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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19화 (118/185)

제119화.

라몬트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달빛으로 환히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감히...”

라몬트의 목이 잠겨 낮게 끓는 목소리가 나왔다.

숨겨져 있던 진실에 분노가 끓는 것일까, 아니면 새로 생긴 기회에 희망이 끓고 있는 것일까.

“감히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렇다면 내가 해내겠다."

“모든 것을 바로 돌릴 기회가 내게 생긴다면! 마지막으로 내 모든 것을 걸고서 해내고야 말겠다!”

라몬트의 눈에 서려 있던 후회와 고통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스러졌다.

그의 눈에 새롭게 차오른 것은 결연한 의지였다.

모든 것을 불태워 잘못된 것을 바로잡겠다는 그의 각오에 내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런 각오라면 시도할 가치가 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나와도 돼.”

“기다리느라 혼났네.”

내 말과 함께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라몬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라몬트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마차를 끌고 오는 라그나르를 발견했다.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 데…?”

당황한 듯한 모습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물자는 내가 챙겨올 수 있을 만큼 챙겼어요. 무기와 식량을 우선으로 챙겨왔는데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준비할 테니 말해 줘요."

라그나르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빛이 마차를 감쌌다.

라몬트는 멍하니 마차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겨난 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마차라고 들었는데….”

“반란군이면 마법사 한 둘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없더라고요.

덕분에 걸리지 않았죠.”

담담히 꺼내는 말에 라몬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이 얼핏 보였다.

떠나보낸 동료라도 생각하는 것인지 수심에 잠기려는 얼굴에 일부러 박수를 치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우선 행색부터 바꾸는 게 좋겠어요. 제국의 황제가 될 자라고 말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니까요.”

적어도 군주란 모두의 앞에서 당당하고, 용맹스러우며, 모든 것을 바쳐 섬기고 싶어질 만큼 찬란히 빛이 나야 한다.

"아. 그래. 그렇지. 그러도록 하마."

라몬트는 부끄러운 듯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왜 나를 도우려는 거지? 프레이르의 복수… 아니, 다른 이들의 죗값을 받아내기 위해서인가?"

에버하르트가 내민 조건은 받아 들일 수 없기에 라몬트의 손을 들어 주기로 결심하긴 했다.

그렇기에 지금의 결정은 내 인생에서 최고의 도박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당신이 폭군으로부터 소중한 제국을 지키기 위해 반역을 일으킨 것처럼 나 또한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하니까요.”

에버하르트는 권력에만 눈이 멀어 제국을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반란군은 내전을 지속하면서도 오히려 백성들을 보호해 준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니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장소를 이동하면서 무사히 몸을 숨길 수 있었던 것이겠지.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듯해 또 다른 이유를 덧붙였다.

"나는 자원봉사자가 아니에요.

나 또한 바라는 것이 있기에 당신을 도와주는 거죠.”

“바라는 것… 그래. 그게 무엇이든 내 이름을 걸고 들어주겠다고 약조하마.”

라몬트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하였다.

“무엇이든이라는 말은 함부로 쓰지 마세요. 내가 황제의 자리를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아.”

다 큰 사내가 당황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니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 귀찮은 자리 앉으라고 해도 거절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귀찮은 자리라니. 형님이 들으면 헛웃음을 치겠군.”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가볍게 흘리고는 주머니 속에서 아티팩트 하나를 꺼내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우리의 거래를 녹음하고자 해요. 피를 나누었다고 한들 처음 보는 사이니 이 정도 안전장치는 해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좋다.”

흔쾌히 떨어지는 동의에 나는 둥그런 아티팩트의 중앙 부분을 눌렀다.

녹음 기능이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고서 천천히 내 조건을 꺼내었다.

내 .

“내가 당신을 황제로 만들어 준다면 내 친엄마, 프레이르의 유골을 황실의 납골당에 안치하게 해주세요.”

".......”

