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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12화 (111/185)

제112화.

"과연. 상단에 더 신경을 쓰라는 건 이런 뜻이었나.”

나는 며칠 전 카롤리나가 남기고 떠난 말을 떠올리며 편지를 다시 읽어 내렸다.

엄마의 편지에는 황궁에서 납품하는 상단을 교체할 계획인 것 같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긴. 내전이 곧 끝날 테니.'

반란군이 힘을 잃어 가니 황궁에서도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 들었다.

반란의 주모자인 라몬트 오스왈드의 목을 치면 현 황제인 에버하르트 오스왈드는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더는 외국 상단의 힘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이거지.”

귀족들을 감시할 수 있는 인력이 늘어나니 굳이 베네디토를 다시 선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서로 이용하는 입장이었지만 막상 내쳐진다니 썩 내키지 않네."

지금껏 쌓아 온 것이 있는데 단물만 쏙 빼먹고 빠지겠다니 이러니 나라가 이 꼴이지.

‘원작에서는 반란이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고, 마리아가 클레멘스로 돌아가면서 오스왈드의 이야기는 더는 등장하지 않았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래도 교체하기 전 협상의 기회는 주는 것 같은데. 조건이 참….”

나는 편지 아래에 적힌 황실의 입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황실에서 다음 납품 상단으로 고려하는 곳은 글렌 공작가의 그레이스 대상단이었고, 앞으로 상단을 책임질 후계자에게 협상의 기회를 주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심지어 황제와의 협상이라."

얼마나 쥐어짜낼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이 기회를 잡으려면 우리 역시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할 듯싶었다.

“외숙부를 이제야 뵙게 되네."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긴장이 되었으나 그만큼 기대가 되기도 했다.

과연 내 친엄마의 형제는 어떤 사람일까.

권력에 미친 폭군일까 아니면 다른 숨겨진 모습이 있을까.

끼잉-

아래에서 졸음이 가득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키키의 울음소리에 생각을 멈추었다.

시선을 돌리니 키키가 창문가에서 낑낑거리며 벽을 긁는 것이 보였다.

“키키?”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세상모르게 푹 잠들어야 할 아이인데 악몽이라도 꾼 것일까?

나는 편지를 내려놓고는 키키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왜 그래?"

끼잉, 끼이잉-

키키가 창문가를 향해 작은 앞발을 마구 버둥거렸다.

그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나는 창문을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라 비명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내었다.

4층인 내 방의 창밖으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바로 닿아 있었다.

그 나무의 두꺼운 가지에 라그나 르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은은하게 비치는 램프의 빛에 반사된 보랏빛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더라면 감쪽같이 모를 뻔했다.

“까, 깜짝이야.”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며 키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화가 났다.

이 시간에 갑자기 나타나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니.

'내가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해서 내 말을 그리 가볍게 여긴 걸까.

모두에게 용서를 구하고 돌아오라고 했는데!'

나는 분을 삭이면서 창문을 벌컥열었다.

그 소리에 라그나르가 천천히 빛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너…!”

하지만 나는 내 생각처럼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라그나르의 꼴이 떠났을 때와 다르게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던전 속에서도 멀쩡했던 라그나 르의 몸에는 잔뜩 붕대가 감겨 있었다.

누가 보아도 환자의 모습이었기에 나는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라그나르가 어색히 웃었다.

"다쳤어? 어쩌다가…!"

“레녹스랑 리카르다가….”

“오빠들이 왜? 아, 아니야. 우선 안으로 들어와.”

이런 한겨울 밤에 환자를 밖에, 그것도 저렇게 높은 나무 위에 둘수는 없었다.

나는 주위를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라그나르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가 단호한 표정으로 응시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곧바로 창문을 닫고 꼼꼼히 커튼까지 치자 환한 불빛 아래 라그나 르의 모습이 더욱 선명히 보였다.

어두운 곳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처참한 모습에 저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라그나르가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리자 더욱 속상함이 밀려왔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내 표정에 라그나르가 놀라 오히려 더욱 과장하며 웃었다.

"별것 아냐! 둘 다 내가 나스라는 사실을 알고서 화를 내다가 나를….”

"너를?”

라그나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을 가장 화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바로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두 번째는, 두 번째고 뭐고 나는 라그나르의 망토를 잡아당기며 버럭 화를 냈다.

“제대로 말해!”

“하지만 내가 말했다가 세 사람의 우애가 나빠지면 어떻게 해?

다프네가 나를 걱정해 주는 건 좋지만 난 그건 원치 않는걸.”

이런 꼴을 하고서도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라그나 르의 망토를 잡아 뜯었다.

제대로 여며지지 않는 셔츠 사이로 가슴과 어깨를 두르고 있는 붕대도 보였다.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데?"

내 재촉에 라그나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드래곤인 것까지 밝히니 레녹스가 진짜 드래곤은 죽지 않겠지 라면서 새로 개발한 폭탄을 던져 댔어.”

“뭐?”

다정한 레녹스라면 조금 나쁜 말을 하더라도 결국 눈물로 맞아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폭탄을 던져 댔다니?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듯 라그나르는 마저 말을 이었다.

“레녹스가 가까스로 용서를 해주고 나서야 리카르다에게 갔는 데….”

“그리고?"

“리카르다는 자초지종을 듣더니 한 번 더 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며 마법으로 마구 공격했어.”

