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라몬트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다시 말해 줄까요?"
애써 담담한 척 말을 하고 있었으나 심장은 터질 것처럼 거칠게 뛰고 있었다.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는 내 심정을 라몬트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겠지.
친엄마의 이름을 오랜만에 입에 담으려니 한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무너질 뻔한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무덤덤한 눈빛으로 라몬트의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라몬트는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대화를 이어 갈 수밖에 없겠네.’
폭풍이 몰아치는 듯 요동치고 있는 라몬트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읊조리듯 말하였다.
"남편도, 오라비도, 세상도 버려 불쌍하게 악녀로 낙인 찍혀 죽은 프레이르의 딸, 그게 바로 나예요.”
아주 귀한 비밀을 알려 준다는 듯 또박또박 내뱉은 내 말에 라몬트가 표정을 험악하게 굳히며 물었다.
"악녀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아니다. 도대체 누가 널 보낸 거지? 형님인가? 여기는 어떻게 알고 보낸 거지?”
멍한 정신을 다잡으며 최대한 이 성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오히려 안쓰러워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침착히 말했다.
“누가 날 보낸 게 아니라 스스로 왔죠. 내 또 다른 외숙부를 만나보기 위해서.”
"......."
라몬트의 연보랏빛 눈동자에 의심이 가득 차올랐다.
라몬트가 허리에 찬 검으로 손을 가져갔으나 나는 피하지 않은 채 그저 시선으로만 좇았다.
나 역시 방어할 수단은 갖고 있었으나 정말로 오늘의 목적은 대화였기에 그가 몰랐던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거 알고 있어요? 프레이르, 그러니까 내 친엄마는 병으로 죽지 않았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밝혔건만 어딜 감히 삿된 말로 나를 혼란시키려고 하는 거지?”
그래. 못 믿을 만도 했다.
만약 내가 라몬트였어도 갑자기 나타나 죽은 여동생을 언급한다면 경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내 말은 이렇게 의심하면서 적으로 돌아선 에버하르트의 말은 왜 그리 쉽게 믿은 것일까.
“적의 말을 그렇게 쉽게 믿으시다니. 순진하시네요."
라몬트는 더는 들을 생각이 없다며 검을 뽑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를 박차고 벗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이대로 그를 쉽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
의심이 많고 경계를 하는 것은 좋았으나 그 상대가 내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
만약 내 머리색이 보라색이었다.
면 쉽게 믿었을지도 몰랐을 거라 생각하니 입안이 썼다.
"내 친엄마는 누명을 쓰고 죽었어요."
“…누명이라니?”
“빈민가의 주민을 잡아다 고문하고, 그 피로 클레멘스의 황실을 저주한 반역죄로 몰렸죠."
마치 하나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말을 잇는 내 목소리에 라몬트가 버럭 화를 냈다.
“허튼소리! 프레이르는 피를 보는 것도 무서워하는 아이인데 어디서 감히 그런 거짓을 입에 담는 거지?”
격분한 목소리에 내 입가에 비소가 떠올랐다.
“그러니 누명이라는 거죠. 하지도 않은 일을 뒤집어쓰고 벌을 받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어요.”
고저 없는 내 목소리에 라몬트는 믿기지 않는 듯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거짓말하지 마라. 어떤 말로 나를 현혹하려는지 모르겠으나 프레이르는 병으로….”
동생의 비극적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현실을 부정하는 모습은 슬프다 못해 차라리 간절하기까지 했다.
“반역죄로 첨탑에 갇혔고, 그곳에서 나를 낳았어요."
“......!"
“어렸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떠올라요. 회색빛에 감싸인 탑, 매정한 시선, 모두에게 버려진 내 친엄마. 그리고….”
라몬트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나를 올려다보는 라몬트의 눈에 핏발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필사적으로 울분을 참는 모습은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고자 했던 나조차 덜컥 심장이 내려앉아 함께 눈물을 흘릴 뻔했을 정도로 처참해 보였다.
"그리고 악녀의 죽음을 축하하는 많은 사람들도 기억이 나네요."
“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가 바닥을 내려치면서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는 것을 보며 나는 코가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친엄마의 죽음을 슬퍼해 주는 사람을 처음 봐서인 걸까. 기쁘면서도 슬프네.’
프레이르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 안심하면서도, 그녀가 그리 쉽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서글펐다.
어느새 내 목소리조차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감정의 폭풍이 몰아쳐도 전해야 할 말은 완벽히 끝내야 했다.
“그래서 오히려 놀랐어요. 내가 알고 있는 친엄마의 모습과 초상화 속의 모습이 너무나도 달라서 말이죠.”
“초상화…?”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왈드 황실에 있는 초상화요. 다정한 가족들의 모습이 담겨 있어서 외척이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실감했지 뭐예요."
"너는… 어떻게…. 아니, 어디서 온 거지…? 아니야. 프레이르는 왜 그렇게 죽은 거지? 공작도 있고, 형님도 있지 않나?"
라몬트는 무엇부터 확인해야 할지 모르겠는 듯 생각나는 단어들을 산발적으로 내뱉었다.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 줘야 하는 걸까요.”
나는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막연히 웃었다.
“헤로니스 공작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어요.”
"뭐?"
라몬트의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붉어진 눈가가 안쓰럽다가도 매섭게 눈을 빛내는 모습에 오한이들 정도였다.
사납게 피어오른 살기는 칼을 뽑지 않아도 누군가를 벨 수 있을 것 같이 날카로웠다.
