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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14화 (113/185)

제114화.

카롤리나는 잔뜩 긴장해 떨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선명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희망을 본 사람의 눈빛이었기에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큰 것을 바라지 않아요. 다만 나중에 제가 도움이 필요할 때 망설이지 말고 도움을 주세요.”

"도움이라니. 네가 내 도움이 필요할 리가 없지 않나….”

카롤리나답지 않은 자신감 없는 목소리에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카롤리나는 얼굴을 붉혔고, 나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도움을 주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면 언젠가 당신의 훌륭한 작품을 제 손에 쥐여 주세요."

작지만 거친 이 손에서 피어날작품은 과연 얼마나 훌륭하고 위대할까.

워낙 곁을 주지 않는 카롤리나의 성격 탓에 그녀와 친해지는 건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로 가까워질 수 있게 돼 카롤리나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조금 기쁘기도 했다.

나중에 그녀가 훌륭한 총을 완성한다면 이번에는 내게 주어지겠지.

그것이면 귀찮음을 무릅쓰고 렉시우스를 상대하는 것이 아깝지 않았다.

카롤리나는 이어진 내 말에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이 저택을 비우는 날에 맞추어 연금탑으로 초대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어.”

이쯤이면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야겠어요."

“잠깐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듯해 이만 자리를 비켜 주려 했으나 오히려 카롤리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붙잡았다.

“그러니까 고, 고.."

카롤리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말하려고 하였다.

마음과 다르게 입은 잘 열리지 않는지 그녀의 표정이 당혹감에 물드는 것이 보였다.

"고맙다는 말은 괜찮습니다.”

"......."

“저 또한 셈을 하고서 도움을 드리는 것이니까요.”

얻을 게 있어 도와준다는 말에 카롤리나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얼굴을 살짝 붉히며 물었다.

“그렇게 내 발명품이 탐나는 거니?"

"말해 무얼 하겠어요."

글렌 공녀의 모습이 아닌 진정한 카롤리나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머금었다.

"아주 훌륭한 물건이 제 손에 들어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어느덧 아카데미는 방학을 맞이 하여 나와 플뢰르는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나는 창밖에 보이는 풍경들을 구경하며 방학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졸업하면 후계자 자리에 걸맞은 시험을 하신다고 하셨지.'

그렇다면 시기상 베네디토 상단이 황실에 물건을 계속 납품할 수 있도록 유지하는 것이 시험의 내용일 것이다.

'사실 카롤리나가 황비의 자리를 걷어차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카롤리나는 작은 희망에 눈이 멀어 가족을 버릴 사람은 아니었다.

희망을 보았다고 해도 그 이상의 해결책이 없다면 카롤리나는 스스로의 꿈을 포기할 것이다.

애초에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이었다면 진즉 공녀의 자리를 버티지 못해 벗어던지고 도망쳤을 테니까.

'황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조건이 무엇인지가 중요하겠군.'

물밑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한들 대외적으로는 협상을 거쳐야 하니 그 자리에서 새로운 조건으로 결과를 뒤집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지금껏 불가능에 가까운 삶을 살았으니 이 일 또한 어떻게든 해결해낼 것이다.

내가 생각을 얼추 정리할 때쯤 저택에 당도해 있었다.

“아가씨. 손을 잡으세요.”

"고마워.”

플뢰르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학기 중에는 기숙사도 따로 쓰고, 듣는 수업도 다르다 보니 방학에만 보이는 흔치 않은 모습이었다.

“요새 크세스는 어때? 몸은 괜찮아?”

"에이. 다 나은 지가 언제인데요.

요새는 호위 대장직에 걸맞게 열심히 굴, 아니 일하고 있죠.”

“그렇구나.”

고용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는데 저택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뭐지?'

눈에 띄게 변한 것은 없지만 평소보다 분위기가 가볍게 붕 뜬 느낌이었다.

나는 지나가던 하녀를 붙잡고 물었다.

“엄마는?"

“집무실에 계신답니다.”

“그래?”

‘엄마가 있는데도 분위기가 이리 어수선하다니.’ 묘하게 변해 버린 저택의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 답을 찾기 위해 엄마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나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어서 오거라."

엄마는 언제나처럼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겨 주었다.

집무실은 화분 하나 바뀌지 않고 평소랑 똑같았으나 새로운 사람이 들어서 있었다.

“라그나르는 벌 서는 중이에요?"

“스스로 어떤 벌이는 달갑게 받겠다고 하지 뭐니.”

별것 아니라는 듯 가벼운 말투였으나 레녹스와 리카르다가 분통을 터트렸던 재회 장면을 떠올리면 뼈가 실린 말이었다.

“그래서 저렇게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는….”

나는 끝내 말을 다 잇지 못하였다.

