"우린 무사하지. 다프네 양과 나 스 군은 괜찮나?”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주변의상황을 살펴보았다.
어정쩡하게 주저앉아 있는 카스토르는 겁에 질린 듯해 보였고,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마리아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다, 다행이에요. 정말 죄송해요.
죄송….”
“내가 말했지. 네 잘못이 아닌 일에 사과하지 말라고.”
나는 마리아를 향했던 시선을 카스토르에게로 돌렸다.
움찔 떠는 카스토르를 보자 내 입가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나는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던전에서 무사히 빠져나간 뒤 공자님께서는 오늘 일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
“그리고 다음부터 아카데미 학생으로서의 던전 출입이 금지될 테니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다시금 싸늘하게 정적이 내려앉았다.
카스토르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선배. 옆에 있는 그 남자가 아까 그 사람 맞아요?”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제롬이 나서서 궁금한 점을 거침없이 물어보았다.
확실히 조금 전까지 하늘색이었던 라그나르의 머리카락이 갑자기 새카맣게 변해 있으니 이상해 보일 법도 했다.
"아. 이곳에서 우연히 만난 내 소꿉친구야. 이름은 라그나르라고 해."
"라그나르?”
모두가 자신에게 주목해도 라그나르의 시선은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어찌나 끈질긴지 할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환하게 웃더라.
친구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주인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강아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에 푸스스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사정이 있어서 그간 머리랑 눈색을 마법으로 바꾸고 다녔었대.”
“아는 사람 아니라더니."
배신감이 가득한 제롬의 목소리에 나는 뻔뻔하게 말을 덧붙였다.
“나스라는 사람은 모르지만, 라그나르라는 사람은 알거든.”
“궤변인 거 알아요? 머리랑 눈색만 다르지 완전 똑같이 생겼는데 못 알아본다고?”
“10년 전에 헤어진 친구인데 쉽게 알아보는 것도 이상하지."
"아, 한마디를 안 져 주시네."
제롬이 어이없다는 듯 투덜거렸으나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걱정했나 보다.
'다행이지.'
만약에 내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이곳마저 엉망이 되어 있었으리라.
“다, 다행히 화해를 했나 보네요."
제롬과 나 사이의 대화가 끝나자 마리아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게 다 다프네가 용서해 준 덕분이지. 이제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야.”
마리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질척거리는 라그나르의 반응에 옆에 있던 플뢰르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미쳤나…?”
작게 중얼거렸으나 내게 들린 소리를 라그나르가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라그나르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어쩌지.”
하지만 그 웃음도 잠시, 이어지는 내 말에 그의 표정이 마치 유리가 깨지듯 부서지고 말았다.
“라그나르는 내 옆에 있을 수가 없어.”
“뭐, 뭐? 왜?”
“왜기는."
나는 플뢰르와 제롬, 그리고 나를 가리키며 방긋 웃었다.
“라그나르는 우리와 다르게 아카데미 학생이 아니잖아. 마리아의 정식 호위가 아니라는 것도 밝혀졌으니.”
“서, 설마…?”
뒷말을 예상했는지 라그나르의 표정이 딱딱히 굳어졌다.
나는 라그나르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라그나로, 너는 아카데미 출입 금지야.”
* * *
나는 책상 앞에 쌓인 편지를 보며 키득키득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레녹스와 리카르다에게 온 편지에는 라그나르를 향한 분노가 가득 쓰여 있었다.
가벼운 불평으로 시작해 격렬한 욕설로 끝나는 내용에 나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내었다.
편지에 의하면 라그나르는 겨우 연금탑을 떠나 드디어 마탑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나는 당당하게 화낼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던전에서 빠져나온 뒤 라그나르는 울먹거리는 얼굴로 내게 물었었다.
'혹시 아직도 내게 화가 났어?'
그에 나는 고개를 저었었다.
비록 그가 나스일 때 정체를 숨긴 건 화가 나기는 했지만, 원인 제공을 한 것은 나였으니까.
나는 화낼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럴까?
라그나르가 나스라는 것을 알면 배신감을 느낄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라 몇 명 더 있지 않은가.
자꾸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라그나르를 위해 조건을 붙여 주었다.
나는 엄마와 레녹스, 리카르다 그리고 시몬과 악셀리우스까지 모두 찾아가 그들에게 용서를 받고 오면 다시 만나자고 하였다.
'그쯤이면 대략 방학이기도 할 테고,'모두에게 직접 알리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내 옆에 계속 있고 싶으면 그들에게 당연히 알리러 가야 하지.
'암암. 그렇고 말고.'
자세한 이야기는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라그나르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어쩔 수 없이 떠났던 것을 떠올리며 다시 웃다가 더 늦기 전에 편지를 챙겨 학생회실을 나섰다.
'그나저나 드래곤이라니.'
이런 내용이 원작에도 있었나?
라그나르의 정체가 워낙 베일에 싸여 있긴 했지만 드래곤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면 모를 리가 없다.
다시 말해 라그나르가 자신의 종족에 대해서 알아차린 것은 원작과 관련 없는 이야기라는 건데.
'아직 듣지 못한 것이 남아 있으니 듣고 나서 천천히 생각해 봐도 되기야 하겠지만….’
생각에 잠긴 채 거침없이 복도를 거니는데 복도 끝에서 짜증이 서린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쩜! 귀족이라는 자존심도 없으신가요? 그렇게 천박하게 웃음을 흘리고 다니시다니!"
'이런.’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아카데미에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화를 낼 수 있는 여자, 표독스러움을 숨기지 않는 여자.
탐스러운 장미꽃처럼 아름다우나가시가 많아 접근하기 어렵다는 소문의 여자.
'하필 글렌 공녀가 앞에 있다니.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저렇게 시달린다니 불쌍하기도 하지.'
글렌 공녀와 얽히면 피곤해질 정도로 귀찮아지기는 했으나 도움이 없다면 상대방은 저 자리를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에 깜짝 놀나는 빠르게 그쪽을 향해 갔고, 달려가 글렌 공녀의 손을 잡았다.
“무슨 짓입니까, 공녀님!"
“감히 어디서 천한 것이 끼어들어? 이것 놔라!”
"아무리 공녀님이라고 한들 타국의 공녀께 손을 올리시려 하다니요!"
“놓으래도!”
글렌 공녀의 앞에 있는 사람은 나를 보며 깜짝 놀라더니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프네 선배님?”
마리아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님? 같은 고향 출신이라고 서로를 감싸 주는 모양이죠? 하, 같잖기도 하지!”
'젠장'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욕설을 삼키며 최대한 입가에 미소를 띠려 노력했다.
글렌 공녀는 결국 내 손을 뿌리쳤다.
생긴 것과 다르게 힘이 넘치는 아가씨인지라 나는 마리아를 보호 하듯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다 공녀님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타국의 교환 학생에게 손을 올렸다가는 징계를 피하시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이러한 내 말에도 글렌공녀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내게 손을 올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 이 여자가 활약할 때도 되었지.'
꿀을 녹여 낸 듯 아름답고 화사한 금발에 푸르른 녹음이 담긴 듯 선명한 녹색 눈동자.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매가 유독잘 어울리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자.
카롤리나 글렌,
눈앞에서 표독스럽게 우리를 바라보는 여자의 정체는 바로 원작의 2부에서 등장하는 악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