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저 둘은 데려가는데 나는 왜 안데려가?”
라그나르가 보란 듯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아니, 왜 깨어 있는 거야.”
내 당황 섞인 목소리에도 라그나르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 밤잠이 없나 보지."
저건 농담인 걸까, 진담인 걸까.
세 사람 중 라그나르가 드래곤인걸 알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기에 어색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사이 라그나르가 분하다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내 뒤에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시선에 두 사람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져 둘사이를 막고 일부러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걱정되니까. 우리가 갈곳은 정말 위험한 곳이라서 그렇지.”
“그 위험한 곳에 너는 가면서?"
“아니, 나야….”
장본인이니 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괜히 나를 따라갔다가 혹시라도 라그나르가 다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널 위험한 곳에 데려가?”
그래서 꺼낸 말인데 그런 생각은 나만 했던 모양이었다.
"아가씨… 지금 누굴 걱정하고 계세요?"
플뢰르의 목소리에 크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을 혼자 처리하고 오는 놈을 걱정하시는 건 아니죠?"
두 사람이 자기편을 들어준다고 생각했는지 라그나르의 눈에서 힘이 풀렸다.
“흠흠.”
나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눈짓으로 저택을 가리켰으나 라그나르는 요지부동이었다.
“고집쟁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네 옆인데 날 두고 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라그나르가 빠르게 꺼내는 말에 뒤에서 플뢰르가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앞에서 이런 대화를 하니 조금 민망하지만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좋아. 대신 나와 약속하나 해.”
"어떤 약속?”
"나 대신 다치지 않겠다고."
"......."
“안 해?”
내 목소리가 까칠해지자 라그나 르 또한 지지 않고 말했다.
“그럼 너도 해. 나 대신 다치지 않겠다고.”
그 말에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좋아, 약속한 거야.”
라그나르의 표정은 마치 이게 아니라는 듯 이상하게 변했지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 * *
라몬트가 잠적한 곳의 지명은 원작에서 스치듯 언급됐을 뿐이라 기억해 내기 위해 반나절을 오스왈드 지도에 매달렸었다.
다행히도 지도에서 익숙한 지명을 간신히 찾아낼 수 있었다.
라몬트가 속한 반란군의 잔당이 남아 있는 곳은 스테이시아 산맥의 아주 작은 마을.
마지막 결전은 스테이시아 산맥근처의 평지에서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장소를 찾자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굉장히 폐쇄적이고 가난한 마을이라 들었기에 우선 창고에서 빼내 올 수 있는 만큼 무기도 빼내왔고, 건조식품을 비롯한 식량도 조금 챙겼다.
혹시 모를 미행을 대비해 대외적.
으로는 오빠를 만나러 연금탑에 방문하는 것으로 밝혀 두었다.
이것이 지난 일주일 동안 엄마도 모르게 은밀하게 진행한 일이었다.
계획대로였다면 이 마차에 탄 플뢰르와 크세스와 달리 나는 중간에 미리 준비된 마차로 바꿔 타스테이시아 산맥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혹시 모를 감시에 대해 눈속임을 하기 위해 플뢰르가 연금탑으로 향해 시간을 끌 동안 나는 라몬트를 만나려고 했었는데….
플뢰르를 나로 위장하여 연금탑에 보낸 것까지는 좋았다.
라그나르와 함께 따로 준비된 마차에 올라타 목적지인 마을에 도착한 것도 좋았다.
나는 당당하게 내 신분을 밝히고 라몬트와 만나려고 했는데 라그나르는 나와 생각이 다른 듯했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맡기라는 말에 용병 시절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길을 잃었다고?"
경계심으로 가득한 마을 사람들을 대신하여 나이는 들어 보였지만 건장한 사내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우리에게 물었다.
“외부인이 이런 시골 동네까지 오기는 힘들 텐데."
사내의 목소리에 라그나르가 뻔뻔하게 웃어 보였다.
“북부에 연금탑이 있다고 해서 가는 길이었습니다.”
“연금탑? 두 사람만? 단둘이서만 여행하기에는 어려 보이는데."
“사실은 여기에는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는지라.….”
“사정이라니?”
모두의 의아한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나는 라그나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조차 가지 않았기에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내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라그나르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집안에서 저희의 관계를 인정해 주지 않아 사랑의 도피를 떠나는 중이었습니다.”
"......?"
내가 놀란 표정으로 라그나르를 바라보아도 그의 입은 쉬지 않고 거짓말을 내뱉었다.
“제 연인이 다른 집안의 사람과 약혼한다는 소리에 참지 못하고 함께 도망친 것까지는 좋았으나갈 곳이 없어서….”
라그나르가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연금탑에 아카데미 선배가 있던 것이 떠올라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무작정 향하다 보니 이렇게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미 라그나르의 머릿속에는 사랑의 도피를 떠나는 불쌍하고 가련한 연인의 모습이 다 그려진 듯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은밀히 도피를 떠나기에는 마차가 너무 화려하고 컸는데.”
늙은 사내가 의문을 품었지만 마차에 싣고 있던 짐들은 이미 라그나르의 마법에 의해 숨겨져 텅 비어 있었다.
더군다나 마을 사람들이 믿는 눈치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라그나 르의 의견에 힘을 보태었다.
“저희 집안에서 운송업을 하다 보니 커다란 마차밖에 없더라고요."
나는 자연스럽게 라그나르의 팔짱을 끼고서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우리는 이곳에서도 반겨지는 존재는 아닌 것 같아. 곧 해가 저물 텐데 근처에 또 다른 마을이 있을까?”
