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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20화 (119/185)

제120화.

그래, 리카르다 또한 라그나르와 똑같은 정신 연령을 지닌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둘이 어린 시절부터 티격태격하며 사이가 좋았던 것이겠지.

나는 텔레포트로 마탑의 꼭대기에 도착하고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리카….”

피곤한 목소리로 리카르다를 부르는데 그는 이를 활짝 내보이며 환히 웃고 있었다.

몹시 즐거워 보였다.

"아, 저 아래에서 라그나르가 펄쩍펄쩍 날뛸 것을 생각하니 너무 재미있다.”

창문 밖에서 큰 소음들이 들려와 고개를 내미려는데 리카르다가 괜찮다며 나를 붙들었다.

“이곳으로 올라오는 길에 함정을 설치해 놔서 뚫고 올라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유치해.”

“유치하다니? 난 오빠로서 여우 같은 남자를 다프네 옆에서 떼어 놓으려고 한 것밖에 없는걸?"

“라그나르가 무슨….”

어딜 봐서 여우고, 남자냐고 물으려다가 재회한 후의 장면들이 떠올라 양심에 찔려 말을 이어 갈수가 없었다.

"남자기는 하지 .…?"

“그렇지.”

"조금 여우 같기도 했고."

“그렇지!”

리카르다의 격한 반응에 나는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걱정돼서 그래. 우리 다프네를 여우 같은 남자애가 채 가면이 오빠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

“라그나르는 그냥 친구인 거 알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냥 놀리고 싶었다고 말하는 게 낫겠다.”

내 말에 리카르다는 밖에 피어 있는 꽃들보다 활짝 웃었다.

“네게 고자질한 것에 약이 올라서 놀리고 싶었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어느새 앞에 놓인 차를 받아들고는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이렇게 외출한 거야? 연금탑에는 플뢰르를 보내놓고.”

“의논할 게 좀 있어서. 플뢰르는 연금탑에 잘 도착했어?"

“형이 잘 있대. 그런데 연금탑 근처에 수상한 인물들이 발견되어서 쫓아냈다고 하기는 하더라."

어쩜 이렇게 예상이 빗나가지 않을까.

“아마 황제가 보낸 걸 거야.”

"아, 황제가…. 황제가?”

놀란 리카르다의 반응을 뒤로한 채 나는 따뜻한 차를 넘기며 기분좋게 미소를 지었다.

“황제가 왜? 설마 네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거야?”

“의심 중인 것 같긴 해.”

“형이랑 함께 얘기해 봐야겠네.”

리카르다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구석에 놓인 커다란 원형 아티팩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리카르다? 다프네가 도착했나 보네.

"응. 아무래도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 같은데 시간 괜찮아?"

-괜찮지.

아티팩트를 통해 전해져 오던 주위의 소음이 잦아들어 곧 조용해졌다.

"어디서부터 얘기할까?"

“일단 황제가 널 부른 이유."

-황제가 다프네를 불렀다고?

레녹스 또한 믿기지 않는다는 듯 새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생생하게 그려져 작게 웃다가 상황이 상황인 만큼 표정을 갈무리했다.

“황실 납품 건으로 후계자 면담을 한다 하여 황궁에 방문했어."

나는 친엄마의 초상화를 보았던 순간부터 에버하르트와 있었던 일에 대해서 하나하나 빠지지 않고 설명을 이어 갔다.

모든 설명이 끝나자 방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오랜만의 방문인데 나쁜 소식만 가져온 것이 미안하여 두 사람의 눈치를 보는데 갑자기 탑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바닥이 흔들리자 놀란 눈으로 리카르다를 보는데 그의 표정이 흉흉했다.

"황제가 젊은 나이에 노망이 난게 분명하네.”

험악한 기운에 나는 리카르다의 팔을 붙잡았다.

“진정해. 탑에 있는 사람들이 놀랄 거야.”

“후우.”

넘실넘실 흐르던 리카르다의 마력이 사그라들자 미세한 떨림 또한 멈추었다.

건너편에서도 간신히 분노를 추스른 듯 레녹스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탑의 충성을 받겠다고 하다니 배짱이 대단하네. 현 황제는 탑과 맺은 협약을 깨려고 하고 있어.

