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15화 (114/185)

제115화.

나는 에버하르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살포시 잡고서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존귀하신 오스왈드의 태양을 뵙습니다.”

고개를 숙이자 공들여 다듬은 하얀 머리칼이 어깨를 따라 흘러내렸다.

에버하르트의 시선이 내 머리카락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말로만 들었다는 게 무슨 뜻인가 했더니.’

에버하르트의 말을 곱씹어 보니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천천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초상화 속 엄마의 어릴 적 모습이 나랑 꽤 많이 닮았네.'

분위기는 달랐어도 외모가 비슷하였기에 베네디토의 후계자가 황녀를 닮았다는 말이 어디선가 나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부른 건가. 비교하기 위해서? 혹시 내 정체에 대해 눈치챈 걸까?'

하지만 프레이르의 딸은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애초에 죽지 않았다고 한들 오스왈드에서는 보육원 시절에 나를 찾아 데려갈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가.

'아니, 엄마가 어떻게 죽어 갔는지 알기는 할까?'

일부러 공작이 정보를 차단했다.

면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제국의 황제가 몰랐다기엔 말도 안 되는 설정이지만 원작의 억지력이 발동되었다면 가능할 법도한 이야기였다.

"흐음. 그래. 고개를 들도록.”

에버하르트의 허락이 떨어져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엄마의 머리색보다 옅은 연보랏빛 긴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감히 시선을 마주칠 수 없어 눈을 다시 아래로 내리깔자 그럴 필요 없다는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긴장할 필요 없다. 소문이 흥미로워 오래간만에 떠오른 가족들을 보러왔을 뿐이고, 겸사겸사이리로 너를 부른 것이니."

“송구합니다.”

감히 그런 소문의 주체가 되었다.

는 것에 사죄하자 너그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얼, 닮은 것이 네 탓도 아니니 괜찮다. 쓸데없는 말로 흥미를 돋운 녀석들의 잘못이지.”

폭군이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퍽 너그러운 발언에 나는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정말로 많이 닮았구나.

어린 시절의 프레이르가 다시 되돌아온 줄 알았어. 참으로 사랑스러운 아이였지.”

그리움이 담긴 목소리에 나는 그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오라버니라고 부르면서 그 여린 몸으로 뛰어오는 것이 참 어여쁘고, 귀여웠단다.”

“…황녀님을 많이 아끼셨었군요."

“그럼. 내 동생이니 당연하지."

에버하르트는 눈가를 찡그리며 손을 올려 프레이르의 그림을 매만졌다.

“그리 죽을 아이가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크게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너는 클레멘스의 사람이니 프레이르에 대해 잘 알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에버하르트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등을 돌린 채 가만히 가족들의 그림을 바라보고만 있었기에 어떤 감정인지 읽을 수가 없었다.

“어찌 죽었더냐.”

간신히 입을 뗐을 때 꺼낸 말에 나는 첨탑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죄가 밝혀지고 첨탑에 유폐되셨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셨죠."

“그렇구나. 그렇게 죽었어."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에버하르트는 후회를 하는 것 같았다.

가장 필요할 때 동생을 도와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라도 갖게 된 걸까.

그 속을 읽을 수 없었기에 조용히 그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것 아나? 오스왈드 제국민들 대부분은 프레이르의 일에 대해 모른다.”

"네? 그게 무슨….”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목소리로 물으니 에버하르트가 몸을 틀어 나를 내려다보았다.

“오스왈드에서는 프레이르가 불치병에 걸려 죽은 것으로 공표했다.”

“그러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오스왈드의 황녀가 타국에서 반역자가 되다니. 황실의 권위가 모독될 만하지 않나.”

오만한 시선에 당황을 숨기지 못하자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에버하르트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갔다.

"빈민가의 사람들을 납치하여 그들의 피를 이용해 황실에 저주를 내렸다? 웃기지도 않지. 그 아이는 피를 무서워하는 아이였는데 말이야.”

“누, 누명이었다는 겁니까?”

“새로운 여인을 취하고 싶으니 고작 타국의 귀족일 뿐인 그 공작녀석이 내게도 수를 쓰려고 했던 거겠지. 같잖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보낸 서신과 프레이르의 억울함을 알리는 간자들의 서신을 불태웠지만.”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었다는 듯 온몸이 떨려 왔다.

“뒷말이 궁금한가?”

기분 나쁜 서늘함이 목 뒤를 타고 내려 나를 감쌌다.

저 말이 경고처럼 느껴졌다.

지금 입을 잘못 놀리다가는 이곳에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서 긴장감에 젖은 손을 치맛자락에 닦아 내었다.

"라몬트가 프레이르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 녀석은 당장이라도 클레멘스로 뛰쳐 들어갈 테니까.”

반란의 중심에 서 있는 라몬트오스왈드를 이야기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는 안 되지. 반란 종자가 외국으로 도망을 간다니. 황실에 위협이 되는 놈에게 기회를 줄 생각은 없는지라.”

더는 묻지 않고 덜덜 떠는 나를 보며 에버하르트는 흥미가 식은 듯 시선을 거두었다.

“어차피 프레이르도 황위 계승자 중 한 명이니 위험 분자는 제거하고 좋았지.”

냉정한 이유를 끝으로 더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이리저리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머릿속이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손톱이 손바닥을 세게 파고드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를 것 같아서였다.

에버하르트도 헤로니스 공작 부부와 다름이 없었다.