내가 가련하게 떠는 듯 말하자 라그나르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감싸 안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다프네가 그간의 여정으로 몸이 약해진 터라…. 부디 제 연인을 위한 방하나라도 내어 주실 수 없을까요?"
"아니야. 마차 안에서 밤을 지새우더라도 난 너와 함께 있고 싶어.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흐음.”
가련한 연인의 모습에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마을 사람들을 대표하던 나이 든 사내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게 빛나고 있었다.
"아가씨 이름이 다프네라고?”
“네.”
"내 이름은 슈테판이라고 하네.
그… 아니, 아닐세."
슈테판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돌렸고, 그 찰나 눈가가 작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프레이르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인가 보군.'
“혹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맑은 목소리로 물으니 슈테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내가 아는 사람과 조금 닮은 것 같아서. 하지만 착각이겠지. 그래, 하룻밤 정도는 머무르다 가도 괜찮을 걸세.”
“슈테판 씨.”
뒤쪽에 서 있던 젊은 사내가 슈테판을 막는 듯했지만 그는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 않나.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이….”
여운이 가득한 목소리에 사내는 분한 표정을 짓다가 우리를 보고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나와 라그나르는 서로의 손을 잡고서 환하게 웃었다.
* * *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경계에 가득 차 보였으나 그들은 할 수 있는 대접을 아끼지 않는 듯했다.
소박하지만 정성을 쏟은 듯한 식사에, 준비된 침구 또한 은은하게 나는 햇볕 냄새에 신경을 써 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낯선 이방인이기에 여전히 경계가 풀리지는 않았지만 하룻밤 머무르고 가는 손님들에게 그들이 베풀어 주는 최대한의 예의일 것이다.
저녁 무렵 그래도 마을에 오랜만에 방문한 손님이라며 조촐하게 환영하는 자리가 있었다.
나는 라그나르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경계 어린 표정으로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초상화 속 사랑스러운 소녀를 떠올리며 최대한 비슷하게 웃기 위해 노력했다.
마을 사람들 중 몇몇이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져 더욱 환히 웃었다.
‘기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마을에 제법 섞여 있는 게 보였지. 그러니 라몬트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순식간일 거야.'
“누군가가 이 근처를 맴도는 것 같은데.”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주변을 탐색하던 라그나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라그나르는 우리가 있는 건물 뒤편의 숲으로 향하는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 봤던 사람들은 아니야.”
“아무래도 내 이야기가 생각보다 더 빨리 흘러 들어갔나 봐.”
나는 로브를 다시 걸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부러 길을 잃은 척 라몬트와 대화를 해 볼게. 너는 마차를 가져다줄래?”
“혼자서 위험한 일을 할 생각은 아니지?"
“대화만 할 거야. 걱정 마. 위험하다 싶으면 아티펙트로 연락할게.”
담담히 꺼내는 말에 라그나르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가장 효율적이니 어쩔 수 없이 따르는 듯했다.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간이었기에 우리는 조용히 빠져나왔고, 라그나르는 마차로 나는 뒤에 있는 숲을 향해 걸어 나갔다.
처음에는 입가에 미소를 잔뜩 지으며 즐겁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갈수록 주변은 어두워졌고, 나는 자연스럽게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어떻게 하면 좋아…. 누, 누구없어요?”
일부러 겁을 먹었다는 듯 애처롭게 꺼낸 목소리에 다행히도 빠른 답변이 들려왔다.
“누구냐.”
낮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화들짝 놀란 미어캣처럼 고개를 꼿꼿하게 든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조금 더 깊은 숲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거칠게 풀어 헤쳐진 진보라색 머리가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것이 보였다.
초상화에서 보았던 것보다는 나이를 먹었지만 한눈에 보아도 그가 라몬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악셀리우스만큼 큰 키를 가진 사내는 험한 생활을 했다는 듯 황족치고 추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숨겨질 수 없는 위용이 느껴져 몸이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나는 깜짝 놀란 척 몸을 떨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 누구세요?"
"나야말로 묻고 싶군. 너는 누구지?”
“아, 저는 잠시 이 마을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한 사람인데. 잠시 산책을 한다는 게 길을 잃어버려 서요.”
최대한 불쌍한 목소리를 내어 말해서일까.
라몬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가락으로 왼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리로 나가면 길이 나올 테니 쭉 나가게.”
"정말요? 감사합니다!"
해맑게 미소를 짓자 라몬트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천천히 흔들리는 시선을 마주 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분명 여기 마을 사람들은 절 처음 보는 걸 텐데 왜 다들 그렇게 저를 바라보는 걸까요?"
내 물음에 라몬트는 말을 하지 못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초면에 실례인 것은 알긴 하다만… 혹시 그대 모친의 이름을 알수 있을까?”
"? ?"
“어머니의 이름이요? 왜요?"
존칭을 생략한 채 당돌하게 되물었음에도 라몬트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듯 횡설수설 답했다.
“혹시 내가 아는…. 아니지, 말도 안 되지.”
혼자 중얼거리더니 미안하다고 자리를 뜨려는 듯 몸을 돌려 벗어나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빠르게 멀어지는 그를 불러 세웠다.
“마을의 몇몇이 나를 그런 눈빛으로 봐요. 나를 투영해 다른 누군가를 보는 것 같이 말이에요.”
“......"
“다들 슬픈 표정이네요.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이어지는 내 말에 라몬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를 보며 프레이르를 떠올렸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입에서 나온 이름에 라몬트가 획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뒤를 돌아보았다.
경악한 듯 크게 떠진 눈을 바라보며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죠.”
“무슨”
라몬트의 말은 차마 이어질 수 없었다.
“난 프레이르의 친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