"편법을 써서 충성을 받겠다는 건가? 쉽게 넘어갈 수는 없겠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나 또한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황제의 요구를 받아 줄 생각은 없어. 탑에 그런 의무를 지게 할 생각도 없고."

내 말에 리카르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기특한 듯 바라보는 것 같았으나 시선의 끝에는 결국 걱정이 스며 있었다.

“하지만 후계자 시험이잖아. 다른 방도가 있는 거야?"

“조금 도박이지만.”

위험하다고 혼이 날 것이 분명하기에 저절로 입이 바짝 말랐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야.'

나는 크게 숨을 고르고는 입을 축이기 위해 앞에 놓인 차를 마저 깔끔히 넘겼다.

그러고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나 반역을 일으켜 볼까 해."

아차,

너무 직설적인 말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꼭 내가 반역의 주도자가 되겠다는 것 같잖나.

아니나 다를까 대화의 흐름이 뚝멈추었다.

“뭐?”

리카르다의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더니 이제는 귀까지 후벼 파며 다시 물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봐. 뭐라고 했어, 다프네?”

“그러니까 반란군을 돕기로 했어. 에버하르트를 몰아내고, 라몬트를 황좌에 앉힐 거야.”

-다프네!

“다프네!”

세세한 설명을 들은 두 사람은 참지 못하고 내게 언성을 높였다.

“위험한 것 알아! 하지만 이건 내 선택이야. 내가 상단을 지키기 위해서 한 선택.”

“네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하지만 이것 말고 방법은 없어.

어차피 에버하르트가 반란군을 모두 처단하게 된다면 나도 언젠간 그의 손에 죽고 말 테고….”

나는 말을 잇다 말고 울컥 올라오는 화를 참으며 이를 갈았다.

"베네디토 또한 쓸모를 다했다 생각하여 버릴 것이 분명하니까."

확신에 가득 찬 내 말에 두 사람은 말을 잇지 못했다.

책상을 거칠게 내려치는지 아티팩트를 통해 커다란 소리가 울렸고, 리카르다는 한숨을 내쉬며 제 얼굴을 감쌌다.

"난 그 빌어먹을 놈에게 어떠한 것도 누리게 해 줄 생각 없어. 그리고 이건 나만을 위한 결정이 아니야. 나도 예전과는 달라졌으니까.”

과거 용의 감옥 때의 일을 언급하자 리카르다의 표정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아마 레녹스 또한 비슷한 표정일 것이다.

과거의 상처를 헤집는 것은 괴로웠으나 난 그날의 상처를 마주하고 극복해 내야 했다.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결정한 일이야.”

"다프네.”

"감히 두 사람이 있는 탑을 무시한 것도 화가 나고, 베네디토를 물건 취급한 것도 화가 나지만!

가장 화가 나는 건…."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분노가 담겼다.

“권력에 미쳐서 가족의 죽음을 묵인하고, 하나 남은 형제마저 돌아서게 만들 만큼 나라를 망친 자가 떵떵거리면서 사는 것이 화가나!”

"네 마음이 어떤지는 잘 알겠어.”

리카르다는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네가 무슨 심정으로 내린 결정 인지도 알겠고, 네 선택이라면 난네 선택을 존중할 거야.”

장난기가 가신 진지한 리카르다의 말에 입가에 힘겨운 미소가 지어졌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계획을 갖고서 벌인 일이겠지. 좋아, 나도 네 선택을 존중해 줄게.

다행히도 레녹스 또한 이 결정을 더는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

우선 작은 산을 넘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조금 전에 라몬트를 만나고 왔어.”

-황제의 눈을 플뢰르 쪽으로 돌리고 다프네는 반란군을 만나러간 거였구나.

“응. 미안해. 오빠들에게 이렇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다 자라 성인이 되었어도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곤란한 상황을 안겨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리카르다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괜찮아. 아무리 황제라고 한들 쉽게 탑을 건드릴 수 없으니까.

그리고 곱씹을수록 화가 나네?"

-확실히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지.

“그래서 권유할 게 있는데. 라몬트를 지지해 주지 않겠어?"

“그자를?"

“아니, 사실 지지해 주지 않아도 괜찮기는 해. 나는 내 앞으로 탑의 물품을 사들일 거고, 그걸 반란군에게 제공할 생각이거든.”