엄마가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 대해 묵인하였고, 죄책감 하나 가지지 않았다.

“제게 이러한 말을 꺼내시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겁에 질린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고 이야기를 하자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네 반응이 궁금했다. 나이를 먹으니 소문에 휘둘리게 되는군."

짐짓 농으로도 들릴 법한 말이었으나 에버하르트의 눈빛은 날카롭게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처음부터 내 정체를 의심하여 시험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소감이 궁금하구나. 프레이르가 불쌍히 여겨지느냐?"

"아닙니다."

내 단호한 대답에 대화의 흐름이 다시 바뀌었다.

“다시 떠올리니 그 아이가 참 가엾구나. 어차피 죽을 거였더라면 자비를 베풀어 암살자라도 보내 줄걸 그랬어.”

에버하르트에게 후회가 있다면 고작 저 정도였다.

편안한 죽음 정도가 그가 생각한 마지막 배려였다.

“동생과 닮은 아이에게 꺼내고 나니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이군."

에버하르트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가벼웠고, 그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답하였다.

“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 현명한 아이구나. 그러니 대상단의 후계자가 된 것이겠지."

에버하르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접견실로 가기 귀찮아졌다. 번거롭게 하지 말고 이곳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도록 하지."

에버하르트의 변덕 정도야 예상했었지만, 이 또한 너무 갑작스러웠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하루를 새삼 실감하며 답했다.

"폐하께서 베네디토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내 직설적인 말이 불쾌할 법도한데 에버하르트는 오히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오라비들이 각자 탑의 주인이라 들었다.”

"예. 부족하지만 마탑과 연금탑습니다.”

의 주인이 되어 소임을 다하고 있

“지금껏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탑이 탑주가 바뀌면서 적당히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더군."

에버하르트의 말은 사실이었다.

레녹스와 리카르다는 경쟁심을 불태우기보다 서로 협력하는 방식으로 탑을 운영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들의 지도 아래 두탑은 훨씬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마탑과 연금탑은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들이 자리 잡은 땅은 오스왈드지 않는가.”

“예.”

에버하르트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었다.

"마탑과 연금탑도 슬슬 주인을 모실 때가 되었지.”

이 말에 이번 협상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반란이 종식되어 가니 자신의 옆을 지킬 새로운 세력이 필요한 거군.'

참으로 욕심이 많은 자였다.

황좌를 안정적으로 차지하기 위하여 가여운 동생이 죽어 가는 것을 묵인하였고, 이제는 하나 남은 또 다른 동생마저 죽이려고 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마탑과 연금탑의 힘마저 차지해 자신의 권력을 더더욱 공고히 할 작정이었다.

끊임없이 권력을 갈구하는 그의 욕망은 역겹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저 혼자 결정한 사안은 아닙니다. 시간이 필요할 듯합니다.”

“곧 내전이 끝이 난다. 라몬트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이번 결전에서 죽게 될 거야.”

"내전이 끝날 때까지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에버하르트의 목소리에 불쾌감이 서리기 전에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고작 5년의 납품 기간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는 부담스럽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틀린 말은 아니지. 원하는 조건이 따로 있나?"

“적어도 폐하의 통치 기간 동안은 납품 상단을 유지해 주십사 청합니다.”

당돌한 내 답에 에버하르트는 재미있다는 듯 즐거운 목소리로 흔쾌히 허락하였다.

“좋다. 글렌 공자와는 다른 패기가 있어 재미있구나."

렉시우스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에 나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렌 공자님의 패기는 저 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있을 마지막 결전에 참전하도록 지원하겠다는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호오. 그게 정말이냐?"

"예.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말을 올리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원작에서 마리아가 내전의 상황을 듣고 걱정하는 말에 자신이 참전한다면 반란군은 끝장이라 호언장담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으니.

분명히 원작의 흐름처럼 자원하여 전쟁에 참가하게 될 것이다.

“공작이 걱정이 크겠군. 걱정하지 말라 격려의 말이라도 해 주어야겠어.”

혹 아니라고 하여도 내가 에버하르트에게 언급하였으니 글렌 공작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금방일 것이다.

“그대도 분발해야겠군. 내가 말한 조건이 아닌 이상 외국 상단을 더는 받아 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예, 알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에버하르트는 방을 나섰다.

조용한 방 안에 혼자 남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거친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나는 터질 것 같은 눈물을 간신히 참고서 고개를 들어 다정한 가족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초상화의 한쪽을 차지한 여인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저 아름다운 여인은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에 휘둘려 처참하게 부서져 내렸다.

'우습다. 고작 욕망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다는 것이 너무 우스워.'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되었다.

이곳은 내게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괜찮으십니까?”

나를 안내해 준 헤로드 경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물었다.

내 안색이 그리도 창백한 것일까.

나는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 지금은 괜찮아야 했다.

전쟁터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헤로드 경의 시선을 피해 다시금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모두를 지나쳐 내 시선이 멈춘곳에는 진보라색 머리에 연보랏빛 눈을 가진 사내가 있었다.

'라몬트 오스왈드.'

물자가 부족하여 결국 이리저리 떠돌다 마지막 결전에서 처참하게 패하여 이야기 속에서 사라질 사람.

과연 라몬트는 엄마가 누명을 써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반응을 할까.

에버하르트와 다르게 진심으로 슬퍼하고, 복수를 함께해 줄 수 있다면….

나는 흔들리는 눈빛을 다잡고서 결심했다.

라몬트를 만나 봐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