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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16화 (115/185)

제116화.

'반역에 도모한 베네디토 상단 또한 재산을 몰수하고, 가주와 그 식솔들은 참수형에 처한다. 상단의 모든 직원들은 신분을 박탈당하고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에버하르트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와 함께 끊임없는 비명과 원망었다.

이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덮피로 물든 저택과 쓰러져 있는 사람들, 비참하게 죽어 버린 내 가족들, 엉망이 된 상단.

다시는 눈을 뜨지 않는 라그나르.

그리고 그곳에 홀로 서서 그들을 바라보는 나.

내 잘못으로 죽어 가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차마 사과조차 꺼내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끔찍해 비명만 질렀다.

눈을 깜빡 감았다 뜨니 어느새 내 주위를 불길이 감싸고 있었다.

마치 둘로 나위어진 것처럼 나는 어느 곳에선가 내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주모자로 몰려 꽁꽁 묶인 채 화형대에 묶인 내가 고개를 들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게 왜 죽지 않았어?'

“헉!"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벌떡 일어났다.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면서 이곳이 내 방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 에버하르트와 라몬트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입맛이 없어 저녁을 거르고 잠깐 쉰다는 것이 나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악몽.….'

벌벌 떨리는 몸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

갈라지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목을 매만지며 허둥지둥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들어와!”

누구라도 살아 있는 사람을 봐야 두려움에 가득 찬 마음이 조금은 진정될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잠에 취했던 몸은 내 마음대로 따라와 주지 않았고, 나는 휘청거리며 걷다가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푹신하게 깔린 러그 덕에 다치지는 않았으나 넘어지면서 부딪히는 바람에 테이블 위의 화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병은 처참하게 깨져 버렸고, 힘없이 바닥에 늘어진 꽃과 쏟아진 물을 바라보며 나는 손을 뻗었다.

"아.”

깨진 꽃병의 날카로운 조각에 베여 손에서 피가 흘렀다.

“......."

그 모습이 저택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던 악몽과 겹쳐 보여 덜컥두려움이 들었다.

“흐으..."

악몽 속 끔찍한 광경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 감정이 주체되지 않았다.

눈물이 터져 나올만큼 무서웠다.

“다프네? 들어갈게.”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고,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 라그나르? 엄마랑 있는 것 아니었어?”

“이제 괜찮다고 하셔서 바로 너 보러 왔지.”

“…용서받았구나?"

“팔이 너무 아프지만 그래도 이 정도야 내가 속 썩인 것에 비하면-"

라그나르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멈추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 내 손에 박힌 라그나르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다쳤어?"

"아. 화병이 깨져서 치우려다가…."

그 말에 화병을 쳐다보는 라그나 르의 시선이 더더욱 매서워졌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가볍게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깨진 화병이 물방울 하나 남기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습게도 조금 전의 두려움은 라그나르의 얼굴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진짜 꿈이었구나.”

“악몽이라도 꿨어?”

"..."

너무 끔찍해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처참한 꿈이었다.

라그나르의 손에서 빛이 흘러나왔고, 상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그냥….”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대충 얼버무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응. 내가?”

"아주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데 내가 잘못할까 봐 무서워.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면 어떻게 하지?”

내 뒤에는 베네디토 상단이 있고, 우리 가족이 있으며, 많은 직원들이 함께하고 있다.

내 결정에 그들의 생사 또한 좌우되니 부담감이 너무 컸다.

'내가 지켜야 할 것들.'

아무것도 없었던 내게 지켜야 할 사람들이 생겨 기뻤다.

하지만 그만큼 커진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 그대로 저 아래로 가라앉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원작의 강제성이 결국 라몬트가 아닌 에버하르트에게 승리를 가져다?

다준다면 어떻게 하지?

모든 일이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짓눌러 이러한 악몽을 만들어낸 듯했다.

"잘못이라….”

라그나르는 조용히 내 말을 따라 중얼거리고는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내 손을 붙잡은 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들바들 떨리던 손이 어느새 잠잠해졌다.

꼭 붙잡고 있는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서늘한 이 손이 내게는 가장 든든했다.

"다프네. 너도 알겠지만 나도 얼마 전에 큰 잘못을 한 적이 있어.”

"네가?"

"네가 보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 이랑 함께 나타났잖아.”

“…마리아 말하는 거야?"

반갑지 않은 이름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 반응에 라그나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내 이마의 주름을 꾹꾹 펴 주었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지만 너에게는 아니었을 테니까. 너를 어서 보고 싶은 나머지 미처 네 마음을 살피지 못한 게 내 잘못이지.”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며 갑자기 꺼낸 사과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 정도야 이해해."

"아니. 너는 내가 그 여자와 함께 왔다고 기분이 나빴다고 화를 내는 게 맞아.”

“내가 어떻게 너한테 화를 내."

돌아와 준 것이 기적인데 어떻게 그러겠는가.

라그나르는 작게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왜 내게는 이렇게 너그러운데 스스로에게는 그러지 못해?"

라그나르의 목소리는 어쩐지 서글픈 것처럼 들렸다.

아니,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표정 또한 슬픔에 잠겨 있었다.

내가 어떤 말도 꺼내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라그나르는 말을 이어 갔다.

