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11화 (110/185)

제111화.

원작 2부에서 마리아의 아카데미생활을 방해하는 사람으로 표독스럽지만 아름다운 여인.

카롤리나는 평민의 신분으로 아카데미를 활개하고 다니는 마리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자존심이 높은 카롤리나는 무리에서 제가 돋보이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마리아가 던전을 해결하는 등 뛰어난 두각을 보이며 아카데미의 인기인으로 올라서게 되자 사달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사소했던 카롤리나의 질투가 점차 몸집을 키워 심각한 괴롭힘으로 이어졌고, 결국 모두에게 악녀로 이미지가 굳혀졌다.

'원작에서는 글렌 공자 대신에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었었지..'

마리아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하던 렉시우스가 멍청하게도 내전에 참가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서 억지로 앉혀진 자리였다.

카롤리나는 후계자가 된 뒤에도마리아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하지만 결국 공작가의 비리가 밝혀지면서 자결하여 이야기에서 퇴장하였다.

전형적인 악녀의 몰락.

적어도 원작에 표현된 카롤리나 글렌은 그렇게 평가되었다.

'내 생각은 다르지만.'

내가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관찰한 카롤리나는 원작에 묘사된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공녀님.”

나는 나지막이 카롤리나를 불렀다.

카롤리나는 짜증을 숨기지 않은 사나운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공녀님께서 사사로운 일로 화를 내실 분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이 여자가 내게 먼저 무례를 저질렀다.”

카롤리나의 말에 마리아가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는 그냥….”

“던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다른 이가 비꼬는데도 가만히 웃고만 있더군. 결국, 공녀라는 지위를 깎아내리는 말까지 나왔는데도 말이지.”

'이런.'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것 같았다.

겁도 없이 카롤리나의 앞에서 공녀의 지위를 무시한 자들은 아마 뺨 한 대로 끝나진 않았겠지.

"내가 버젓이 옆에 있는데도 그 말을 꺼냈다는 것은 이 여자를 빗대어 나를 함께 모욕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나? 하!"

카롤리나가 기가 막힌다는 듯 터트린 헛웃음에 나는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저는 정말 몰랐어요. 그저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게 해야 하지 않냐는 말에 웃어 넘기려고 했던 것인데….”

“그러니까 왜 웃으면서 넘어가냔 말이야! 그대가 타국에 왔다고 하여서 공녀라는 지위가 사라지나?"

마리아가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카롤리나의 붉은 입술이 비웃음을 가득 머금었다.

"이러한 태도가 나를 더욱 화나게 해. 지위에 걸맞는 품위를 갖추어야지. 누가 보면 내가 괜한 사람을 괴롭히는 줄 알겠어.”

“진정하세요. 공녀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공녀님께서는 허튼 일로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흥.”

다행히 내 말에 카롤리나의 화가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카롤리나는 이유 없이 화를 내지 않았다.

단지 자신을 모욕하거나 욕보이는 자들에게 용서가 없을 뿐.

두고두고 참아 오던 화가 마리아의 태도에 터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말려야 했다.

내 말에 조금 누그러지나 싶었던 카롤리나의 눈꼬리가 다시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앞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공녀님께서 마리아를 괴롭히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고, 쉽게 소문이 퍼질 수도 있습니다.”

"......."

“구설에 오르는 것을 싫어하시잖아요.”

내가 카롤리나를 지켜보면서 느꼈던 원작과 다른 점.

카롤리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한다.

글렌 공작가의 공녀라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은 있으나 자부 심보다는 그 지위에 대한 책임감에 더 가까웠다.

무리의 중심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굴었으나 많은 이와 어울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소문에 휩쓸리는 것도 싫어하였다.

사람들의 주목을 빼앗겨 마리아를 질투했던 원작의 내용과는 판이한 성격이었다.

아직도 이 세상이 원작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다면 오늘의 일은 카롤리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잡생각은 여기까지 하고 일단 상황부터 마무리해야겠군.'

악녀로 몰리는 것은 한순간이니 최대한 카롤리나를 조용히 돌려보내는 것이 좋았다.

물론 카롤리나는 나를 달가워하지 않겠으나 어쩔 수 없지.

“글렌 공자님께서도 이 상황을 달가워하시지 않을 겁니다. 공자님은 마리아를 꽤 마음에 들어 하시거든요.”

이 사실은 아카데미 학생이라면 누구든지 아는 사실이었고, 카롤리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카롤리나와 렉시우스의 사이 또한 좋지 않으니 이런 소문이 퍼지면 쓴소리를 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본 카롤리나는 악녀로 낙인 찍혀 사라지기에는 죄가 없는 사람이니 적당한 선에서 막아줄 작정이었다.

'이게 내 최대한의 호의지.'

내가 조용히 카롤리나를 바라보자 그녀가 입술을 짓씹었다.

“주제가 넘었구나. 네 일도 아닌데 말이지. 상단의 일에 이만큼 신경을 쓰는 편이 네게 더 좋을 텐데.”

카롤리나는 마리아를 다시 흘겨보더니 오만한 표정으로 우리를 외면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또각거리는 구두의 굽 소리가 멀어지고, 마침내 복도에는 나와 마리아만 남게 되었다.

나는 한숨 돌렸다는 심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다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리아는 언제 우울했냐는 듯 활짝 미소를 피웠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가식이랄 것이 없는 마리아의 미소는 마냥 순수하고 밝았다.