처음부터 그런 조건을 내밀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라몬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 당연하지.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어야 했는데….”

차마 거기까지 신경 쓰지 못했다.

는 것을 깨닫고 자책하려는 것이 보여 황급히 두 번째 조건을 제시했다.

“그리고 당신의 제위 기간 동안 베네디토 상단을 유일한 황실 납품 상단으로 지정해 주세요."

“그것도 좋다. 반발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가능하게 하마."

“또한, 마탑과 연금탑의 독립을 인정해 줘야 해요. 탑이 지어질 때 맺은 오래된 협약과 편법을 이용해서 그들의 충성을 받고자 하지 마세요.”

“베네디토의 자식들이 탑의 주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형님이 그들에게 충성을 받고자 했나 보구나.”

말하지 않아도 이면의 상황을 깨닫고 반응하기에 설명을 덧붙일필요가 없어 편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몬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알겠노라 답했다.

이제 마지막 조건이 남았다.

나는 앞에 있는 사내와 달리 잔인했던 성정의 혈육을 떠올리며 망설이지 않고 입을 뗐다.

“마지막 조건. 에버하르트가 확실한 죗값을 받게 해 주세요. 내게 그의 죽음을 약조해 줘요."

“…죽음. 그래, 이 길에 뛰어든 이상 형제를 저 버려야 한다는 것 정도 각오했다. 그것 또한 들어주마.”

모든 조건에 망설임 없이 답하는 라몬트에게 만족해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에 대해 읊어 주었다.

“그렇다면 나 다프네 베네디토는 마지막 결전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지원해 주겠습니다. 그로 인해 라몬트 오스왈드가 황제가 된다면 조금 전의 조건을 지켜 주겠다 약조하겠습니까?”

“약조하겠다.”

마지막 확인까지 마친 뒤 나는 아티팩트를 종료했다.

"이걸로 우리의 거래가 성립되었네요.”

라몬트는 어느새 거칠게 부풀어 오른 감정을 갈무리하였는지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쩐지 오늘 밤의 모든 일이 꿈만 같군.”

“꿈을 꾸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 죠. 모든 것을 다 이루고 그 말을 해도 늦지 않을 거예요.”

나는 담담히 말을 하고는 벌써 세 번째로 그 앞에서 손을 내밀고는 흔들었다.

“이제 잡아 줄 때도 되지 않았어요? 언제까지 찬 바닥에 앉아 있을 생각이세요?”

"크흠. 큼.”

라몬트가 헛기침하면서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어찌나 험하게 굴렀는지 흉터와 생채기로 가득한 손을 보니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많이 힘드셨나 봐요.”

"반란을 결심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기사들은 충분한가요?"

“예전만 못하겠다만 그것은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지.”

하긴.

반란군을 정비하는 일은 내 담당이 아니니 라몬트가 알아서 잘 해결할 것이다.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있겠어요?”

“아직 연이 닿는 귀족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귀족의 끈이 없는 것이 문제겠군. 도움을 줄 만한 자들이 있는지 은밀히 접근해 봐야겠어.”

대귀족이라.

오스왈드의 귀족들을 머릿속으로 하나둘씩 떠올리다가 적절한 가문이 떠올랐다.

'공작가라면 다른 귀족들의 힘도 모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참전하게 된 이상 반역을 실패로 이끌 생각 따위 없었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글렌 공작가는 에버하르트가 즉위하기 전부터 그를 지지하던 귀족이었는데.'

라몬트가 반역에 성공한다면 글렌 공작가의 위치도 애매해지겠지. 그걸 이용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렉시우스가 전쟁터에 나간 사이 카롤리나에게 한번 이야기해 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렉시우스가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이왕이면 공작가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좋겠지.'

일단은 라몬트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보류하는 쪽이 좋을 듯해 말을 아꼈다.

라몬트와 계약까지 맺었겠다 이곳에서의 일은 전부 해결한 셈이었다.