리카르다라면 그리했을 거라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화도 풀렸고, 용서도 받았으니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그나르가 어깨를 축 늘어트린채로 헤실거렸다.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편지지가 들어 있을 서랍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 다 내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화를 낼 수야 있지만 아무리 라그나르가 드래곤이라고 한들 그렇게 위험한 공격을 하다니!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보낸 편지에는 라그나르에게 조금 화를 내긴 했지만 결국 원만히 용서해 주었다고만 쓰여 있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다시 라그나르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지난번보다 뺨이 많이 핼쑥해진 것 같았다.

그의 여윈 뺨을 새삼 깨닫자 분노로 잠시 잊고 있던 서글픔이 다시 차올랐다.

“엄마한테는 가 봤어?"

“제일 처음에 갔는데 바로 쫓겨나 버려서.”

라그나르의 말에 나는 탄식을 삼켰다.

오늘 엄마가 보낸 편지에는 라그나르에 대한 어떤 말도 없어 아직가지 않은 줄 알았더니 아니었구나.

“그래도 키키는 여전히 나를 반겨 주네. 기쁘다.”

라그나르가 자신의 발치를 돌아다니는 키키를 안아 들고서 부드럽게 뺨을 부볐다.

사이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다시금 마음이 찡해지려는 찰나 라그나르가 키키를 안은 채 나를 보며 말했다.

"내일 클레멘스로 넘어갈 생각이었어. 그래서 떠나기 전에는 다프네를 보고 가고 싶어서 잠시 들른 건데 역시 많이 놀랐지?”

라그나르가 사과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무해해 보이는 그의 미소는 어린 시절 그대로였다.

라그나르에 대한 화는 풀린 지 오래인지라 나오는 내 목소리는 퍽 다정했다.

“이 밤중에 위험하게.”

“그냥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내가 욕심이 많아서. 발이 움직이지 않더라고.”

나를 보고 싶었단 말을 참으로 길게도 했다.

“그리고 던전에서 급하게 정체를 밝히느라 말하지 못한 것도 있고,"

“어떤 말?"

“그동안 걱정시켜서 미안해.”

뜬금없는 사과에 내가 눈을 깜빡이자 라그나르가 후회가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레녹스가 묻더라고, 다프네에게 제대로 사과는 했냐고, 생각해 보니 사과도 제대로 못 하고 떠난 것 같아서 계속 마음에 걸렸어.”

라그나르가 우물쭈물 말을 덧붙였다.

"당장 반려의 인에 대해서 알려 주고 싶어서 마음이 성급했지."

라그나르는 우선순위가 바뀌었었다며 서글프게 말했다.

“괜찮아. 난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으니까. 사정이 있다고 하니 이해도 됐고."

나는 피식 미소를 짓고는 라그나 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주었다.

비슷했던 눈높이가 어느새 한참 올라가 있어 한껏 까치발을 들어야 했으나 힘들지는 않았다.

“시몬이랑 아저씨에게는 우선 편지를 쓰자. 그리고 같이 만나러 가자.”

“…그래도 돼?”

“그래도 내가 있으면 두 사람도 폭력은 좀 자제하지 않을까?"

레녹스와 리카르다는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다지만 더는 라그나르가 다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 말에 라그나르는 활짝 웃으며 내 손에 자신의 뺨을 부볐다.

어릴 적과 변함없는 모습에 문득 그리움에 젖어 있던 중 라그나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다프네의 옆에 있으려면 상단주님의 허락은 받아야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그나르가 아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섭다.”

몰라보게 자랐으면서 엄마의 잔소리는 여전히 무서워하는 자식의 모습과 같아 보여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자 라그나르는 더욱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 방학이니까 나도 집으로 돌아갈 거야. 그전까지는 용서를 받아야 해. 알겠지?"

“응.”

라그나르가 한숨을 내쉬며 키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게로 팔을 벌리며 말했다.

“힘내라고 응원해 주면 안 돼?”

"몸만 다 컸지 아직도 어리광쟁이네. 나스일 때 어떻게 그리 말을 아꼈담.”

나는 웃음을 참으며 라그나르를 따라 팔을 벌려 그를 꼭 안아 주었다.

달콤한 초콜릿 향이 은은하게 풍겨 왔다.

다친 와중에도 초콜릿을 야금야 금 먹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다시금 웃음이 터져 나와 라그나 르를 시무룩하게 만든 것은 한순간이었다.

다음 날 레녹스와 리카르다에게 연락을 해 추궁해 보니 라그나르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화를 내다 두 사람의 말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믿지 않으니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드래곤이라 괜찮다며 바로 회복되는 걸 보여 주는데 어떻게 가만히 넘어가겠어.'

레녹스는 침착한 목소리에 화를 억누르는 기색이 가득했다.

'레녹스에게 듣고 만나자마자 바로 마법을 날렸는데 피할 수 있으면서 일부러 맞은 거야! 분명 벌써 다 낫고도 남았을걸!'

리카르다는 끓어오르는 화를 감추지 않았다.

말투는 달랐으나 두 사람 모두 라그나르의 태도에 치를 떠는 것은 같았다. 그래도 어쨌든 두 사람은 라그나르를 용서했다고 하였다.

'그래도 돌아와 주었으니까 됐어.'

'진작 밝힐 것이지.'

두 사람의 목소리에 안도가 스며 있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아티팩트의 통신을 끊었다.

“이 정도면 키키가 아니라 라그나르가 여우겠는걸."

스스로 불러들인 업보면서 가녀린 척을 해서 내 동정심을 사다니.

어젯밤 서글퍼하며 위로를 구하던 라그나르의 모습을 떠올리니 약이 올라 홀로 중얼거리는데 정원의 구석진 곳에서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인기척을 느꼈는지 누군가가 고개를 들어올렸고, 이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도, 울고 있는 사람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공녀님?”

처연한 울음소리는 바로 카롤리 나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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