라그나르가 무릎을 꿇고, 손을 높이 들어 올린 채 울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큽.”

나는 터질 뻔한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안 돼. 눈을 마주치지 말자. 또 약한 척하는 거야.'

나는 속으로 주문을 외우듯 되새기며 최대한 라그나르쪽으로 시선을 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라그나르는 제대로 반성하기 전까지 계속 벌을 받을 거란다."

이 처벌을 말릴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나는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신감이 섞인 듯한 애처로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말아야 했다.

내가 도와줬다가는 괘씸죄로 벌이 더 추가될지도 모르니까.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아니다.

대단한 드래곤이니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지금 보니 몸에 잔뜩 감겨 있던 붕대도 사라졌지 않은가.

‘악어의

눈물이야. 속으면 안돼.'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엄마와 마주 보며 빙긋 웃었다.

“학기 동안 고생 많았다, 아가.

어서 들어가서 쉬렴. 내일은 황궁에 가야 하잖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에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렇네요. 내일이었죠.”

즐거움도 잠시 순식간에 현실로 끌어내려진 느낌이었다.

엄마는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모아 책상 위에 올리고 턱을 괴었다.

“예상했을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이 일을 후계자 시험으로 생각하고 있단다. 할 수 있겠니?"

"네. 걱정하지 마세요. 좋은 결과를 들고 올 테니까요.”

불안한 마음은 여전하였으나 내비칠 필요는 없었다.

단호한 대답에 엄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간신히 라그나르의 시선을 무시하고서야 집무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황궁에 입궁하는 것은 오스왈드에 오고 처음 겪는 일이었다.

“긴장되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손에 땀이 차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큼 이 순간이 굉장히 부담스러운 거겠지.

마차는 어느덧 화려한 궁 앞에 멈춰 서자 황실의 기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나는 기사가 내민 손을 잡고서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렸다.

인사를 했음에도 나를 에스코트하는 기사의 시선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 실례했습니다. 저는 브루스헤로드라고 합니다.”

브루스의 눈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놀란 기색을 띠었으나 다시 보니 그리움을 간직한 눈빛인 것 같기도 하였다.

그 시선을 눈치챘음에도 티를 내지 않고 빙긋 웃었다.

"반갑습니다, 헤로드 경. 제 이름은 다프네 베네디토라고 합니다.

편히 다프네라고 불러주세요."

“반갑습니다, 다프네 양. 제가 폐하께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브루스의 다부진 걸음을 뒤따르며 천천히 황궁을 눈에 담았다.

마차 안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마주한 궁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압도되는 것 같았다.

등을 타고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느껴질 정도로 감각이 곤두섰다.

'긴장하지 말자.'

무서운 황제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닌 처음 보는 외숙부를 만나 뵈러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을 때 도착한 곳은 1층 구석에 있는 문 앞이었다.

“이곳은 접견실이 아닌 것 같네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황제의 접견실은 2층에 있었고, 아주 화려한 문이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안내된 곳은 1층 구석에 있는 단정하고 평범한 문이었다.

내 눈빛이 매서워지자 브루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폐하께서는 이 안에 계십니다."

“사적인 시간을 보내시는 중이시라면 제가 접견실에서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텐데요."

“온종일 기다리셔도 못 만나실 수 있답니다.”

아무래도 황제가 나를 이리로 안내하라고 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약속 시각이 되었음에도 렉시우스가 보이지 않았다.

'?'

‘어째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황제를 마주할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동요를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나는 두 손을 꼭 모으고서는 바른 자세로 고개를 빳빳이 들어 올렸다.

“그렇군요. 노크를 부탁드려요."

브루스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게 문을 두드렸다.

"폐하. 베네디토 상단의 후계자가 방문하였습니다."

“들라 하라."

문 안쪽에서 중후하고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문이 열렸고, 붉은색의 망토를 걸친 위압적인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내는 거대한 액자 앞에 서서 그 안에 담긴 그림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선대 황제 부부로 보이는 노년의 부부가 붉은 소파에 앉아 미소를 짓고 있었고, 세 명의 장성한 자식들이 그 옆에 서 있는 가족의 초상화였다.

서 있는 사람 중 유일한 여성에게 가장 먼저 눈길이 향했다.

아름답고 윤기가 흐르는 보라색 머리를 어여쁘게 땋아 올린 채 볼을 말갛게 물들인 귀여운 숙녀.

첨탑에서 보았던 초췌한 모습과다르게 두 눈에는 생기가 가득했고, 사랑받은 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엄마의 젊은 시절이 담긴 초상화였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말로만 들었는데 정말로 똑 닮았구나.”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낯선 목소리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오스왈드의 황제, 내 엄마의 오라비, 그리고 나의 외숙부.

에버하르트 오스왈드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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