밤이 깊어졌다고 한들 모두의 눈에 띄지 않고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난 이제 마탑으로 향할 거예요.

그곳에서 마탑과 연금탑의 조력을 부탁할 것이고요.”

"불가능에 가깝지 않나? 그들은 독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그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폭군을 몰아내는 일이라고 설득해야 죠. 운을 빌어 줘요."

태평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라몬트의 얼굴에는 걱정이 서렸다.

"네게 너무 많은 것을 받는 것 같구나. 숙부라고 하는 놈이 고작이 정도라 면목이 없어.”

“다른 숙부는 더 끔찍하니 괜찮아요.”

별것 아니라는 듯 덧붙인 말에 라몬트의 얼굴에 죄책감이 서렸다.

“그러니 숙부님은 다른 생각하지 말고 반란을 성공시키는 일에만 집중하세요. 이번 기회가 정말 마지막이니까요.”

지금의 그에게는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가지는 것조차 사치였다.

“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숙부님께 제 전부를 걸었어요. 부디 제가 마지막 남은 혈족에게마저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너의 믿음에 보답하마."

이 대답이면 충분했다.

나는 그제야 굳어 있는 표정을 풀고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티팩트를 하나 드릴게요. 마법이 없어도 연락이 가능할 테니 마탑에 도착하면 상의해 보고 연락할게요.”

“고맙다.”

나는 라몬트의 손에 평범해 보이는 돌이 매달려 있는 목걸이를 전해 주고는 라그나르의 손을 잡았다.

“그럼 이만."

가볍게 손을 흔들자 하얀빛이 우리를 감쌌다.

눈을 감았다 뜨니 조금 전까지 있었던 숲이 아닌 낯선 공간이었다.

"텔레포트라니 신기하네."

“지난번에 마탑 앞에 마법진을 그려 두어서 다행이야. 그렇지?”

“응. 편하게 왔다.”

이런 고위 마법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것을 보니 라그나르가 정말 드래곤이라는 사실이 새삼 와닿았다.

겨울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꽃들이 가득 피어난 풍경에 어쩐지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다프네!"

내가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는지 저 멀리서 리카르다가 뛰어왔다.

"우와. 여전히 이상한 망토."

“리카르다 앞에서 그의 옷을 무시하면 안 돼, 독보적인 패션이라고.”

안 돼.

이상한 망토를 뒤집어쓰고는 헐레벌떡 달려오는 리카르다가 넘어질까 걱정한 나는, 라그나르를 재촉해 리카르다에게 다가갔다.

동그란 안경과 짧은 분홍색 머리칼이 흔들릴 정도로 열심히 뛰어오는 모습에 반가워 푸스스 웃었다.

“리카! 뛰지 마. 다칠라."

“이럴 때 보면 누가 오빠고 동생인지 모르겠다니까."

"라그나르.”

"아니, 이상하게 리카르다만 보면 이렇게 투덜거리게 된다?"

자꾸만 리카르다에게 핀잔을 주려는 라그나르에게 한마디하려 했더니, 금세 눈치를 채곤 또 입을 삐죽 내밀면서 곤란한 척을 한다.

"말 돌리지.”

“사실인걸.”

“오빠들이랑 있었던 일을 내가 모를 것 같아?”

내가 눈을 사납게 빛내자 라그나르는 모른 척 손을 흔들며 리카르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리카르다!"

“오, 라그나르!”

리카르다는 이제야 라그나르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듯 눈을 빛내며 더욱 빠르게 뛰어왔고 곧 우리 앞에 도착할 듯싶었다.

“응?”

우리 앞에 도달한 리카르다는 나와 라그나르가 맞잡고 있던 손을 칼로 베어내듯 재빨리 내려쳤다.

그러고는 바로 빈 내 손목을 잡고서 약 올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반갑다, 이 자식아! 그리고 다 프네는 내가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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