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분을 안고서 어서 수도로 돌아가 카롤리나를 만나 봐야겠다. 제121화.
새벽에 조용히 떠났던 여정은 돌고 돌아 장장 일주일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오래간만에 보는 저택이 반가워져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는데 어쩐지 주변을 감싸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뭐지?'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보였다.
저택의 고용인들이 슬금슬금 내
'착각인가?’
혹시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걱정되는 마음이 생길 때쯤 윈스턴이 나를 맞이하였다.
"다녀오셨습니까, 아가씨. 외출은 즐거우셨나요?”
평범한 인사에 살며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윈스턴. 혹시 그간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일이라니요. 아무런 일도 없었답니다.”
윈스턴의 답은 미리 준비한 듯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내게 뭔가 숨기는 건 아니죠?"
“물론이죠.”
망설임 없는 대답과 함께 지은 윈스턴의 깔끔한 미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저택의 분위기가 뒤숭숭한 것 같은데. 아니라면야."
"아. 한 가지 소식을 깜빡했군요.
클레멘스에서 편지가 도착하였습니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시몬에게 보냈던 편지의 답장이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나는 라그나르의 손을 마주 잡고 흔들면서 환히 웃었다.
"드디어 도착했대.”
평상시 보다 시간이 두 배는 더 소요되어 걱정했었는데 안도감에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와 다르게 라그나르는 한숨을 내쉬며 걱정을 토해 냈다.
“시몬이 편지에 무얼 썼을지 걱정된다.”
“업보지.”
“그렇지. 이건 내 업보지. 마음을 단단히 먹고 편지를 봐야겠어.”
크게 한숨을 쉬는 라그나르를 장난스럽게 놀리다가 우선 챙겨야 할 것을 챙기기로 했다.
“편지는 어디 있어?"
“여기 있지."
등 뒤에서 다정하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기쁨이 가득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저씨!"
“오래간만이야, 다프네. 못 본 사이에 더 멋지게 자랐구나. 그리고… 라그나르도 참 오랜만이네."
나를 보며 환히 웃던 악셀리우스의 표정이 라그나르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차갑게 변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사나운 인상으로 싸늘히 노려보자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내가 편지를 받고 얼마나 놀랐을지 모를 거다.”
라그나르가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꾸벅하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미리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해요.”
라그나르의 사과에도 악셀리우스는 한참이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라그나르의 정수리만 노려보았다.
오히려 내가 좌불안석이 되어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잠시 뒤 드디어 악셀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사정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래도 걱정시켜 드린 건 사실이니까….”
라그나르가 말을 흐리자 악셀리 우스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악셀리우스의 험악한 표정에 주변에 있던 고용인들이 걱정스러워하는 찰나 악셀리우스는 참지 못하고 라그나르를 제 품에 와락 껴안았다.
“…괜찮다. 무사히 살아 돌아와줘서 고맙다, 정말 고마워."
악셀리우스는 거칠게 라그나르의 등을 두드리면서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고맙다고,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물기가 스며든 목소리임에도 용케 눈물을 터트리지 않고 있는 모습에 오히려 보고 있는 내 눈가가 시큰거렸다.
라그나르는 멍하니 악셀리우스의 손길을 받다가 그를 따라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껏 제대로 꺼내지 못했던 말이 드디어 라그나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다녀왔습니다.”
과격한 손길로 라그나르의 등을 두드리던 악셀리우스는 결국 참던 눈물을 터트렸다.
감동적인 재회의 한 장면이었다.
*
악셀리우스가 건네준 시몬의 답장은 작은 상자와 고급스러운 직인이 찍혀 있는 카드 한 장이었다.
라그나르는 오히려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열기 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본다고 사라지지는 않아.”
내 재촉이 이어지자 라그나르는 카드를 들어 보고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누가 봐도 사적으로 보낸 편지가 아니지 않아? 직인이 찍혀 있잖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중앙의 사자를 월계수 잎이 감싸는 문양은 마치 시몬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지금껏 내가 받았던 편지에는 없었던 것이기에 저절로 시선이 가는데 궁금증은 악셀리우스에 의해 쉽게 해결되었다.
"아. 그건 황태자 직인이야. 황태자의 지위로 직무를 처리할 때 쓰는 인장이지.”
악셀리우스의 말에 라그나르는 오히려 걱정이 커지는 듯 표정이 좋지가 않았다.
“그럼 이건 황태자로서 보낸 편지라고 생각해야 하는 거잖아."
저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걱정이 될 법도 하다.
라그나르의 목소리가 어쩐지 우울하게 들려 나와 악셀리우스, 그리고 엄마마저 입가에 되어진 웃음을 참았다.
내 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지켜보는 재미가 더 컸다.
모두의 기대를 이기지 못한 라그나르가 상자를 열어 보았고, 그 상태 그대로 굳었다.
안에는 하얀 장갑 하나가 들어있었다.
라그나르가 황급히 카드를 펼쳐 보았다.
결투장이었다.
“와우.”
악셀리우스가 감탄을 참지 못했고, 엄마는 그런 그의 손등을 가볍게 내려쳤다.
장소와 시간은 미정이지만 클레멘스로 돌아오자마자 결투하자는 내용에 라그나르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이 떠올랐다.
“결투장은 어디로 잡아야 하는 걸까.”
“안 말려 줄 거야?”
“시몬의 선택이잖아. 존중해 줘야지. 용서받고 싶으니까 당연히 응할 줄 알았는데.”
지그시 쳐다보는 내 시선에 라그나르가 땀을 삐질 흘리며 어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만."
“그럼 됐네. 내년에 클레멘스로 돌아갈 테니 가자마자 결투장부터 찾아봐야겠어. 생각해보니 타임캡슐도 뒤늦게 열겠네.”
