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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13화 (112/185)

제113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란 평가를 받는 카롤리나 글렌이 아주 서럽게 울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모습에 멍하니 카롤리나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그러다가 피부가 상하십니다.”

내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자 카롤리나는 내 손을 거칠게 쳐 내었다.

“동정하지 마!”

“동정이라니요. 걱정이랍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미련 없이 버리고는 다른 손수건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뭐, 뭐 하는!"

“두 번째 손수건마저 땅에 버리고 싶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

카롤리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손수건을 뺏어 들었고, 눈가에 잔뜩 번진 눈물을 닦아 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공녀치고 손이 거치네.'

오늘 카롤리나의 손에는 평소 늘 끼고 다니던 장갑이 없었다.

나는 몇 년 만에 그녀의 맨손을 처음 보았다.

‘마리아의 손과 비교가 되네..

손톱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으나 손이 매끄럽지는 못했다.'

‘하긴, 그럴 법도 하지..'

나는 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는 카롤리나의 비밀을 떠올리며 속으로 미소를 삼켜 내었다.

“무슨 일로 울고 계셨는지 여쭈어도 답해 주지 않으시겠죠?”

".......”

카롤리나는 나를 흘겨보더니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주먹을 꼭 쥐고서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황실에 납품하게 될 상단은 다시 그레이스 대상단이 될 거야.”

"아직 협상의 기회가 남았는데 확정이 되었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어젯밤 확정이 되었지."

카롤리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불안감에 가득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졸업을 하게 되면 황제의 후궁이 되어 입궁하기로 하였거든.”

“네?”

뜬금없는 소리에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황급히 내 입을 막고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적이 드문 정원이라 다행이었다.

나는 카롤리나를 부축하여 더욱 인적이 드문 곳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가는 거지?"

“조용히 이야기할 만한 곳이 있습니다.”

평상시에 홀로 조용히 생각할 것이 있을 때마다 오는 곳이었는데 비밀스러운 대화를 주고받기 위해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카롤리나와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고.'

누구도 가까이 두지 않는 카롤리 나였기에 나도 섣불리 다가가지 않았으나 지금의 그녀라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였다.

한참을 들어가니 연못을 앞둔 작은 대리석 정자가 보였다.

카롤리나는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아카데미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

“저도 지도를 보다 우연히 알게 된 곳이랍니다.”

"아카데미 설계도를 보기라도 했나 보지?”

카롤리나답지 않게 농담을 던졌다.

자신의 위태로운 감정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실없는 말을 던지는 듯했다.

나는 카롤리나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에게 물었다.

"갑자기 후궁이라니요?"

“하하. 네가 듣기에도 어이가 없나 보지?”

카롤리나는 붉은 입술을 짓씹으며 분이 섞인 목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상단의 협상 조건으로 나를 내 걸었다더구나. 결혼을 통해서 서로의 결속을 더욱 강하게 하자고 말이다."

귀족가에 드문 일은 아니었다.

결혼만큼 확실한 동맹은 없었으니까.

'나이가 스무 살 정도 차이가 난다지만 황제니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전제 조건이 이상했다.

“제 말은 그 뜻이 아닙니다. 여태껏 황후의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고작 비의 자리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황제 폐하는 황후의 세력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으시니 그러겠지.”

황제가 권력에 욕심이 많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전이 끝난다면 황후를 들여 외척을 통해 황권을 더욱 강화할 수도 있을 텐데 어째서?

“글렌 공작가에 그만큼의 힘을 실어 주기는 싫다는 거겠지."

“…딱 상권으로 얻을 이익만을 쥐여 주겠다는 거군요."

"아마도….”

확신이 담긴 목소리에 거친 한숨이 섞여 있었다.

카롤리나는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다른 이라면 아버지뻘 나이 차이의 황제에게 팔려가는 신세를 슬퍼하겠지.’

보통의 영애라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카롤리나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도 오라비가 살아 있으면 조용히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지막이 내뱉는 말에는 서글픈한탄이 담겨 있었다.

"내 자리만 잘 지키고 있으면 성인이 되어서는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단 말이야. 어머니께서도 그렇게 해 주리라 약조하셨는데!”

카롤리나의 눈에 방울방울 차오른 눈물이 기어코 다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화려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처연한 눈물이었다.

"어차피 나는 오라비의 대체품이나 다름없으니까. 이대로만 가면 괜찮을 줄 알았다고!”

카롤리나는 참지 못하고 엉엉 눈물을 터트렸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에 지난 세월 동안 묻어 두었던 그녀의 원통함이 담겨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카롤리나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터였다.

황제의 비라면 대단한 권력을 쥘수도 있다는 둥 어쭙잖은 위로를 건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황비가 된다면 주위의 시선과 사람들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겠군요. 어쩌면 평생."

“흑, 흐윽.”

흐느낌을 삼키면서도 카롤리나는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리 말해 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는 시선에 나는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카롤리나에게는 비극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고,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었다.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고 싶어 했던 소녀의 꿈이 결국 가족들의 욕심으로 이렇게 짓밟힌 것이다.