그 해맑은 미소를 보아하니 내가 자신을 도와줬다고 생각해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양이었다.

착각은 바로잡아 주는 것이 좋겠지.

“내가 너를 도와주러 이 상황에 끼어들었다고 생각하는구나.”

"아, 아닌가요?”

내 차가운 목소리에 마리아의 미소가 흐려졌다.

“그래. 아니지. 나는 네가 아니라 글렌 공녀를 걱정한 거니까.”

“아…."

자신의 착각이 뒤늦게 부끄러워진 마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져 있었다.

“글렌 공녀가 외국인인 너를 핍박해 추문이 불거진다면 아카데미가 시끄러워지잖니.”

“그… 정말로 소문이 퍼질까요?

이렇게 둘이서만 따로 이야기했는데.”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 장면을 보았다면 아마 널리 퍼졌겠지."

내 말에 마리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마리아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죄송해요, 선배님.”

죄책감이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아서 웃으면서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던 건데. 설마 옆에 글렌 공녀가 있는 줄 몰랐어요.”

“듣지 않아도 될 모욕까지 웃어 넘기지는 마. 교환 학생이라고는 하나 너에게도 엄연한 신분이 있는데.”

“모두들 악의가 있어서 꺼낸 말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카스토르가 잘못하기도 했으니까요.”

마리아가 구구절절 내뱉는 변명을 잠자코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내게 변명할 것 없어. 다음부터 이런 일 생기지 않게 네 자리를 잘 잡았으면 좋겠네.”

애초에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이도 아니니까.

그렇게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 때에 마리아가 나를 붙잡았다.

나는 붙잡힌 소매 끝을 흘깃 내려다보다 천천히 시선을 올려 마리아를 마주 보았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마리아의 투명한 눈동자에 차갑게 굳은 내 얼굴이 비쳤다.

"아.”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리아가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저… 너무 늦었지만, 몸은 괜찮으세요?”

“괜찮아."

“그때 일에 대해서 제대로 사과도 못 했던 것 같아서요. 카스토르와 함께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은데 괜찮으시다면…."

마리아가 말을 마저 잇기 전에 반대쪽 손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떨쳐 냈다.

“그 나스, 아니 라그나르 씨에게도 사과해야 할 것 같아서요. 기분이 나쁘시겠지만….”

마리아의 입에서 라그나르의 이름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다시 그녀의 말을 잘라 내었다.

“그럴 것까지 없어. 이미 끝난 일이니 괜찮아.”

간신히 예의만 갖춘 내 딱딱한 목소리에 마리아의 얼굴이 더 울상이 되었다.

“선배님은….”

마리아는 말을 꺼내다 말고 다시 푹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망설이는 마리아의 긴 속눈썹이 가련하게 파르르 떨렸다.

대화도 몇 마디 채 나누지 않은 우리 사이에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이러는 걸까.

마리아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하는 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물음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선배님은 제가 싫으신 거죠?"

"뭐?"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인지라 평온했던 내 표정이 깨져 버렸다.

내가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바라보자 마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까스로 미소를 유지한 입매와 눈물로 붉어진 눈가, 마지막으로 괴로움이 가득 담긴 커다란 눈망울이 차례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어째서?’

마리아가 왜 나를 이렇게 바라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리아는 더는 묻지 않았다.

더는 .

내가 한참이고 답이 없자 그저 체념이라도 한 듯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을 뿐이었다.

'괜히 끼어들었나.'

이런 곤란한 질문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해서 조금 당황해 버렸다.

나는 놀란 표정을 감추고는 마리아를 가만히 응시하였다.

'혹시 내 정체에 대해 뭔가 눈치를 챈 걸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해 보았으나 지금 마리아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것은 아닌 듯했다.

마리아의 등 뒤로 서서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주홍빛으로 가득 물든 하늘이 복도를 물들였고,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이 창문을 헤집고 들어와 마리아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서글픈 눈빛이 극적으로 보였다.

'정체를 들킨 건 아니구나.'

마리아라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서글픔이 아니라 죄책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날 보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동안 지켜본 마리아는 그러했다.

호감을 느끼고 있는 이가 자신에게 쌀쌀하게 대하니 의아해 한다는 것이 가장 가까운 정답인 듯했다.

'어째서 내게 호감을 갖게 된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불어오는 바람에도 꼿꼿이 서서 나를 바라보는 마리아를 향해 말해 주었다.

“난 널 좋아하지 않아."

마리아는 내 말이 끝나지 않았음을 아는 듯 여전히 긴장에 가득찬 얼굴이었다.

다시금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겨울바람은 언제나 차고 거칠어 내 삶을 꺾어 버릴 작정으로 날을 세운 듯했다.

하지만 어떤 풍랑이 나를 덮치더라도 내 각오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죄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받게 할 것이고, 억울함이 있다면 밝혀낼 것이다.

그것이 단지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 내 삶의 새로운 목표가 되었으니까.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지.”

어느새 내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마리아의 표정은 길어진 그림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 말은 해 주고 싶었다.

“넌 잘못한 게 없으니까.”

그래, 마리아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부모의 죄를 마리아에게 투영하여 그녀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다른 이들은 그래도 나만큼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고, 또 억울한지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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