"으응.”
"어디까지나 모든 일이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흠칫 놀라 다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다행히도 엄마와 악셀리우스에게 닿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어느새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클로에. 여기 뭐 묻었다.”
"어디? 여기?”
"아니, 여기.”
엄마의 입가에 빵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는지 악셀리우스가 입가에 미소를 가득 짓고는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것이 보였다.
다정다감한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라그나르의 옆구리를 툭 쳤다.
“저희 외출 좀 하고 올게요. 두분도 두 분 만의 시간을 보내세요.”
“다녀오겠습니다.”
내 의도를 곧바로 눈치챈 라그나 르도 나를 따라 일어섰다.
우리가 황급히 일어나자 엄마는 조금 당황한 눈빛을 띠었으나 악셀리우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그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자 눈치를 채고 자리를 벗어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방을 나서고 문을 닫자 곧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화기애애한 기운이 문밖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아카데미 생활을 하는 동안 더 가까워져 있었다.
엄마와 악셀리우스는 내 생각보다 아마도 악셀리우스의 마음이 변치 않고 언제나처럼 견고하게 유지되어 있기 때문이겠지.
어느새 완벽한 연인이 되어 버린 둘의 모습에 우리는 그저 웃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 * *
결투장에 대해서도 의논해야 했고, 디저트를 미처 먹지 못한 터라 라그나르를 이끌고 번화가의 유명한 카페로 나왔다.
“사람은 언제 결혼할까?"
내 질문에 케이크로 향하던 라그나르의 손이 멈추었다.
엄마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었고, 주변의 시선에 얽매이기 싫어 결혼을 택하지 않은 것이라 하지만….
“꼭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네.”
결혼하겠다고 하면 엄마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텐데.
레녹스의 아버지는 레녹스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돌아가셨다 하였고, 리카르다의 아버지도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두 사람 다 결혼 관계가 아닌 애인 관계였기에 크게 문제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내가 문제가 되려나? 친엄마의 누명을 벗기게 된다면 입양아임을 밝혀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하고 싶어지면 하지 않을까? 지금도 충분히 보기는 좋잖아.”
"엄마가 결혼하고 싶은데 어떠한 이유가 있어 망설이는 것이라면 도와주고 싶어서 그랬지, 뭐.”
그냥 내 바람이려나.
가볍게 웃으며 넘어가려는데 라그나르의 입가에 까만 가루가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가볍게 웃으며 오른쪽 볼을 톡톡두드리며 말했다.
“라그나로, 여기 뭐 묻었다.”
"어디? 여기?"
라그나르가 왼쪽 볼을 만지작거리자 어쩐지 조금 전 클로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라그나르의 왼쪽 볼을 문질렀다.
라그나르의 귓가가 조금 붉어진 것이 보였다.
피식 웃으며 모른 척 대화를 이어 가려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어라, 선배님.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오랜만이네, 제롬."
자신의 일행들을 잠시 물리고서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는 아카데미에서와 다르게 피곤함이 가득했다.
"나는 방학에도 일하는데 선배님은 데이트하시는구나."
"데이트 아니야. 잠시 외출."
"흐음. 그래요? 선배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아니고요?"
제롬이 능글거리는 눈빛으로 라그나르를 눈짓하며 말했다.
내가 새초롬하게 노려보자 바로 꼬리를 내리며 어색히 웃어 버렸지만,
“하지만 누가 보아도 애인처럼 보이니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후작가에서 운영하는 신문에만 실리지 않는다면 큰 걱정은 없을 것 같지만 충고 고마워."
장난스럽게 비꼬아 주고는 서로 마주 보며 피식 웃는데 제롬이 무언가 떠올랐는지 품에서 작은 편지 하나를 꺼내 주었다.
“참. 어머니께서 작은 사교 모임을 여신다고 하셨어요. 어머니가 선배는 꼭 초대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는데 운이 좋네요.”
“아아. 장학 재단과 관련된 모임이구나. 감사하게도 초대해 주셨네. 디미트리 후작 부인의 초대라면 가야지.”
“어머니께서는 이상하게도 선배를 참 좋아한다니까요. 보면 볼수록 지인의 얼굴이 떠오른다나?"
제롬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신의 할 일이 끝났다는 듯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저택은 괜찮아요?"
“괜찮냐니?”
“선배가 탑으로 떠나고 나서 렉시우스가 몇 번 찾아갔다고 하던걸요. 아, 이제 공작님이라 불러줘야 하나?"
“공작님? 설마 며칠 사이에 작위.
를 계승받은 거야?"
"모르셨어요? 이번에 출전할 때한 부대의 총 책임자를 맡게 되어서 급하게 물려받았는데.”
처음 듣는 소식에 표정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내 놀란 표정에 제롬은 조금 신기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급하게 설명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한 부대의 책임자를 맡으려면 그에 걸맞은 직급이 필요하다는 황제 폐하의 말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어요.”
제롬의 말이 끝나고 나는 문득 어수선하던 저택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무서운 표정으로 찾아온 악셀리우스 때문이라 생각하며 가볍게 넘겼었는데 그것뿐만이 아니었던 건가?
“그런데 렉시우스는 왜 선배네 집에 들이닥친 거예요? 그 정도로 이성이 없는 놈은 아닐 텐데. 공작위도 계승 받았으면 정신 좀 차릴 때가 되지 않았나?"
"내가 사고를 좀 친 게 있어서."
"아. 가끔 보면 선배가 무슨 사고를 칠 것 같긴 했어요."
“잡담은 나중에 하자. 연락할게.”
나는 앉아 있는 라그나르를 챙겨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급하게 마차를 타고서 저택에 도착했을 때 저택의 로비에는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