어쩌면 카롤리나에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으시죠?”

“…역시 알고 있었구나."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우연은 무슨.”

카롤리나는 엉망이 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그 훌륭한 물건을 만들어 낸 사람이 누구인지 정말로 궁금했었거든요.”

원작의 세계는 참으로 독특했다.

마법과 연금술이 발달해서인지 무기의 발전은 더뎠다.

고작 마법이 깃든 검이나 혹은 연금술에 의해 강화된 활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2부 중반에 새로운 무기가 등장해 마리아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은 총이었다.

마리아의 손에 잘 맞는 작은 리볼버는 연금술에 의해 강화되어 더욱 강력한 위력을 내뿜었고, 마리아를 지켜 주는 두 번째 무기가 되었었다.

그리고 그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내 앞에 있는 카롤리나 글렌이었다.

카롤리나는 아주 훌륭한 발명가였지만, 그것을 평생을 숨기고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오라비인 렉시우스에 의해서 평생 숨겨야 할 카롤리나의 꿈이 이야기에 드러나게 되었다.

렉시우스는 마리아에게 반했기에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 했고, 카롤리나를 독촉하여 그녀의 걸작을 앗아가 마리아에게 선물한 것이다.

“제가 활을 다루는 터라 좋은 무기는 본능적으로 알아본답니다.

훌륭했지요.”

“훌륭? 훌륭하기는."

카롤리나는 스스로를 가차없이 비웃었다.

“훌륭하였다면 많은 이들이 알아주었겠지. 하지만 나는 가족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였어.”

카롤리나의 목소리가 땅을 파고들어갈 듯 낮아졌다.

어지간히 자신의 발명품에 대해서 무시를 당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무시하였으면서 렉시우스는 원작에서 잘도 총을 앗아가 마리아에게 선물했구나.

“처음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여 홀로 할 수 있는 취미가 생겼다는 것에 즐거웠었지.”

카롤리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지난날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지만 내 유일한 즐거움이 되었어. 무언가가 내 손에서 탄생한다는 것이 그렇게 기쁜 일인 줄 몰랐거든.”

카롤리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지어졌다.

“하지만 당당히 즐길 수는 없었어. 글렌 공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그렇군요."

카롤리나의 목소리에는 짙은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잊어야 하는 꿈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쉽게 포기가 되지 않았어.”

카롤리나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나는 오라비의 대체품이니까 조용히 살다 보면 언젠간 내 꿈을 이룰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했었지.”

"공자님의 대체품이 아니더라도 결국 쓰임새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맞아.”

무례한 내 말에도 카롤리나는 그저 쓰게 웃을 뿐 평소와 같이 무어라 타박하지 않았다.

많은 것을 포기한 듯한 모습에 나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공녀님. 저는 참 욕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카롤리나가 고개를 들어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에 입가에 지어진 웃음을 숨기지 않고 내비쳤다.

“그래서일까요. 가만히 앉아서 납품 건을 뺏기고 싶지가 않네요.”

“하지만 이미 정해진 일이야. 아무리 베네디토가 잘났다고 한들 황제 폐하의 마음을 어떻게 돌릴 수 있겠어.”

이미 카롤리나는 자신의 운명에 체념하고 있었다.

원치 않는 운명임에도 포기하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원하는 것에 한 발짝이라도 내디뎌 보고 싶었는데.”

그렇기에 더더욱 후회가 가득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만 있지는 않기로 했다.

“제 첫째 오라비는 연금탑의 탑주랍니다."

연금탑이라는 말에 카롤리나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미처 감추지 못한 반응에 나는 입가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공녀님께서 원하신다면 연금탑의 입장 허가권을 얻어다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지금껏 가족들의 반대로 가 보지도 못하셨잖아요? 이대로 포기 하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으신가요?”

“…"

“하지만…."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카롤리나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꿈을 포기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겪어 보고 싶을 것이다.

자신이 원했던 일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만약에 자신이 이 일을 하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했을지 느껴 보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한 번 맛보고 나면 더더욱 포기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욕심이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오라버니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제가 공녀님께 도움을 드릴게요. 공녀님이 공자님의 눈을 피해 연금탑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카롤리나의 목소리가 기대감에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든이요.”

불확실한 말에도 카롤리나의 눈에 희망이 서렸다.

“하지만… 네가 왜? 내가 그렇게 너를 싫어하기도 했는데.”

나는 손을 뻗어 카롤리나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욕심이 많다고."

마지막 한줄기 희망이라도 된 듯 내 손을 붙잡는 카롤리나를 보며 나는 더욱 환히 웃었다.

“적어도 욕심이 많으면서 노력도 하지 않는 이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요.”

렉시우스를 가리키는 말에 카롤리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가족을 욕보이지 말라며 일갈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카롤리나의 얼굴에는 결연한 표정이 서렸다.

“그렇다면 네게 받은 도움을 나는 어떻게 갚으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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