그만큼 라몬트는 분노하고 있었다.
“헤로니스 공작은 새로운 여자를 자신의 부인으로 맞이하고 싶었고, 아마 내가 모르는 수단을 통해 내 친엄마에게 누명을 쓰웠을 거예요.”
“그런….”
충격받은 표정에 나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며 말을 더 이어 갔다.
“그뿐일까요? 유일한 외척인 오스왈드의 현 황제는 그런 어머니를 외면하셨죠.”
“형님께서 어째서…? 어째서! 형님께서는 프레이르를 많이 아끼고 사랑하셨다!”
프레이르의 죽음에 에버하르트는 암살자를 운운하였는데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달랐다.
라몬트는 진심으로 프레이르의 죽음을 괴로워하고 있었다.
내 말을 믿고 싶지 않았고, 믿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외면한다 해도 진실은 변치 않으니 그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그시 이어지는 내 차가운 눈빛에 라몬트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왜 황제가 여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덮었을까요?"
“......."
"당신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을 거예요.”
라몬트의 고개가 아래로 천천히 떨구어졌다.
“권력…. 강한 황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구나. 내전 중이라 정세가 혼란하고 프레이르 역시 황위계승자이니 더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아서….”
“그렇더군요.”
“아아.”
라몬트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롭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형님!”
땅을 내려치며 눈물을 쏟아 내는 라몬트의 모습은 나를 제거할 수도 있다며 싸늘한 눈빛으로 경고한 에버하르트와 참으로 달랐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왜 반역을 저지르셨어요?"
내 질문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거칠게 흐느끼는 소리에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라몬트는 스스로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고, 비참한 그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알아요? 내 친엄마의 죽음을 이렇게 슬퍼한 사람은 나 말고 당신이 처음이에요."
나는 차오르는 비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가를 비틀었다.
"내 이름은 다프네예요. 아무도 지어 주지 않아서 스스로 지은 이름이죠.”
“… 다프네.”
라몬트는 몇 번이나 내 이름을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올려 다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모든 사람들이 악녀라고 몰아가도, 그렇게 세상에 잊혀진다 하여도 나만큼은 그녀의 마지막을 온전히 기억해 주려고 했어요."
“다프네 너는….”
라몬트의 떨리는 목소리는 이어질 수 없었다.
내 뺨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 내렸기 때문이다.
지금껏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던 내가 갑자기 눈물을 보이자 라몬트의 눈빛에 놀라움이 번졌다.
“하지만 그게 누명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잘못한 것이 없는데 괴로워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고통과 후회가 가득한 눈빛을 보는 것은 이제 되었다.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라몬트의 일이지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다.
“황제는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어요.”
“…예상하고 있었었다. 반란군은 지지하는 세력도 없고, 물자 또한 떨어졌으니 방해되는 세력은 확실하게 쳐내려는 것이겠지."
“잘 알고 계셨군요.”
“형님의 폭정을 막으려 시작한 일이 제국을 그리고 내 가족을 이렇게 망칠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거야.”
지독한 후회가 담긴 목소리에는 스스로를 향한 비난이 담겨 있었다.
“어차피 실패할 일에 왜 도전을 하여서…! 나는 고작 이 정도였을 뿐인데….”
그러나 자책은 모든 일이 끝난 후 해도 늦지 않았다.
“벌써 무너져 내리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아요?”
"네가 왜 이곳에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니. 안다. 복수하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나는 네 어미의 그리고 내 동생의 죽음을 복수하기에는 이미 늦었어.”
라몬트의 비통한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게 물들어 있던 하늘에 먹구름이 걷히면서 숨어 있던 달이 나타났다.
마치 우리를 격려하는 것처럼 고요한 숲에 달빛이 환하게 쏟아졌다.
비록 뜨거운 태양은 아니었지만세상을 비추기에는 충분한 빛이었다.
"나를 키워 준 엄마가 그랬어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 어떻게 복수냐고요.”
"......"
“복수가 아니에요. 받아야 할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지. 그리고 난 반드시 그 값을 받아 내고 말거고요.”
나는 라몬트의 앞으로 다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젖은 눈으로 내 손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라몬트를 향해 나는 냉담하게 말했다.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요? 단순히 진실을 전하려고 왔겠어요?"
“…네가 무얼 원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어차피 지고 있는 태양이고 내게 남아 있는 것은 패자의 죽음뿐이다.”
“그렇다면 이 제국에 새롭게 떠오르는 달이 되도록 하세요.”
내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키자 라몬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시선을 하늘 위에 고정했다.
“태양이 뜨거워 제국을 불태울 것 같으니 달이 되어 그 열기를 감싸 주세요. 그게 당신이 해야 할 일이에요.”
“하지만 나는…."
몇 번이고 이어진 패배와 떨어지는 물자, 점차 줄어드는 세력에 떨어지는 반란군의 사기.
그 모든 것이 라몬트를 한없이 부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내었다.
"다시 한번 내 소개를 하죠. 내 이름은 다프네 베네디토. 현재 오스왈드 황실에 납품하는 상단이자 외국 상단으로서 처음으로 대상단에 오른 베네디토의 후계자입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불안한 마음을 없애고, 나는 프레이르의 딸이 아니라 베네디토로서 말했다.
"황제가 되고 싶다고 말해요. 모든 것을 바로잡고 싶다고 말해요."
"......."
나는 라몬트가 붙잡지 않은 손을 다시 그에게 내밀며 그 어떤 때보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내 기꺼이 당신을 도울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