“그날 나를 혼자 두고 가서 화를 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잖아.”

“그거야 당연히….”

달갑지 않은 대화 주제에 목소리가 더더욱 작아졌다.

라그나르는 원망이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한없이 다정하게만 보고 있었다.

“다프네. 내가 너를 해치려고 했기 때문에 그날의 일이 시작된 거였어. 그게 어떻게 너만의 잘못이라고 생각해?”

“결국 난 괜찮았으니까.”

"나도 괜찮아!”

자신 없는 내 목소리에 라그나르가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난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하지만….”

“그건 오로지 내 선택이었어. 만일 그때 계속 함께 있었다가 네가 진짜로 다쳤다면 나는 영원히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 거야.”

그 말에 심장이 철렁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살고 싶어 너를 버리고 도망쳤는데 너는 어떻게 이리도 쉽게 괜찮다는 말을 꺼내는 걸까.

죄인이 된 것처럼 감히 저 찬란히 빛나는 눈을 계속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라그나르가 짐짓 투정을 부리듯 툭 내뱉었다.

“그리고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는 것 아냐?"

“…어?”

“어떻게 늘 옳은 선택만 할 수 있겠어? 실수하면서 배우고, 성장하는 게 사람인데.”

“그건 그렇지만..….”

라그나르의 말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네가 그날의 너를 용서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너를 용서할게.”

나의 빛이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 시간 동안 보지 못했음에도 라그나르는 여전히 찬란한 나의 빛이었다.

“그러니까 아직 하지도 않은 잘못을 걱정하느라 해야 할 일을 망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이 일에 걸려 있는 위험이 너무 커. 난 다시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은걸."

“그럼 지킬 각오로 하면 되는 거잖아.”

어쩜 이렇게 옳은 말만 하는 걸까.

“성공 확률이 기적에 가까운데 내가 해도 괜찮은 걸까?”

“넌 언제나 내게 기적이었어. 기적이 기적을 일으키는 건 당연하잖아.

어이가 없어서 터져 나온 웃음에 라그나르도 나를 따라 웃었다.

“넌 언제나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하는 것 같아.”

강해져야 하는데, 라그나르에게는 약한 모습만 보여 주는 것 같네.”

누구에게도 약점을 보여서는 안되기에 언제나 단단하게 유지해 오던 마음이 라그나르 앞에서는 이렇게 쉽게 녹아내리고 만다.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된 후 나는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라그나르는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서 조용히 나를 품에 안아 주었다.

서늘한 체온과 달달한 향기에 떨리는 몸이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이렇게 슬픔을 토해 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다시금 벅차오르는 감정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소리 내지는 않았다.

“정말 세상은 잔혹한 것 같아.

예정된 대로 내가 죽었다면 이러한 사실조차 알지 못했겠지?”

씁쓸한 목소리에 다시금 위로의 말이 얹어졌다.

“네가 살고자 했기에 모든 진실을 알 수 있게 된 거야."

“그래서 한편으로는 두려워. 내가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도 정해진 결말대로 흘러가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내가 말했잖아. 네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끝이 났다고.”

라그나르의 단호한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큰 깨달음이 들었다.

‘어쩌면 원작에 가장 얽매여 있던 건 나였던 게 아닐까?'

죽음이라는 두려움에 쫓겨 스스로를 원작 속에 가두어서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닌지,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면 널 괴롭게 하는 사람들을 내가 모두 죽여 줄까?"

“…어?"

“암살도 가능하고."

라그나르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해져 나도 모르게 고개를 휙휙 저었다.

“농담이야.”

“농담 아닌 것 같았는데.”

놀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그나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난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으니까 필요할 때 말해.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내가 뭐라고….”

자신감 없는 목소리에 라그나르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내 소중한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지 마.”

장난처럼 들릴 법한 말이 너무 진지해서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라그나르가 오기 전까지는 외줄에 매달린 듯 위태로웠는데.

나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사실 네가 마리아와 나타났을 때 진짜 기분이 나빴다? 갑자기 사라져 놓고 마리아랑 함께 있는 걸로도 모자라 정체까지 숨기고 있었다니.' 일부러 과장을 섞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서운해."

"으음…. 미안해. 나도 마음이 급해서….”

라그나르의 표정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차마 변명하지도 못하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문 것에 그의 머리를 헤집으며 까르르 웃었다.

“나도 사과받았으니까 용서할게.

우리 서로 용서해 주는 거야."

그 한마디에 라그나르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빛을 내뿜듯 환하게 짓는 웃음에나 또한 전염되듯 웃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모두가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

로브를 단단히 뒤집어쓴 채 발소리를 죽여 몰래 빠져나와 후문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인영들이 보였다.

플뢰르와 크세스가 긴장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과 눈인사를 한 뒤 평소 타고 다니는 것보다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마차를 눈에 담고서 긴장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대로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빠르게 수도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뒤에서 들린 목소리만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지.”

이른 시간에도 졸음 하나 섞이지 않은 또렷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등장하자 내 등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천천히 돌리자 팔짱을 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라그나르가 보였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도와주겠다고 했었는데.”

서운한 목소리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으나 라그나르의 표정은 펴지지가 않았다.

한참을 서운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던 라그나르의 입에서 토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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