만약 반란이 실패한다 하여도 두탑은 발뺌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두기로 마음먹었었다.

애초에 내 결정으로 두 사람에게 큰 피해를 끼칠 생각 따위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두 사람이 걱정하지 않도록 자세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그리고 라몬트에게 약속을 받았어. 그를 황제의 자리에 올려 준다면 마탑과 연금탑의 완전한 독립을 약조하겠다는 것을 말이야.”

“완전한 독립..."

리카르다가 작게 중얼거렸고, 레녹스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곧 물어왔다.

-새로운 협약을 맺는 내용이라면 진중히 생각해 볼 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

현재 오스왈드의 황실과 마탑과 연금탑이 맺은 협약은 각 탑의 독립은 보장하지만 오스왈드의 영토에 있는 한 오스왈드 황실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조건 관련해서는 내가 개입할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라몬트에게 건네준 아티팩트와 똑같은 목걸이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자세한 사항은 탑과 관련 없는 나보다 두 사람이 들으면 좋을 것 같아서 통신이 연결된 아티팩트를 주고 왔어.”

그렇게 말을 하고서 리카르다를 바라보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 있는 것이 보였다.

적어도 나쁜 반응은 아니었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비밀스럽게 탑으로 달려온 거야?"

얼추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리카르다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응. 긴밀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거든.”

“이제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 것도 알고 있는데. 난 왜 이렇게 걱정이 될까?"

그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소중한 것을 얻은 이상 쉽게 끝낼 생각 없어. 내 가족들도 우리 상단의 모두도 다 내가 지킬 거야.”

"어떡하지. 우리 다프네가 이렇게 다 커 버려서 속상해서 어떻게 해.”

어느새 리카르다의 눈에 눈물이 고였는지 그가 안경을 거두고는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그 장난스러운 모습에 아티팩트너머의 레녹스에게서 헛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들도 내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거 알고 있지? 말로는 잘 표현 못 했지만 언제나 고마워하고 있어.”

-왜 연금탑이 아니라 마탑에 간 거야? 이러면 안아 줄 수도 없잖아.

다정한 레녹스의 목소리에 참던 웃음을 터트렸다.

즐겁게 웃느라 중요한 사실을 잊을 뻔했다.

“참! 레녹스! 플뢰르에게 연금탑 입장 허가권을 전해 줄 수 있어?"

-허가권을?

"내 지인이 훌륭한 발명가인데 집안의 반대가 심해서 지금껏 연금탑을 구경해 본 적이 없다나 봐.

방문하는 걸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알겠어. 슬슬 연락을 끝내야겠다. 어머니께 허락 꼭 받는 것도 잊지 말고, 끝까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보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잠시 후 아티팩트가 종료되는 것에 무언가 큰일을 해낸 듯 몸에 피로가 찾아왔다.

내가 몸을 늘어트리는데 리카르다가 갑자기 나를 폭 끌어안았다.

“우리 동생 너무 예뻐서 어떻게 하지? 그냥 아무도 모르게 황제를 죽이고 올까?"

“왜 위험한 소리를 하고 그래.”

조금 전에 반란에 가담하겠다 선언한 것 치고는 양심 없는 말이었으나 날 안아 준 리카르다의 등을 토닥이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스물여섯이나 먹었으면서 왜 이렇게 감수성이 풍부한 거야.”

웃으면서 타박하자 리카르다는 억울하다는 듯 덧붙였다.

"마흔일곱이나 먹은 울보 아저씨도 있는데 뭐 어때.”

“그것도 그렇지.”

악셀리우스는 잘 지내고 있나 모르겠네.

시몬도 아직 연락이 없고 말이야.

리카르다의 등을 도닥여주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쾅 소리가 나며 문이 거칠게 열렸다.

라그나르가 숨을 헐떡이면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리카르다를 노려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우리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놓으려는 듯했으나 리카르다.

가 라그나르까지 껴안는 것이 더 빨랐다.

“우리 막내들. 제발 천천히 자라 주라.”

“뭐야? 안 놔?”

짜증이 가득한 라그나르의 목소리는 리카르다의 품속으로 묻혀버렸다.

나는 다시 다투는 두 사람을 보다가 후후 웃었다.

여전히 할 일은 많았으나 첫 발을 내디딘 기분은 꽤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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